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물었다. "배우의 권리는 어디까지일까?"

친구가 물었다. "배우의 권리는 어디까지일까?" ⓒ 픽사베이


"배우의 권리가 어디까지인지 정말 모르겠어."

A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에게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무어라 대답할지 몰라 먹고 있던 칼국수 면발을 젓가락에 감았다 풀었다 반복했다. 배우에게 권리라는 것이 있었던가? 나에게 '권리'는 배우와 매칭되기에는 참 낯선 단어였다.

A는 작년 4월 초연을 한 ㄱ공연 멤버였다. 그 공연이 올해 재연을 하게 되면서 공연 및 연습 일정을 잡고 있는데 자신만 유독 다른 멤버들과 시간이 맞지 않아 일정 결정에 차질이 생기고 있어 난처하다고 했다.

"그냥 내가 이 공연을 안 하겠다고 해야되는 거야? 다들 은근히 그걸 바라고 있는 거 같아. 그게 편하니까. 근데 난 나름 이 작품이 재밌고 초연 때 해보지 못한 것들을 해내면서 배우로서 더 성장하고 싶단 말이야. 분명히 난 초연할 때 정말 열심히 했고 기여한 부분도 많은데 그거에 대한 지분은 전혀 없는 거 같아. 이럴 때 난 배우로서 어떤 권리를 내세울 수 있는 거야? 그냥 내가 죄인 같아."

A의 질문에 나 역시 한 번도 배우의 권리와 권한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공연을 만드는 과정에서 배우는 2차원적인 희곡을 3차원의 살아있는 장면으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무리 똑같은 희곡일지라도 그것을 어떤 배우가 어떻게 구현하느냐에 따라 그 장면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그리고 연출이 동선을 지정하여 그림을 만들던 예전 방식과 달리, 요즘은 희곡의 기본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배우들의 즉흥을 통해 장면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기에 더더욱 배우의 기여도가 높다. 그리고 처음으로 공연하는 작품일수록 이런 배우의 기여도는 더욱 커진다.

하지만 이렇게 공연이 올라가고 나면 대부분 그 공연은 공연을 제작한 극단이나 연출이 가져간다. 신기하게도 이렇게 생명이 한번 불어 넣어진 공연은 그 생명을 유지하게 된다. 어딘가에 초청되거나 지원사업을 통해 재공연을 하게 되는데 배우들은 타이밍이 맞으면 다시 그 공연을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저 한 찰나를 함께 나눈 사람이 된다. 나의 창조적 에너지와 노력을 쏟아 만들어낸 작품을 누군가가 그대로 하고 있고, 그 결과를 특정 극단과 연출이 지속적으로 누리고 있는 걸 볼 때면 씁쓸함이 느껴질 때가 있다.

두 달 동안 10만 원  받으며 최선을 다했지만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다.'
'무대에서 최종적인 영광을 누리고 별처럼 빛나는 존재가 바로 배우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하나의 공연이 완성되기까지 배우의 관여도나 기여도에 대한 보상(유명한 배우가 아닌 이상 출연료로 충분한 보상을 받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혹은 저작권에 대한 개념은 참으로 미미한 것이 현실이다.

나 역시 이런 경험이 많다.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두 달 동안 단돈 10만 원을 받으면서도 배우로서 최선을 다해 작품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그리고 그 공연들이 나를 떠나 무럭무럭 자라, 극단과 연출의 대표작이 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문득 허전함이 느껴져도 작품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거라고 여기며 무엇이든 배우는 자세로 해보고자 들어오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당시만 해도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인맥을 쌓고 다양한 작품으로 무대에 설 수 있는 그 경험 자체가 나에게는 보상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30대 중반이 넘어서면서부터 뭔가 계속 부족했다. 배가 고플 때 적정량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느끼는 그런 깔끔한 충족감. 난 연극 작업을 하며 그런 충족감을 느끼기를 원했지만 늘 허기졌다. 그리고 어느새 난 지쳐있었다.
 
