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이 슌지라는 감독에 대해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는 단명하다. '빛과 어둠의 시네아스트'라는 이명, 이 별명은 그가 영화에서 보여주는 색감에서 비롯되었다. 요컨대 <러브레터>의 삶과 죽음이라는 두 가지 테마는 그 설산에 가려진 죽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며, 카메라가 포착한 음영이란 그것을 보조하는 게 된다. 하지만 이 빛과 어둠이라는 정반대의 단어가 일종의 갈림길에 해당한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쉽게 말해 빛과 어둠은 한 자리에 공존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와이 슌지 영화 대부분에서 인물들의 관계가 이리저리 뒤섞이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니까 사실 빛과 어둠이라는 칭호는 이와이 슌지에게 그리 잘 부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혹자는 빛과 어둠이라는 단어가 영화의 질감, 형상을 이루는 것뿐 아니겠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단순함으로 이와이 슌지를 설명하는 것은 이와이 슌지의 영화를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겐 '보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일 테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이와이 슌지(의 영화)에게 던질 물음은 정해진 듯하다. 왜 "빛과 어둠"인가?
 
 영화 <소년들은 쏘아올린 불꽃을 옆에서 보고 싶었다>의 한 장면

영화 <소년들은 쏘아올린 불꽃을 옆에서 보고 싶었다>의 한 장면 ⓒ 이와이 슌지

  
이와이 슌지의 영화를 보며 눈에 아른거리는 형상들을 어렴풋이 눈치채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조명에 따른 결과일 뿐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기만 할 뿐이었다. (일본의 그림자극처럼) 그리고 이번에 보게 된 <소년들은 쏘아올린 불꽃을 옆에서 보고 싶었다>를 보면서, 그동안 내가 잘못 생각해왔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 영화는 이와이 슌지가 본격적으로 영화를 찍게 된 계기인 단편 드라마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를 소재로 만든 다큐멘터리인데, 영화로부터 6년 뒤의 주인공들이 그때 그곳을 찾아가 본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사실 이 소재에는 '첫사랑 영화'의 주인공들이 자신들의 '첫사랑'과도 같은 영화를 찾아 떠난다는 이중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나의 6년 전이 그 영화에 있고, 카메라에 붙잡힌 시절이 아닌, 현실에 새겨진 흔적을 찾아가는 여행, 이때 그 여행이 유의미한 건 영화와는 다르게 세월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미끌미끌한 스크린 혹은 필름의 질감에는 그 어떤 풍파도 밋밋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반면 그 스크린을 일부러 사포질하여 거친 질감을 만들어낼 때, 그 영화는 마치 현실에 새겨진 흔적처럼 보이게 된다. 이때 그 거친 질감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감독마다 무척 다양하다. 양익준의 <똥파리>처럼 카메라의 몰이해성을 인물에게 대입하는 방식이 있다. 다르덴의 <로제타>처럼 영화 밖의 삶을 인물에게 대입하는 방식이 있다.

그런데 이와이 슌지는 거친 질감을 만드는 방식이 다르다. 아니, 결과가 다르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다른 감독들이 거친 질감을 위해 필름의 표면을 긁어낼 때, 그는 필름을 완전히 갈아버린다. 이때 그의 필름에 새겨진 거친 선들을 통해, 그 속에 침입하는 조명(빛)은 산란하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두고 '뿌연 색감'이라고 표현한다.

그 뿌연 색감은 분명 과다노출에 따른 결과이다. 과다노출이라 함은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라면 잘 알 것이다. 카메라 조리개에 빛이 과다하게 들어오면 그 결과로 필름이 하얗게 변해버리는데, 우리가 어두운 곳에 있다가 밝은 곳으로 나올 때 잠시 눈앞이 보이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요컨대 과다노출이라함은 넘치는 빛의 상징, 누군가에게는 과한 욕심이거나 혹은 서투름일 테고(<하나와 앨리스>), 혹은 밝은 세상으로 이제 막 나왔음을 묘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그러니까 이 과다노출은 세상의 어느 한 부분만을 표현하는 장치가 아니다. 이것은 양 갈래고, 나는 어쩌면 그 양 갈래가 이와이 슌지의 '빛과 어둠'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되었다.

다큐멘터리의 도입부에는 이 영화(본래는 드라마였음)를 촬영하게 된 계기와 부수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드라마 제작국인 후지 TV 담당자가 책상에 앉아 이와이 슌지를 이야기한다. 'if'라는 설정으로 만들어지는, 여러 감독에 의한 여러 '만약'이 이곳에 펼쳐져 있고, 그 중에 하나가 될 이와이 슌지의 시나리오는 다른 감독보다 워낙 독특했다고 한다.

담당자에 따르면 이와이 슌지는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다. 요리를 주제로 드라마를 찍어야 하는데 그것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프라이드 드래곤 피쉬> 같은 것을 가져와서 "찍고 싶어요"라고 말하는데, 그럼에도 이와이 슌지의 작품이 너무 좋은 나머지 담당자가 기획을 거절할 수 없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쏘아올린 불꽃>보다 살짝 뒤의 이야기, 그러나 <쏘아올린 불꽃>에서 담당자는 "제목만큼은 규칙을 지켜야 해요."라며 'if'를 붙일 것을 단호히 요구한다. 그래서 탄생한 게 이 작품이다.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
 
멀리까지 돌아왔지만, 이 작품을 말하는 다큐멘터리에서 이와이 슌지가 말하는 것은 정말로 '간단한' 원리였다. 그는 이 작품에서의 'if'가 A가 실패해서 B를 가정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쉽게 말해 이것은 이휘재의 < TV 인생극장 >이 아니다. 그는 이 이야기가 특정 분기점에서 A와 B로 나뉘는 이야기, 즉 그 모두가 삶의 일부라고 말한다. 평행우주라는 말은 이것을 잘 설명하는 단어일 테다.

하지만 그 개념을 설파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왜냐하면 영상(영화, 드라마) 매체라는 것은 선형적이어야 한다고 다들 말해왔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간단한 설명, 사진을 연속으로 재생한 것이 바로 영화이다. 다시 말해서 사진을 계속해서 적층하는 것이 영화이다.

그래서 이 시간은, 과거의 어느 순간을 현재의 지금과 접합하더라도 결국에는 선형적인 배치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와이 슌지는 이 작품을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 매체에 관한 생각은 아니었을 테고, 어느 한쪽의 가정(그리고 그곳에 담긴 삶)이 부정당한다는 사실에 슬퍼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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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부분이 이와이 슌지를 설명하는 단서가 되었다. 본인 스스로 밝힌 것이므로 딱히 추측도 아니다. 그의 영화에서 느껴지는 '빛과 어둠'이라는 게 질료의 문제가 아닌, 삶을 긍정함에서 온다는 점을 우리는 깨닫게 되었다. 이른바 양 갈래, 이분법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분법을 하나로 모으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그저 있는 그대로일 뿐이다.

A와 B라는 삶이 지금 이곳에 하나로 펼쳐져 있는 게 아니라, 그 두 가지 순간을 하나로 경험한다는 게 중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고 싶다. 3D 안경의 양쪽 면은 파란색과 빨간색인데, 그 두 가지는 안경을 통해 하나의 상으로 변환된다. 그리고 그 상은 '튀어나온다'.
영화 이와이 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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