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생 후르츠> 포스터.

영화 <인생 후르츠> 포스터. ⓒ (주)엣나인필름

 
"늙은이들 나오는 영화 뭐가 볼 거 있다고?"

며칠 전, 내가 엄마에게 <인생 후르츠>를 보러 가겠냐며 대략의 설명을 했더니 엄마가 한 말이다. 허긴, 액션 영화를 좋아하는 우리 엄마에게 잔잔하다 못해 하품이 나올 지도 모를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라니. 물은 내가 바보구나 싶었다.

그리고 다음 날, 나 혼자 얼른 후닥닥 보고 와야지 하고 나가려는데 엄마가 어딜 가냐고 묻는다. 노인들 나오는 영화를 보러 간다고 하자 심심하셨던지 당신도 보시겠다고 하며 옷을 챙기신다. '설마 주무시는 건 아니겠지' 하는 우려와 함께 영화관으로 향했다.

영화가 시작되고 한 10분쯤 지났을까.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어디선가 낮게 드르렁 소리가 나서 주위를 보니 범인은 엄마였다. 하지만 딱 그때뿐. 가끔 곁눈질로 보니 끝까지 집중해서 보신다. 그냥 참고 보신 거 아닌가 싶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 엄마는 한참 동안 영화에 대한 수다를 떨었다. '나이 들수록 몸을 많이 움직이는 것이 좋다', '귀찮더라도 어느 정도는 좋은 재료로 반찬을 해 먹어야 한다' 등. 그리고 엄마는 깔끔하게 마무리 평을 했다.

"내가 요즘 봤던 영화 중에 최고로 좋다."
 
 영화 <인생 후르츠> 스틸 컷.

영화 <인생 후르츠> 스틸 컷. ⓒ (주)엣나인필름

 
영화 <인생 후르츠>는 90세 할아버지 슈이치 씨와 87세 할머니 히데코 씨의 특별하지 않은 듯 특별한 이야기다. 1970년 고조지 뉴타운 지역에 자리를 잡은 두 사람은 300평의 땅을 매입해서 집을 짓고, 개발로 밀어버린 산을 다시 되돌리기 위한 테마에 집중한다. 작은 숲을 가꾸어서 새롭고 푸른 저장소를 만드는 것인데, 이는 언뜻 보면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부부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런 일을 감당한다면 언젠가는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50년 동안 그곳에 머무르며 이를 실천한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음 세대에게 남겨 줄 것은 돈이 아니라 무엇이든 키울 수 있는 좋은 흙이라는 신념 때문. 부부는 집에서 직접 과일과 채소를 가꾸며 이웃과 나눌 뿐만 아니라, 새들을 위한 옹달샘도 만들고 마을 주민들과 함께 숲을 가꾼다. 실제 민둥산이었던 산은 현재 도토리나무로 무성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혼자 남은 할머니 히데코의 일상은 쓸쓸해진다. 그러나 이내 주어진 혼자의 생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을 꾸준히 한다. 수확한 작물들을 박스에 공평하게 나눠서 이웃들에게 나눠주는 소소한 일상은 멈추지 않는다.
 
 영화 <인생 후르츠> 스틸 컷.

영화 <인생 후르츠> 스틸 컷. ⓒ (주)엣나인필름

 
영화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히데코 씨에게 손님이 찾아온다. 생전의 슈이치 씨가 죽기 2개월 전에 찾아온 정신과 병원의 직원들이었다. 환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건축에 대한 조언을 구하자, 슈이치 씨는 이틀 만에 설계도를 완성해 건네며 이런 메모를 남겼다. "저도 이제 인생 90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좋은 일을 만나게 되었네요." 그러면서 사례금이나 설계료를 모두 사양한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이디어대로 완공된 병원에 히데코 씨가 방문한다. 새로 지어진 병원 건물은 햇빛과 나무들의 온기로 가득했다.

"옛날 어느 건축가가 말했다. 오래 살수록 인생은 아름다워진다." - 영화 <인생 후르츠> 중에서
 
지루하다 싶을 만한 노인의 일상이다. 하지만 밋밋하고 여백이 넘쳐 나는 일상 속에 수많은 질문이 숨어 있고, 그 질문이 던지는 공명은 크다. '나는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거실에 있는 탁상용 달력은 엄마의 다이어리다. 특별한 일이라고는 1도 없는 78세 할머니의 심심한 일상과 단순한 동선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그런데 어느 날 눈에 띄는 일정이 생겼다. 엄마에게 (믿거나 말거나) 좋은 일을 예고하는 군자난의 낙화소식이다.

'꽃잎이 지기 시작한 날, 꽃잎 다 떨어지고 두 송이 남은 날.' 엄마는 그날들을 왜 적으셨을까. 달력을 보며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봤다. 작은 생명의 활동에 관심을 갖는 소녀 감성이 귀엽기도 하고, 엄마의 심심한 일상이 느껴져 미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엄마의 심심한 삶은 내 삶보다 훨씬 빛나고 유쾌하다.

엄마는 내가 이제 돌보기 힘드니 버리라고 하는 화분들을 꾸준히 키우고 계신다. 물을 줄 때마다 "너희가 날 행복하게 해줘", "잘 자라줘서 고마워"라고 말 거는 걸 잊지 않는다.

엄마는 어디를 가시든 2-3명의 친구를 꼭 만든다. 그리고 음식을 종종 만들어 나누신다. 무더웠던 지난 여름의 주 메뉴는 동치미였다. 누군가 입맛이 없다고 하면 무를 사와서 뚝딱 만들어 갖다 주신다. 그러다 병 난다고 타박하니까 내 눈치를 보면서도, 누군가 엄마의 동치미를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이면 나 몰래 만들어 주시곤 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된장이나 오이 장아찌 같은 것으로 되돌아온다. 아래층에 사는 아주머니는 종종 과일이 든 비닐봉지를 우리집 현관 문에 걸어두고 가시기도 한다. 엄마는 가끔씩 경비 아저씨들에게 추어탕 같은 걸 포장해서 사다 드리기도 하고, 1년 동안 금색 돼지 저금통에 동전을 모았다가 이맘때쯤 불우이웃성금을 내는 일도 15년 넘게 하고 계신다.

언뜻 보기에 낙이 없어 보이는 일상이지만, 엄마는 엄마의 일을 꾸준하고 유쾌하게 하고 계신 것이다. 가끔 그런 엄마를 보며 생각한다. 내 노년의 모습도 엄마와 같았으면 좋겠다고.
  
 영화 <인생 후르츠> 스틸 컷.

영화 <인생 후르츠> 스틸 컷. ⓒ (주)엣나인필름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떨어진다.
나뭇잎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열린다.
꾸준히 그리고 천천히." - 영화 <인생 후르츠> 중에서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조급해 하고, 쓸모 있는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해 촘촘하게 살아온 삶이 고단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 내던지고 부처처럼 살 수만은 없다고 변명하면서도, 또 그렇다고 50이 내일모레인 마당에 다시 성능 빵빵한 엔진을 장착해 파이팅 넘치게 뛸 수 있는 나이도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라는 질문에 머리가 아팠는데, 이제 내 질문도 달라져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나는 앞으로 무엇을 꾸준히 나누며 살 것인가.'
첨부파일 엄마달력.jpg
인생후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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