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2019 AFC 아시안컵 조별리그 필리핀과의 첫 경기는 한국 대표팀 입장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졸전이었다. 한국은 81.8%라는 압도적인 볼 점유율을 선보이며 90분 동안 16개의 슈팅을 때렸지만 단 한 골을 넣는 데 그쳤다. 경고를 3장이나 받고 기성용(뉴캐슬)이 부상으로 교체된 것도 큰 악재였다. 후반 21분 이청용(VfL보훔)의 영리한 패스로 시작된 기회를 황의조(감바 오사카)가 깔끔하게 마무리하지 못했다면 한국은 필리핀에게 허무하게 승점을 헌납했을 지도 모른다.

양 팀의 객관적인 전력과 국제대회 성적을 고려할 때 필리핀이 한국전에서 '선수비, 후역습' 전략으로 나올 것임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은 한 수 아래의 필리핀을 상대로 좀처럼 공격의 실마리를 풀지 못했고 오히려 역습 과정에서 필리핀 선수들의 개인기에 당황하는 장면까지 연출했다. 물론 아직 선수들이 대회 분위기에 적응하며 몸을 만들어 가는 과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첫 경기에서의 부진은 분명 파울루 벤투 감독과 선수들이 반성하고 보완해야 한다.

그렇다고 필리핀전에서 모든 선수들이 무기력한 경기를 펼친 것은 아니다. 벤투호의 원톱 스트라이커로 자리를 굳히고 있는 황의조는 여러 차례 기회를 엿보며 필리핀 문전을 위협하다가 천금 같은 결승골을 기록했다. 왼쪽 윙포워드로 나선 황희찬(함부르크SV) 역시 경기 내내 저돌적인 돌파와 활발한 움직임으로 결승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어쩌면 아시안컵에 가장 어울리는 유형의 선수는 '탈아시아급 터프함'을 자랑하는 황희찬일지도 모른다.

잘츠부르크를 유로파리그 4강으로 이끈 한국산 젊은 황소
 
 7일 오후(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알 막툼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9 AFC 아시안컵 UAE 조별 라운드 C조 1차전에서 필리핀 수비수가 황희찬의 슛을 몸으로 막아내고 있다. 2019.1.7

7일 오후(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알 막툼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9 AFC 아시안컵 UAE 조별 라운드 C조 1차전에서 필리핀 수비수가 황희찬의 슛을 몸으로 막아내고 있다. 2019.1.7 ⓒ 연합뉴스

 
신곡초등학교 시절부터 각종 대회에서 득점왕을 휩쓸며 일찌감치 재능을 인정 받은 황희찬은 호주에서 열린 킹카컵 세계 유소년 축구대회에서 22골을 넣으며 득점왕을 차지했다. 황희찬은 이런 활약을 바탕으로 2009년 제21회 차범근 축구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했다(현 국가대표 코치 최태욱과 러시아 월드컵 대표팀 주장 기성용도 차범근 축구상 대상 출신이다. 박지성은 5회 장려상, 이승우는 23회 우수상을 받았다).

포항 스틸러스의 유소년팀 포철 중학교에 진학한 황희찬은 3학년이 되던 2011년 각종 전국대회에서 포철중의 우승을 이끌었고 연말에는 대한축구협회 시상식에서 중등부 MVP에 선정됐다. 황희찬은 포철고 진학 후에도 2학년 때부터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3학년 때는 4개 대회에서 포철고의 우승을 이끌며 최고의 유망주로 떠올랐다. K리그 포항 스틸러스 팬들은 이동국(전북현대) 이후 가장 재능이 뛰어난 유망주의 입단을 앞두고 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황희찬은 오스트리아의 FC 레드불 잘츠부르크의 입단 제의를 받았고 적지 않은 논란에 휩싸이면서도 잘츠부르크와 계약했다. 그 과정에서 포항 스틸러스 측과 갈등을 빚긴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유럽 진출에 성공한 황희찬은 2015-2016 시즌까지 2부 리그팀 FC 리퍼링에서 경험을 쌓다가 2016-2017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1군에서 활약했다. 황희찬은 2016-2017 시즌 35경기에 출전해 16골 2도움을 기록하며 잘츠부르크의 리그 및 오스트리아컵 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황희찬은 2017-2018 시즌에도 37경기에 출전해 13골 4도움을 기록하며 전 시즌의 활약이 우연이 아님을 증명했다. 황희찬은 유로파리그에서도 예선을 포함해 10경기에서 3골 2도움을 기록하며 큰 무대에서도 변함없는 활약을 이어갔다. 특히 유로파리그 8강전에서는 이탈리아 세리에A의 상위권팀 SS라치오를 상대로 골을 터트리며 유럽 축구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오스트리아 리그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황희찬은 작년 8월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참가 도중 독일 분데스리가의 함부르크로 임대가 확정됐다. 잘츠부르크는 황희찬의 이적을 두고 분데스리가의 여러 구단은 물론,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레알 소시에다드와도 협상을 벌였다고 한다. 하지만 잘츠부르크 구단이 황희찬의 몸값으로 1500만 유로(한화 약 200억 원)의 높은 이적료를 요구해 협상 결렬된 것으로 알려졌다.

