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엔 작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노하나>는 '그날 그꽃'이라는 뜻으로,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라는 길고 긴 제목의 줄임말이다. 쓸데없이 길어 보이는 제목에 지레 기겁하지 마시길. 이 만화, 어딘가 모르게 사람 눈시울을 붉히는 잔재주가 있으니.

눈시울을 붉힌다는 점에서 신파를 떠올릴 사람이 있을 테다. 그 말이 맞다. 이것은 분명 신파다. 그러나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뻔한 이야기와 작위적인 연출이지만, 우리네 어딘가에서 마주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애써 지나치기 힘들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남들만큼' 살아가는 자신을 본다. 우리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남들만큼 원대하게 성공을 좇아야만 한다. 말하자면 흔해 빠진 삶, 하지만 눈물마저 흔해 빠져 버린. 그 속에 신파가 있고 눈물 모양의 정수가 있다.

노희경 작가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 한국식 신파의 정수라면, <아노하나>는 일본식 신파의 정수다. 둘 다 뻔한 내용이지만 그만큼 흔하기에, 우리가 살아가며 한 번쯤은 만나게 될 것만 같아 모른 체할 수 없게 된다. 작품성은 몰라도 눈물만큼은 후한 점수를 주고 싶어진다.

 애니메이션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의 작품 포스터

애니메이션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의 작품 포스터 ⓒ 애니플러스




<아노하나>, 극복에 관한 이야기

여기 사이 좋은 남녀 여섯 아이가 있다. 야도미 진타, 안죠 나루코, 마츠유키 아츠무, 히사카와 테츠도, 츠루미 치리코, 혼마 메이코. '초평화 버스터즈'라는 이름으로 뭉치던 아이들, 어느 날 '혼마 메이코'가 사고에 휘말려 죽고 만다. 그렇게 평화가 깨지고 시간이 와해된다. 시간이 흘러 5년 뒤, 주인공 '야도미 진타'의 눈앞에 죽은 친구가 나타난다. 귀신으로 나타난 이유는 소원을 들어 달라는 것. 그녀의 성불을 위해 '초평화 버스터즈'가 다시 모이게 된다.

<아노하나>는 국내 애니메이션 팬들 사이에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이지만, 보지 않은 이들도 적지 않은 듯하다. 신파에 대한 호불호가 명확한 탓이다. 눈물을 쥐어짠다는 느낌에 몸서리치는 사람이 있고, 아이들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반대로 말하면 아이들의 세계에 감정을 이입할 수 있다면 무척 재미있다.

먼저, 이 작품을 대략 흩어보면 '극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극복의 대상은 어렸을 적에 죽은 친구다. 그들은 가해자가 아니라 목격자임에도 인과의 틀에 갇혀 자신을 탓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만약… 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이 무언가 하지 않았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라 믿는다.

잊어야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잊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 정체되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망자를 잊는다면 매 순간 다가올 '공백'이 몹시 신경 쓰일 것이다. 결국 우리는 나름 합리적인 결론을 내리게 된다. 망자를 내버려두고 앞으로 나아가되, 가끔씩은 뒤돌아 보는 것이다. 망자가 점이 되어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그보다 좀 더 나아가면 아예 한 줌의 공기가 되겠지만 말이다. 그곳에 '있다'는 짐작만으로도 살아가는 게 사람이다.

 애니메이션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의 한 장면

애니메이션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의 한 장면 ⓒ 애니플러스


사람마다 극복의 방식은 다르다

살다 보면 사람 사는 게 모두 제각각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 마찬가지로, 작중인물들은 각자 망자를 추모하는 방법이 다르다.

주인공 야도미는 어려서 모든 방면에 우수했으나, 혼마의 죽음 이후 방황하다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방구석 폐인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야도미의 눈앞에 죽은 혼마가 나타난다. 그런데 야도미는 눈앞에 나타난 혼마를 의심하지 않는다. 이 경우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가장 그럴듯한 추측은 '평소 줄곧 생각해왔기 때문'일 테다. 죽은 사람을 향해 빌던 염원이 구체화하였으리라 믿는 것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사람들은 현실과 비현실을 헷갈려 하곤 한다. 어떤 때는 그런 헷갈림이 현실 문제의 돌파구가 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 혼마는 다른 사람의 눈엔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현실'처럼 보이지만 명백한 현실이다. 오직 야도미만이 혼마가 진짜임을 알 수 있고, 그것을 타인에게 알리려 부단히 노력한다.

