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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가 올해 창간 20주년을 맞아 '나의 스무살' 기사 공모를 진행합니다. 청춘이라지만 마냥 빛날 수는 없었던, 희망과 좌절이 뒤섞인 여러분의 스무살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편집자말]
동녘에 해뜰때 어머님 날 나시고 
귀엽던 아가야  내인생 시작됐네 
열두살시절에 꿈있어 좋았네 
샛별의 눈동자로 별을헤던시절
커피를 알았고 낭만을 잡았던 
스무살 시절에 나는 사랑했네
- 장계현의 <나의 20년>
 
1984년, 나는 16살 어린 나이에 중학교를 자퇴하고 스무 살까지 전자부품을 만드는 공장을 다녔다. 한 달에 두 번 격주로 쉬는 일요일을 앞둔 토요일 저녁, 공장 회식자리에서 또래 친구들과 불렀던 노래다. 나의 스무 살은 노랫말처럼 별을 보면서 커피 한 잔과 낭만을 즐길 시간이 없었다. 더욱이 사랑은 꿈에서나 할 수 있는 사치와 같았다.

1987년 나와 동료들은 붉은 화염병과 흰 연기를 뿜으며 날아가는 최루탄을 공장 옥상에서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주변의 큰 공장들에서 울려 퍼지는 파업구호도 나와는 상관없어 보였다. 6.29선언과 직선제 개헌으로 세상은 바뀔 것처럼 요란했지만, 그것이 내 삶에 변화를 가져다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평생 기름밥 먹을래?"
 
 열여섯부터 스무살까지 다녔던 공장에서
 열여섯부터 스무살까지 다녔던 공장에서
ⓒ 오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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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에 일하러 갔다가 '전라도 놈'이라고 무시당했다는 아버지는 정권이 바뀌는 것을 바랐지만, 전두환에서 노태우로 정권이 이어졌다. 1988년 서울올림픽, 당국은 상계동에서 노점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친구의 집을 미관상 좋지 않다며 철거해버렸다.
   
당시 나는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 반감을 갖기보단 그저 '공돌이'(노동자의 비속어)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때 중학교 졸업 후 상경해 온갖 일을 했다는 J형은 공장을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고 했다.

"더 늦기 전에 너도 공부해라. 안 그러면 평생 기름밥 먹는다."

공장을 그만둔 J형은 멀지 않은 곳에 작은 월세방을 얻었다. 찾아갈 때마다 그는 밥상 위에 크고 두꺼운 책을 올려놓고 앉아 있었다. '평생 기름밥 먹을래'라는 그의 충고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새로운 삶에 대한 욕구와 도전 의식이 마음을 흔들었다.
  
해가 바뀔 때마다 짧은 학력으로는 공장을 벗어날 수 없다는 자괴감과 열등의식에  사로잡혔다. 관리자들은 열심히 일하고 기술을 익히면 대학교 졸업장 못지않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격려했지만, 나는 그 말이 '서커스에 이용할 동물을 조련할 때 사용하는 미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스무살을 넘기면 기회와 시간이 더 멀어질 것 같았던 나는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기로 했다. 첫차를 타고 신설동에 있는 검정고시학원 새벽반에 다녔다. 수업을 마치고 죽어라 뛰어 지각하지 않을 시간에 맞춰 공장에 출근했다.

그렇게 나의 스무 살은 새벽공기를 가르며 매일같이 달리고, 책을 읽는 재미에 푹 빠진 시간이었다. 공장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시작한 검정고시는 무기력했던 삶과 낮아진 자존감에 새싹을 틔울 수 있는 씨앗이었다.
  
심장이 뛰는 세상 속으로
  
중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한 나는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앞두고 야간학교를 다닌다는 S를 알게 되었다. 그를 따라간 건물 지하에는 대학생 교사들과 공장노동자, 일용직, 장애인이 있었다. 그곳은 검정고시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교과서에 없는 역사에 대한 공부도 하는 '노동야학'이었다.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전태일 평전을 읽고 토론을 할 때마다 심장이 뛰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사회과학 서적은 책장에 쌓여갔다. 어려운 단어와 내용이 많았지만 읽고 또 읽으며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당시 발행되던 시사월간지 <말>은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줬다. 이후 <오마이뉴스>가 창간되면서 나는 시민기자로 글을 쓰게 되었다.
  
1991년 나는 경찰의 쇠파이프 진압으로 사망한 대학생 강경대를 추모하고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했다. 시위 진압 차량인 페퍼포그를 앞세워 '지랄탄'(다연발 최루탄)을 난사하는 경찰과 흰색 헬멧을 쓴 백골단에 맞서 우리는 깨진 보도블록을 던졌다. 소주병에 심지가 박혀 있는 화염병을 들었을 때 몸이 부르르 떨렸지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싸웠다.

노동야학에서 보냈던 시간은 우물 안에 있던 개구리가 뛰어나올 수 있게 길잡이를 해준 나침반과 같았다. 고등학교 졸업자격 시험은 합격했지만 대학 진학의 꿈은 미련 없이 접었다. 새로운 삶에 대한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몸과 마음이 단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올해 첫 병아리가족모임은 친구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했다
 올해 첫 병아리가족모임은 친구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했다
ⓒ 오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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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의 삶, 지금의 나를 밀어왔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가르치는 시민단체를 찾아갔다. 대학생부터 사무직, 공장노동자, 일용직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참여했다.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과 만나면서 나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안목을 넓혀갔다. 자기소개 하는 시간에 '격동의 20년을 살아왔다'고 당당하게 말했다가, 다른 이들의 삶의 이력을 들은 후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강좌에 참여한 사람 중에는 유난히 나와 동갑내기(1969년)가 많았다. 살아온 삶의 방향은 달랐지만 정치와 사회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에서는 동질감이 있었다. 전체강좌가 끝난 후에도 우리는 자주 어울렸고 정기적인 만남을 위해 모임도 만들었다.
  
친구들은 서로에게 비빌 언덕이 되었고,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모두가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했고, 현재 자식들의 평균 나이는 우리가 만났던 갓 스물을 넘긴 나이가 되었다.
  
파릇파릇한 청춘들은 어느새 하늘의 명을 알고 따른다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 오십 줄에 들어섰다. 그동안 우리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각자가 원하는 삶의 궤도를 찾아가면서 제 자리를 잡았다. 이번 달 모임에서 건배사를 자청한 친구는 '공정'(公正)을 화두로 꺼냈고 희망을 말했다.

공부하라고 충고를 해준 J형은 공무원이 되어 고향에서 근무하며 공장에서 만난 연인과 결혼했다. 야학에서 만난 C는 나보다 3살 정도 어렸지만, 다양한 경험과 지식으로 나에게 많은 것을 알려줬다. 기타를 잘 치던 그는 인디 밴드를 하다가 그만두고, 미술 쪽의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암울했던 사춘기와 공장노동자의 삶은 같은 처지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줬다. 스무 살의 세상에서 겪은 현실과 만났던 사람들이 지금의 나를 밀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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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도 짓고, 농사교육도 하는 농부입니다. 소비만 하는 도시에서 자급자족의 생산을 넘어서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농부의 길을 가고자 합니다. 흙에서 사람냄새를 느꼈을때 가장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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