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교향곡 1번 C장조 Op.21 
지휘 크리스티안 틸레만   
연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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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Beethoven Symphony 1 Thielemann을 검색하세요. - 기자 말

 
베토벤은 음악을 전통의 틀에서 해방시켰다. 클래식 음악의 금자탑인 그의 교향곡에는 운명과의 투쟁, 프로메테우스 예찬, 자연에 대한 감사, 신성한 도취, 평화와 형제애 등 이전의 교향곡이 상상할 수 없던 인간 정신의 도약이 담겨 있다. 베토벤은 교향곡의 역사를 바꿔 놓았다. 그의 아홉 교향곡은 슈베르트, 브루크너,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말러, 쇼스타코비치 등 낭만시대 이후의 모든 교향곡에 영향을 미쳤다. 

3번 <에로이카>, 5번 <운명>, 6번 <전원>, 9번 <환희의 송가>처럼 제목이 붙은 곡들은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지만 나머지 곡들은 비교적 생소할 것이다. 그러나 제목이 없다고 해서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다. 서른두 곡의 피아노소나타와 함께 베토벤의 영혼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아홉 교향곡, 그중 첫 곡은 어떤 작품일까? 

이십 대 베토벤, 젊은 천재의 자화상

음악평론가 조지 그로브의 말을 들어보자.

"만약 베토벤이 교향곡을 이 곡 하나만 남기고 죽었다면 후세의 평가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 작품은 좀 더 음미되고, 평가되고, 사랑받았을 것이다."

베토벤의 교향곡이 이 곡 하나뿐이라고 상상해 보자. 그는 만 서른 살을 앞둔 1800년 초에 이 곡을 완성했다. 열 곡의 피아노소나타, 두 곡의 피아노협주곡, 여섯 곡의 현악사중주곡을 쓴 뒤였다. 영국의 평론가 에드윈 에반스는 "이 곡에서 베토벤은 동시대 작곡가들보다 너무 앞서가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고 말했다.

혼자 연주하는 소나타는 큰 부담 없이 자유롭게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었다. <비창>, <월광> 소나타에서 볼 수 있는 대담한 형식 실험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십 명의 음악가가 함께 연주하는 교향곡은 '여럿이 함께' 가야 하기에 반걸음만 앞서 가야 했다. 베토벤은 교향곡이란 장르에서 비교적 신중하게 첫걸음을 내디딘 셈이다.

이 C장조 교향곡에서 베토벤은 선배 작곡가인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물려준 형식의 틀을 존중했다. 다만, 곡 전체에 흘러넘치는 생기와 에너지는 분명 베토벤의 것이었다. 이 곡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주제가 상승한다는 점이다. 음악은 심장에서 나온다. 젊고 뜨거운 심장은 필연적으로 훨훨 날아오르는 선율을 낳는다.

이 곡은 혈기 넘치고 의욕으로 충만한 젊은 베토벤의 모습이다. 선배들의 작품을 공부하며 자기 세계를 구축해 가는 이십 대 베토벤의 총결산으로, 알을 깨고 나오며 의욕을 불사르는 젊은 천재의 자화상이다. 베를리오즈의 말이다.

"이 곡은 베토벤답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머잖아 그를 발견하게 될 거라는 예감을 받는다."

선배 모차르트에게 오마주를 표하다 

1악장 첫 주제가 모차르트의 <주피터> 교향곡을 닮았고, 2악장 첫 주제가 모차르트 교향곡 40번 G단조와 비슷하다. 멜로디 형태는 비슷하지만 느낌이 완전히 다르므로 표절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베토벤이 20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곡에서 선배 모차르트에게 오마주를 표하려 했을 가능성은 있다. 베토벤은 이 곡을 빈 황실 도서관장인 반 슈비텐 남작에게 헌정했다.

그는 모차르트에게 바흐와 헨델의 악보를 빌려주고 1789년 모차르트의 예약 연주회가 흥행에 실패해서 취소됐을 때 유일하게 표를 구입하고, 모차르트가 죽은 뒤 장례를 맡아서 치러 준 사람이었다. 베토벤이 이렇게 모차르트와 각별한 인연을 맺은 사람에게 곡을 헌정하면서 모차르트 오마주를 표현하고 싶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법도 하다. 

1악장은 뭔가 질문하면서 모색하는 듯한 느린 연주로 시작한다. 명암과 강약을 대비시키며 곡의 중심을 찾아가는 느낌이다. 활기찬 알레그로 콘 브리오(allegro con brio, 씩씩하고 빠르게)는 젊은 베토벤의 씩씩한 얼굴을 보는 듯 무척 즐겁다. 2악장 안단테 칸타빌레 콘 모토(Andantecantabile con moto, 노래하며 걸어가듯 평온하게)는 목가적인 선율이 평화롭게 흐른다. 플루트와 바이올린이 함께 노래하는 음색이 매혹적이고, 팀파니가 나지막이 울리는 끝부분이 인상적이다.

3악장은 '미뉴에트(minuet)'라고 표기돼 있지만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우아한 미뉴에트와 달리 매우 빠르게 달려가는 스케르초다. 베토벤은 궁정 시대의 춤곡인 메뉴엣 대신 시민민주주의 시대에 어울리는 자유분방한 스케르초를 이미 선택한 셈이다. 4악장은 짧은 서주(序奏)에 이어 단숨에 한 옥타브를 상승하는 역동적인 주제로 넘어간다.

교향곡 1번은 1800년 4월 2일 빈의 부르크테아터에서 초연됐다. 베토벤은 C장조 피아노협주곡을 연주한 뒤 능숙한 즉흥연주를 선보였고, 이어서 이 교향곡을 지휘했다. 당시 언론은 "베토벤이 부르크테아터를 혼자 지배하고 있었다", "무척 발전된 기법을 선보였고 신선한 아이디어가 넘쳤다. 다만 관악기가 너무 많이 사용되어 오케스트라다운 앙상블이라기보다 군악대의 음악처럼 들린 게 작은 흠이었다"라고 전했다.

1악장 끝부분, 당당하게 상승하는 트럼펫과 호른이 목관의 화음과 어우러지는 대목이 '군악대 음악'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줬을 수 있겠지만, 말러의 교향곡을 체험한 오늘날의 청중에겐 그저 '젊음의 약동'으로 들릴 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이채훈님은 클래식칼럼니스트,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입니다. 이 글은 <참여사회>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베토벤 틸레만 빈필하모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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