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느 가족> 포스터.

영화 <어느 가족> 포스터. ⓒ 티캐스트


영화 감독 누구 좋아하냐고 물을 때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 만한 감독이라는 인정과 함께, 내가 그 감독을 좋아할 거라는 예상의 적중이 내포된 끄덕임이다. 고레에다의 영화들은 일상적이고 일관적이고 안정적이고 파격적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1995년 <환상의 빛>으로 장편영화 연출에 데뷔하면서부터 세계 유수 영화제가 가장 사랑하는 감독 중 하나가 되었다. 그중에 눈에 띄는 건 단연 칸영화제로, <DISTANCE> <아무도 모른다>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황금종려상 후보에 올랐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로 심사위원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대망의 2018년 <어느 가족>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좀도둑 가족의 기이한 이야기

 영화 <어느 가족>의 한 장면. 오사무(릴리 프랭키)와 쇼타(죠 카이리)가 물건을 훔치기 직전이다.

영화 <어느 가족>의 한 장면. ⓒ 티캐스트


영화 <어느 가족>은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지만 가족 영화다. 그런데 어디에서나 흔히 볼 만한 그런 '어느' 가족의 이야기는 아니고, 일본 원작 영화의 제목인 '만비키(좀도둑) 가족'에서 알 수 있듯 좀도둑질을 하며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다.

아빠 오사무와 아들 쇼타는 많이 해본 듯한 익숙한 솜씨로 가게를 털고 집으로 향한다. 골목 끝에 자리 잡은 작디 잡은 집에서 할머니 하츠에, 엄마 노부요, 큰딸 아키가 그들을 당연한듯 반긴다. 집으로 오는 길에 밖에 혼자 있는 여자 아이가 측은해보여 데리고 온다. 유리라고 하는 그애를 금방 데려다 주려고 했지만, 집에서 부모들이 싸우며 유리를 낳지 않으려 했다고 소리치는 말을 듣고는 다시 집으로 데리고 온다.

이 집의 모든 이들이, 즉 가족들 모두가 유리를 반기지만 그들은 이 행동이 엄연한 유괴라는 걸 인지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한편 이 집이 오사무와 쇼타의 좀도둑질로만 연명되진 않는다. 오사무는 일용노동직으로 일하고, 노부요는 세탁공장에서 일하고, 아키는 유흥업소에서 일한다. 그리고 하츠에는 전 남편으로부터 꼬박꼬박 받는 연금으로 이 집이 연명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알고 보니, 구성원 중 혈연으로 이어진 이는 단 한 명도 없는 이 가족, 연금과 좀도둑질로 연명해야 할 운명인 이 가족. 면면과 외양은 단죄해야 마땅한 측면이 다분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순간순간 진심으로 대하는 모습은 이 좀도둑 가족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럼에도 아슬아슬한 이 가족이 어떻게 될지 궁금한 한편, 가슴 졸이며 바라보게 된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영화 <어느 가족>의 한 장면.

영화 <어느 가족>의 한 장면. ⓒ 티캐스트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어느 가족>을 통해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여과없이 진지하게 던진다. 물론, 나름의 확고한 답을 갖고서 말이다. 그의 '가족'에 대한 물음은 2008년 영화 <걸어도 걸어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이후 10년 동안 꾸준히 천착해왔다. 그렇게 얻은 답은 '선택하는 가족'이라는 한 마디로 축약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일본은 어떤가. 살 만 한가. 1990년부터 잃어버린 10년을 지나 이제는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부른다. 결국 일본은 일명 '아베노믹스'라 부르는 경기부양책을 꺼내 들었다. 무너져가던 기업들은 되살렸다고 하지만 가족은 완전히 해체됐다. 이들은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 것인가.

고레에다는 그동안 가족을 말하면서 안으로 안으로 천착해왔다. 가족의 안팎을 함께 구성하는 것들과의 연계를 함께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가족에 대해서 말이다. <어느 가족>에 이르러 밖으로 확대하려 한다. 그래서 우린 이 영화에서 이미 무너지고 해체되어버린 가족, 그 이후의 이야기를 본다. 들여다보면 '돈' 때문이었다. '진짜' 가족에게 버려진 이들의 연대가 이 좀도둑 가족의 실체다.

'혈연은 천륜이다'라는 가족의 전통적 정의는 이 영화의 이 가족들에게는 통용되지 않는다. 이들은 비록 서로 간의 필요로 뭉쳤다. 불쌍해서 데려온 유리조차도 '워킹쉐어'라는 이름으로 쇼타에게 좀도둑질을 배운다. 그럼에도 우린 고레에다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고 또 답을 내놓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가족인가? 이런 기이하기 짝이 없는 모습의 공동체를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국가와 사회가 해야 할 역할을 대신 한다는 이유로 이 가족의 '나쁜 짓'을 정당화 할 수 있을까. 반대로 '진짜' 가족에게 버려진 이들이 모여 진짜 가족이 주지 못한 관심과 사랑, 그 이상을 준다면 가족이 아니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버려진 이들을 지킬 이 누구인가

 영화 <어느 가족>의 한 장면.

영화 <어느 가족>의 한 장면. ⓒ 티캐스트


이 가족은 진짜 가족에게서 버려진 이들이다. 하지만 그리고 이들은 국가와 사회와 기업으로부터 버려지기도 했다. 마이너스 성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달리는 일본에게 이 가족을 보살필 여력은 없다. 이 가족이 직면한 건, 경제적 어려움뿐만 아니다. 자신들을 외양으로만 판단하며 내면과 진실에 대해선 들여다보고 알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하는 데서 오는 합리적 차별이다.

우린 여기서 또 한 번 딜레마에 직면한다. 이 기이한 가족를 정의할 때 느꼈던 딜레마를 말이다. 이들은 유리를 '유괴'한 걸, 부모가 버린 이를 주워왔다고 표현한다. 유추해보면, 유리와 달리 쇼타는 부모가 '유기'한 걸 오사무와 노부요가 주워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은 두 가지 경우를 동일선상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이들이 쇼타를 데려오지 않았다면 추운 거리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유리 역시 이 가족이 데려오지 않았다면 부모의 계속된 폭력 밑에서 제대로 성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영화적인 설정 내에서는, 데려오는 게 인간적으로 올바른 처사가 아니었을까. 어느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어느 누가 이 가족에게 '진짜 가족'을 운운할 수 있을까.

소박한 웃음과 현실적인 막막함이 동시다발적으로 덮치는 영화 <어느 가족>은 '가족'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일본'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주제를 확대해 나간다.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만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하는 것들이다. 이 영화는 그 답을 내릴 때까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답을 내리고 나서도 우리 마음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형욱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singenv.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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