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영화사에서 특히 여성 영화사에서 아녜스 바르다가 차지하는 위상은 독보적이다. 1960년대 초 프랑스에서 일어난 영화운동 누벨바그의 유일한 여성 감독으로 거론되는 아녜스 바르다는 1955년 발표한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 이후 제20회 서울여성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한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2017)까지 아흔이 넘은 고령에도 영화, 사진 등 다양한 예술 장르를 넘나 들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 5월 열린 제71회 칸영화제에서는 경쟁부문 심사위원을 맡았던 케이트 블란쳇, 크리스틴 스튜어트, 레아 세이두 등 총 82명의 여성영화인들과 함께 영화계 성평등을 요구하는 레드카펫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아녜스 바르다는 명실상부 현존하는 최고의 여성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올해 20회를 맞은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한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60년 이상 꾸준한 작품 활동을 지속해온 아녜스 바르다의 첫 협업작이자, 바르다의 세계관과 영화 스타일이 집약된 흥미로운 영화다.

여성 거장 감독 아녜스 바르다의 '첫 협업작'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2017) 한 장면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2017) 한 장면 ⓒ 영화사 진진


우연히 외벽에 흑백 사진을 붙이는 퍼포먼스로 유명해진 사진작가 JR을 알게된 바르다는 그와 함께 프랑스 곳곳을 다니며, 사람들의 얼굴을 카메라로 촬영하고 그들이 살고있는 건물 외벽에 사진을 붙이는 프로젝트를 실행한다. 노안으로 예전만큼 사물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바르다는 늘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JR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55살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톰과 제리를 보는 것 같은 티격태격 '케미'를 보여주는 바르다와 JR은 철거를 앞둔 폐광촌, 농촌, 공장, 항만부두 등을 찾아다니며 농부, 노동자, 옛 광부들의 얼굴을 카메라로 담는다.

늘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JR을 두고 바르다는 과거 자신의 단편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는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젊은 날 모습과 닮았다는 이야기를 한다. 고다르 또한 선글라스를 벗길 싫어했지만 자신을 위해서 기꺼이 벗어줬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다는 바르다의 투정에도 불구, JR은 언제나 선글라스 차림이다. 그가 늘 선글라스를 쓸 수밖에 없는 속사정은 후반부에 넌지시 알려지긴 하지만, 선글라스는 사진을 외벽 예술로 승화한 JR의 상징이자 그만의 독특한 개성이다.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 JR에게 늘 볼맨 소리를 늘어 놓기는 하지만, 바르다는 타인의 개성과 다름을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는 예술가이다. 일찍이 페미니즘 운동에 뛰어든 아녜스 바르다는 페미니즘(여성주의)의 시선으로 영화를 만들고 동료 여성 영화인들과 함께 작품 활동을 모색했다. 흔히 여성주의를 '여성 우월주의'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지만, 페미니즘은 여성에게만 국한된 담론을 넘어 남성중심적인 세계관에 문제를 제기하고 보다 평등한 세상을 지향하고자 한다.

바르다가 JR과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성장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체계에서 소외된 존재들이다. 이는 노동자, 농부들뿐만 아니라 목장에 살고 있는 동물들도 예외가 아니다. 염소 목장을 찾아간 바르다와 JR은 염소들끼리 싸움이 일어나 염소들이 어릴 때 일부로 뿔을 제거한다는 목장 주인의 이야기를 접한다.

하지만 바르다가 만난 또 다른 목장 주인은 뿔달린 염소들이 싸움이 일어나면 관리가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염소들의 뿔을 제거하지 않는다. 염소는 뿔이 있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진 목장 주인은 다른 목장과 달리 염소 젖을 짤 때 착유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생계를 위해서 염소를 키우지만, 자신들이 키우는 염소들이 염소 답게 살아줬으면 하는 목장 주인 내외의 뜻을 받들어 바르다와 JR은 뿔달린 염소의 사진을 찍어 외벽에 붙이는 것으로 화답한다.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2017) 한 장면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2017) 한 장면 ⓒ 영화사 진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슬로건에 부합하는 개막작

이외에도 바르다와 JR는 '강성노조'로 이따금씩 질타를 받는 항만 남성 노동자를 찾아가 그들의 든든한 조력자이자 지지자인 부인들의 사진을 그들이 운반하는 컨테이너에 붙인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와 독일군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노르망디 해변의 한 벙커에 수십 년 전 자신과 함께 작업했던 모델의 젊은 시절 사진을 붙이며 고인이 된 그를 추억한다. 노안과 기력 쇠퇴로 예전처럼 많은 곳을 다닐 수 없게 된 바르다는 그 아쉬움을 자신의 눈과 발을 찍은 사진을 프랑스 전역을 돌아다니는 화물 기차에 붙이면서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시도를 이어나가고자 한다.

유명하지 않아 잊혀져 간 사람들과 그들이 살았던 공간은 바르다와 JR이 찍은 사진과 외벽 전시를 통해 '토템'이 되고 바르다가 만들었던 영화 속 얼굴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거장들의 초상화 못지 않은 예술 작품으로 기억된다.

영화가 마무리를 향해 갈 때 쯤, 바르다는 JR과 함께 자신의 오랜 영화 동료이자 젊은 날 모습이 JR과 쏙 빼 닮았다는 장 뤽 고다르를 찾아나선다. 과연, 바르다와 JR는 지난 5월에 있던 제71회 칸영화제 명예 황금종려상 시상식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던 완전한 은둔자 고다르를 만나는 데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진이라는 공통분모로 만난 바르다와 JR의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콜라보레이션 과정을 다룬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오는 7일까지 열리는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기간 내 상영 이후, 14일 극장 개봉을 통해 관객들과 만난다.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본다'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슬로건에 부합하는 개막작이다.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2017) 포스터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2017) 포스터 ⓒ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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