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매의 여름밤>(2019)

영화 <남매의 여름밤>(2019) ⓒ 타이거 시네마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4관왕, 서울독립영화제 새로운선택상에 빛나는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2019)은 평범함과 비범함이 공존하는 영화다. 걸핏하면 할아버지에게 손을 벌리는 무능한 아버지(양흥주 분)를 따라 당분간 할아버지 집에 얹혀 살게된 옥주(최정운 분)와 동주는 부모의 이혼으로 엄마가 부재한 한부모 가족이다. 여기에 옥주의 아버지를 뒤를 이어 남편과 오랜 시간 갈등을 겪은 고모(박현영 분)까지 할아버지 집으로 들어와, 잠시 삼대(三代)가 오손도손(?) 살아가는 가족의 형태를 이룬다. 

극 초반 아빠, 동생과 함께 재개발로 곧 허물어질 살던 집을 뒤로하고 할아버지 집에 살게된 옥주는 최근 왕래가 뜸했던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다. 자신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혼자만의 방이 필요한 시기인데 과거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빠, 고모가 쓰던 물건들로 빼곡한 할아버지의 집은 도무지 그럴 틈을 주지 않는다. 할아버지 집으로 온 첫 날 동생이 자기 옆에서 자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던 옥주였건만, 고모가 오자 흔쾌히 곁을 내준다. 

마지막에 일어나는 사건 외에 <남매의 여름밤>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대체적으로 잔잔하고 소소하게 다가온다. 물론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옥주에게는 자신이 겪는 대부분의 일들이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절망스럽게 느껴지겠지만 이 또한 별다른 굴곡없이 흘러간다. 심지어 영화 후반부에 옥주가 거쳐가야 했던 일 또한 별일 아니었던 것처럼 스쳐지나가 버린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2019)

영화 <남매의 여름밤>(2019) ⓒ 타이거 시네마

  
 영화 <남매의 여름밤>(2019)

영화 <남매의 여름밤>(2019) ⓒ 타이거 시네마


몇 년 전만 해도 한국 독립 영화라고 하면, 캐릭터가 겪는 감정의 고통을 극대화하여 날 것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곤 했다. 하지만 최근 부산국제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상영된 소위 '독립 영화'로 분류되는 영화들을 보면 극중 인물이 겪는 고통의 강도를 최소화하고, 이를 은유적으로 암시하는 태도를 취하는 경향을 종종 보인다. <남매의 여름밤>은 이러한 영화적 태도의 최전선에 서있는 듯한 영화다. 

몇 년 전 부모의 이혼을 겪은 옥주는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할아버지 집에서 지내게 된다. 몸이 매우 편찮으신 할아버지와 같이 지내는 것도 즐거워 마냥 천방지축 신나게 뛰어다니는 남동생 동주와 달리 조금 철이 든 옥주는 일상적인 생활 소음 또한 쉽게 흘려보내지 못한다. 일찍이 '눈치'라는 것을 파악한 옥주가 행하는 일탈은 자신의 반대에도 엄마를 만나러간 동생과 치고받고, 쌍꺼풀 수술을 시켜주지 않는 아빠에게 항의하는 뜻으로 보란듯이 문을 '쾅' 닫고, 아빠가 거리에서 파는 짝퉁 운동화를 몰래 빼돌려 팔려다가 들통나 파출소에 끌려가는 정도다. 

이 정도의 사고도 치지 않고 정말 평온한 학창시절을 보낸 모범생들도 더러 있겠지만, 세상 모든 고통을 다 짊어지고 가는 듯한 요근래 독립영화 속 '질풍노도' 캐릭터들에 비하면 <남매의 여름밤>의 주인공들이 겪는 일들은 굉장히 심심하게 느껴질 정도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남매의 여름밤>의 인물들이 거치게 되는 사건들이 결코 시시하거나 사소하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의 순간들을 따뜻하고 영민하게 포착했기 때문이다. 

단국대학교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졸업작품으로 제작된 <남매의 여름밤>은 전형적인 학생 독립영화 제작 방식을 보여 준다. 보통의 상업영화와 비교했을 때 터무니 없이 적은 제작비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로케이션을 최소화하고 인공 조명 대신 자연광의 빛을 이용해 영화를 만들었다. 언뜻 보면 지극히 평범해보이는 <남매의 여름밤>을 빛나게 한 것은 주요 로케이션 장소로 등장하는 할아버지의 집과 자연광이 선사한 빛, 배우들이다. 

80, 90년대 주택가에서 볼 수 있었던 볕 잘 드는 오래된 2층 양옥집은 어쩌면 살면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옥주에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포근한 위안과 안락함을 선사한다. 적어도 이 집에 머물 때 만큼은 옥주와 동주가 건강하고 따뜻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라는 안심이 든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2019)

영화 <남매의 여름밤>(2019) ⓒ 타이거 시네마

  
 영화 <남매의 여름밤>(2019)

영화 <남매의 여름밤>(2019) ⓒ 타이거 시네마

 
어딘가 모르게 허술하고 못미더워 보이지만 옥주, 동주 남매와 함께 살고있는 어른들의 존재도 인상적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강원도의 힘>을 시작으로 매 작품마다 특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고모 역의 박현영 배우와 강원 지역 극단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장우진 감독의 <춘천,춘천>, <겨울밤에>를 통해 독립영화의 든든한 얼굴이 되어주고 있는 양흥주 배우의 넉살, 할아버지로 등장한 노배우의 환한 미소는 두고두고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여기에 상업영화에서는 도통 볼 수 없는 여백을 살린 화면 구성과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는 자연광 빛이 영화의 기품을 더한다. 화려한 기교 대신 정갈한 미장센, 시나리오와 같은 영화의 기본에 충실 하고자하는 성실한 태도가 돋보이는 영화 <남매의 여름밤>이다. 
남매의 여름밤 영화 가족 부산국제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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