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의 허리선을 가로지르는 추석연휴가 왔다. 지난 19일엔 영화 <안시성> <명당> 그리고 <협상>이 같은 날 개봉하며 추석 극장가 대전을 미리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 대작들에서 느껴지는 '남성 주인공 중심 서사'라는 묘한 동질성에 피로감을 느낀다면, 다른 선택지에도 기웃거려볼 수 있다. 가족 모두와 집에서도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다종다양한 여성 캐릭터 영화를 소개한다.

부끄럽지만 풋풋한... 하이틴 무비로 추억 소환
 
 넷플릭스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의 한 장면.

넷플릭스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의 한 장면. ⓒ 넷플릭스

 
매년 자체 콘텐츠 제작에 조 단위 예산을 쏟아붓는 넷플릭스의 신작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는 8월 공개된 이후 좋은 평을 받고 있는 영화다. 가장 눈길을 끄는 점은 캐스팅으로, 베트남계 미국 배우 라나 콘도르가 타이틀 롤을 맡아 개성 넘치는 고교생 캐릭터를 완성했다. 좋아했던 남자들에게 몰래 쓴 연애편지가 전달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담은 이 작품은 아주 새로운 플롯을 자랑하진 않지만, 원톱 여성 주인공의 비중이 크고 인종적 다양성이 고려된 서사라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한국-미국 혼혈 가정으로 등장하는 주인공 가족의 일상에서 깨알 같은 한국 문화의 흔적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그레타 거윅의 첫 장편 연출작 <레이디 버드>(2018) 한 장면

영화 <레이디 버드>의 한 장면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배우 겸 감독인 그레타 거윅에게 아카데미 감독상 지명을 안긴 그의 첫 연출작 <레이디 버드> 역시 국내에서 지난 4월 개봉해 호평 받은 바 있다. 캘리포니아 새크레멘토에 사는 고등학생 '레이디 버드'가 학교와 종교와 엄마와 세상과 갈등하는 천방지축 일상을 유쾌하게 풀어낸 수작이다. 딸과 엄마의 형용불가능한 관계성을 집요하고도 따뜻하게 탐구하며 엄마와 딸들에게는 더 큰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비슷하지만 또 달리 달콤한 하이틴 영화로는 지난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공개된 <지랄발광 17세>가 있다. 모든 것에 불만투성이인 열일곱 소녀가 학교와 가족과 호흡하며 세상과 화해해나가는 과정을 산뜻하게 그린 틴에이지 무비이다.

땀과 열정에 흠뻑, 여성 스포츠 서사  
 
 인도영화 <당갈> 포스터

인도영화 <당갈> 포스터 ⓒ NEW


발리우드 영화 <당갈>은 '여성'과 '레슬링'이라는 인도영화의 소재로서는 흔치않은 결합으로 사상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다. 전직 레슬링 선수인 아버지에게서 자란 두 딸 '기타'와 '바비타'가 국가대표 레슬러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여성 억압적인 인도 사회를 유쾌한 화법으로 폭로한다. 주인공들은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을 대리하는 객체됨을 넘어서 스포츠인으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모든 여자들의 승리"를 향해 나아간다. 역동적인 촬영과 감각적인 편집으로 약 세 시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에도 지치지않고 볼 수 있는 오락영화이다.

발리우드에서 할리우드로 넘어오면 마고 로비 주연의 <아이, 토냐>, 그리고 엠마 스톤 주연의 <빌리진 킹: 세기의 대결>이 기다리고 있다. 두 작품 모두 미국 스포츠 스타의 실화를 극화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국내에서 '할리퀸'으로 유명한 마고 로비는 이 작품으로 생에 첫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됐는데, 여성 피겨스케이터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날카롭게 베어낸 자리에 토냐 하딩이라는 미움 받거나 악마적인 새로운 여성 캐릭터를 창조해냈다는 점에서 찬사를 받았다. 엠마 스톤은 스포츠계 성차별에 항의하여 남자 윔블던 챔피언과 빅매치를 벌인 70년대 테니스 스타 빌리진 킹을 연기해 강력한 힘을 가진 페미니즘 서사의 탄생에 힘을 보탰다.

한 여성의 삶이 온통 내게로... 웰메이드 전기 영화
 
 영화 <밤쉘>의 한 장면.

영화 <밤쉘>의 한 장면. ⓒ (주)영화사 그램

 
극영화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여성 인물들의 삶을 재현해내는 다큐멘터리는 색다른 선택지가 될 것이다. 지난 6월 개봉한 영화 <밤쉘>은 할리우드 아름다움의 아이콘으로만 기억되어온 배우 '헤디 라머'가 사실은 천재 과학자였다는 사실을 집중 조명한 작품이다. 그는 블루투스와 와이파이의 발명에 토대가 되는 기술을 만들었으나, 언론과 대중은 '예쁜 여성'의 이미지에서 발명가로서의 성취를 소거하며 그녀의 삶에 대한 몰이해를 낳았음을 영화는 지적한다. 과학기술의 역사에서 여성들이 어떤 방식으로 지워져왔는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지난 2012년 사망한 가수 휘트니 휴스턴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휘트니>는 그가 흑인 여성으로서 미국 대중문화에 한 획을 긋기까지의 모든 여정을 따라간다. 어린 나이에 천상의 목소리와 함께 등장한 순간부터, 여성 솔로 가수로는 최고의 성적으로 빌보드를 재패하고, 슈퍼볼 매치에서 가스펠 리듬으로 국가를 편곡해 불러 미국 흑인 사회에 엄청난 감동을 주었던 사건까지. 영화는 휘트니의 밝고 어두운 모든 순간을 쫓으며 그의 모든 목소리를 기록한다. 휘트니의 전성기와 함께 자랐을 나이대의 관객들은 짜릿한 울림을 경험할 것이다.

우리 영화에도 약동하는 여성서사 있어
 
 영화 <마녀> 관련 사진.

영화 <마녀>의 한 장면.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이처럼 국내 개봉한 외화들에서는 장르를 불문하고 특색 있는 여성 캐릭터 서사를 얼마든지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국내 상업영화에서는 여성이 주연이거나 여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서사가 흘러가는 작품이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올 상반기 개봉한 상업영화 중에서는 <리틀 포레스트>와 <마녀>가 거의 유일한데, 각각 150만-300만 관객을 동원하며 두 작품 모두 손익분기점을 훌쩍 넘긴 바 있다.

보다 다양한 도전이 벌어지는 독립·예술영화계에선 희망이 보인다. 7월 개봉해 롱런하고 있는 영화 <박화영>, 여성 청소년 캐릭터가 타이틀 롤을 맡은 <어른도감>, 무서운 연기력의 신예 배우 전여빈을 배출한 영화 <죄 많은 소녀>까지. 이 작품들은 오는 추석 연휴에도 각종 독립·예술영화관에서 상영하니, 이번엔 멀티플렉스를 잠시 떠나 작은 영화관에서 팔딱팔딱 숨 쉬는 여성 캐릭터들을 만나볼 수 있겠다!
추석 추석 영화 여성 영화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