A와 대화를 나눈 이후, 나는 내가 연극 작업을 하며 충족감을 느끼지 못하고 허덕이는 이유가 배우로서 권리와 권한에 대한 고민의 부재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배우에게는 연출이나 제작자, 기획, 작가에게 선택받아야 한다는 깊은 불안이 있다. 여기서부터 일종의 권력 관계가 형성되곤 한다. 작업 환경이나 방식, 태도 등이 불편하다고 느껴져도 싫다고 말하면 다음에는 선택받지 못할까봐 말을 아끼게 된다.

그리고 자본의 논리 앞에서 일부 연극 배우는 약자가 된다. 모든 연극 제작 현실이 다 같지는 않겠지만, 제작비가 부족할 경우 배우의 출연료부터 삭감하고 연습실 대관료를 아끼기 위해 싸구려 지하연습실에서 연습을 진행할 때도 있다. 시간당 5천 원 정도 하는 지하연습실은 자신의 몸을 악기로 쓰는 배우들에게는 정말 최악이다. 코를 찌르는 곰팡이 냄새, 창문과 환기구가 없어 가득 쌓인 먼지, 4월에도 전열기를 틀어야 하는 냉골 바닥, 너무나 더러워 목마름과 오줌을 참게 만드는 화장실. 이 곳에서 배우들은 적어도 6주 이상 연습을 한다. 나는 이런 연습실에 들어가는 것이 너무도 싫어서 연습을 빠지고 싶다는 충동이 들 때도 있었다.

배우도 직업... 연극 무대는 노동 현장이다

배우를 직업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곳은 노동의 현장이다. 예술이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우리에게는 창작이 생계를 유지하는 노동인 것이다.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 현장을 더욱 안전하고 편안하게 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노동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받고자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권리다. 그리고 연극작업에 참여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에게는 역할에 상관없이 각자 행사할 수 있는 동등한 권한이 있다.

배우가 주체적으로 연극작업에 임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프로 배우로서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배우의 권리와 권한을 적절히 행사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지금까지 배우로 연극을 하며 나도 모르게 소모된다고 느꼈던 것은 의무 이행과 권리 실현의 팽팽한 고무줄을 제대로 조율하지 못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두렵다. 배우의 권리와 권한에 대해 언급하다가 연극 현장에서 까다로운 배우로 낙인찍혀 배제될 것만 같다. '그런 건 그냥 이상적인 환상이야. 포기해'라는 내 안의 목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혼자 슬쩍 속삭이며 연습해본다.

"제가 이 공연에 기여했으니 제가 이번에도 공연할 수 있게 일정을 맞추어주세요."
"이 공연을 재공연할 경우 초연 배우인 제게 먼저 알려주세요."
"돈이 없어 어렵다면 단 며칠이라도 지상에 있는 연습실에서 연습하면 어떨까요?"
"그 연습실은 이동 거리가 너무 멀어요. 꼭 그곳에서 해야 한다면 교통비를 더 지급해주시면 좋겠어요."
"꼭 식사시간은 확보해주세요."


어쩌면 너무 소소해서 권리라고 이름 붙이기도 민망한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내가 현재 연습하고 있는 ㄴ공연의 연출님에게도 슬쩍 카톡 메시지를 보내본다.

"연출님, 공연 일주일 전부터는 연습실을 옮겨서 극장 무대 크기와 비슷한, 넓은 연습실에서 하면 어떨까요? 공간이 갑자기 넓어지면 연기 호흡과 움직임이 전혀 달라져서 어려울 거 같아요."

답이 오기 전까지 괜스레 두근두근. 직접 표현하니 은은하게 차오르는 뿌듯함. 이것이 내가 찾아 헤매던 충족감의 시작점일지도 모르겠다.
연극배우 노동 권리와 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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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예술의 고리를 정성스럽게 연결하고 싶어 움직이고 글을 씁니다. 백발의 노인이 되어서도 무대 위에 설 수 있는 그날을 오늘도 꿈꾸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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