필리핀의 수비를 흔든 황희찬의 저돌적인 돌파와 넘치는 파워
 
아시안컵 각오 밝히는 황희찬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축구대표팀 황희찬이 30일 오전(현지시간) 숙소인 웨스틴 아부다비 골프 클럽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아시안컵 출전 각오를 밝히고 있다.

▲ 아시안컵 각오 밝히는 황희찬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축구대표팀 황희찬이 30일 오전(현지시간) 숙소인 웨스틴 아부다비 골프 클럽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아시안컵 출전 각오를 밝히고 있다. ⓒ 연합뉴스

 
황희찬은 177cm 77kg으로 아주 좋은 신체조건의 선수는 아니다. 그러나 빠른 스피드와 거친 몸싸움도 두려워하지 않는 파워를 갖추고 있다. 2017-2018 시즌 유로파리그에서 유럽 빅리그 수비수들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고 터프하게 공격을 펼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주력은 빨라도 파워가 떨어져 체격이 좋은 팀들과의 경기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던 선수들과는 차별화된 황희찬만의 특화된 장점이다.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경험 부족을 드러내며 기대 만큼의 활약을 하지 못한 황희찬은 아시안게임을 통해 '황소'의 진면목을 드러냈다. 물론 조별리그에서는 '사포 논란' 등으로 축구 팬들에게 좋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했지만 8강전 결승골, 결승전 쐐기골로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줬다. 특히 일본과의 결승전 연장 전반 10분에는 마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유벤투스FC)를 연상시키는 놀라운 수직 점프로 멋진 헤더골을 성공시켰다. 

기본적으로 원톱을 세우는 4-2-3-1 전술을 사용하는 벤투호에서 황희찬은 윙포워드로 활약한다. 하지만 대표팀의 윙포워드 자리엔 황희찬 외에도 손흥민(토트넘 핫스퍼), 이청용, 이재성(홀슈타인 킬) 같은 스타 선수들이 즐비하다. 나상호(광주FC)의 대체 선수로 벤투호에 합류한 이승우(엘라스 베로나) 역시 윙포워드로 충분히 활약할 수 있는 자원이다. 윙포워드 자리에 유럽파들이 대거 몰려 있어 황희찬으로서도 결코 주전 경쟁이 쉽지 않다.

하지만 황희찬은 필리핀전을 통해 벤투 감독과 축구 팬들에게 자신이 왜 아시안컵에서 필요한 선수인지 증명했다. 스페인 대표팀의 티키타카를 따라 하려는 듯 짧은 패스를 지나치게 많이 구사하다가 번번이 공격이 막혔던 한국에서 황희찬은 특유의 저돌적인 돌파로 필리핀 수비진을 흔들었다. 선취점 장면에서도 황희찬은 측면을 파고드는 기습적인 돌파와 문전 앞 비어 있는 황의조를 발견하고 빠른 박자에 올린 크로스를 통해 결승골을 어시스트했다.

황희찬은 다소 거칠고 투박하지만 대표팀 내에서 힘과 스피드로 상대를 위협할 수 있는 흔치 않은 유형의 선수다. 90년대를 호령했던 '적토마' 고정운이나 2000년대의 '차미네이터' 차두리처럼 황희찬 역시 아시아레벨에서는 충분히 파워와 스피드를 겸비한 선수로 활약할 수 있다. 벤투 감독이 이번 아시안컵에서 황희찬이 가진 장점을 극대화해 59년 만의 아시안컵 우승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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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2019 아시안컵 벤투호 황희찬 함부르크S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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