이것을 '야도미의 자기 극복기'라고 부를 수 있다. 내면에 분명 있지만 인정하기 꺼려지는 존재란, 상처라는 이름으로도 불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은 친구를 성불하려 부단히 노력하는 야도미의 모습은, 내면의 상처를 구체화해 타인과 공유해나가는 과정이다. 죽은 친구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상처를 인정하는 것이고, 죽은 친구를 통해 옛 친구와 마주한다는 점에서 상처를 마주하는 것이다.

야도미가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입시에 실패했다면 히사카와는 아예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 대신 해외여행을 수십 곳 다녀왔다. 히사카와는 돈이 떨어지면 귀국해 다시 돈을 모으고는 빠르게 출국한다. 그건 마치 국내에 발 디디는 기간을 최소화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 말대로, 히사카와는 "죽은 친구에게 미안해서 몸 편안히 있을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어릴 적에 사건을 눈앞에서 목격했고 그로부터 벗어나려 세계 여러 곳을 떠돈다.

히사카와는 야도미와 정반대의 성향을 보여준다. 야도미가 과거로부터 도피해 내부로 틀어박힌다면 히사카와는 과거를 외면하고 외부로 떠나버린다.

그 성향에 관한 실마리가 작품 속에 있다. 히사카와는 야도미가 "죽은 친구가 보인다"며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아무런 의심 없이 믿어준다. 히사카와는 보이지도 않고 느낄 수도 없지만 허공에 대고 말을 걸어 보기도 한다. 이것은 히사카와가 야도미처럼 죽은 친구를 줄곧 생각해왔다는 점을 보여주나, 보이지도 않는데 보이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죽은 친구가 보인다는 건 상처를 인정한다는 것인데, 이 경우 히사카와는 상처를 인정하지 않은 채 상처를 치유하려 하는 역설적인 모습이 된다.

이것이 '혼마'가 야도미에게만 보이는 이유다. 작품 내내 혼마를 그리워하지만 보이지 않아 답답해하던 친구들은, 내면의 상처를 인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애니메이션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의 한 장면

애니메이션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의 한 장면 ⓒ 애니플러스


츠루미와 마츠유키는 우수 대학 진학률이 높은 고등학교의 엘리트로 성장한 만큼 합리주의에 매몰된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두 사람의 방향이 약간 다르다.

작중에서 츠루미는 "어차피 안 될 것이라면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라는 대사를 통해 가치관을 드러낸다. 그 말인즉슨, '아무리 그리워해도 망자가 살아나진 않으니 그만 잊고 일상으로 돌아가자'라는 것을 뜻한다. 마츠유키도 "죄책감을 해소하기 위해 자기만족에 불과한 연극을 하는 건 아니냐"는 대사를 통해 가치관을 드러낸다. 츠루미와 마찬가지로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쪽이다. 그렇지만 반대로, 생전 망자가 즐겨 입던 복장을 동일하게 입음으로써 '자기 살해'의 욕구를 드러낸다. 이것이 자기 살해인 이유는, 망자의 죽음을 막지 못한 '자신'에게 '망자'를 덮어씌움으로써 '죽음을 대신'하려는 의도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성으로 감성을 억누르려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모습은 사회 어디를 가나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합리라는 이름 아래, 기억의 의무까지 '짊어져선 안 될' 업보로 처리해 버린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방향이다. 그래서 더 슬프다. 망자 혹은 시간 아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언젠가' 사라져야만 한다. 앞의 것이 사라져야 뒤따르는 새것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다시 말해, 정체되어 있다는 건 앞에 있는 것과 뒤에 있는 것 사이에 깔려 사망함을 의미한다. 결국, 아무쪼록 '강제적'으로 섭리를 따르게 된다. 끝내, 어쩔 수 없음은 가장 큰 울분을 초래한다. 그건 '강제'라서 '무기력'하다. 그 무기력이 위의 두 인물에게 나타나고 있다.

작중에서 나루코는 '주변에 잘 휘둘리는 타입'이라 언급된다. 다르게 말하면 특정한 성향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 나루코의 성향을 엿볼 수 있는 설정이 있다. 바로 그녀의 정리벽이다.

나루코는 어렸을 적에 갖고 놀던 장난감을 아직도 모아두고 있다. 이제 와서 가지고 놀 일이 없음에도 모아둔다는 건, 버리기는 아깝고 가지기도 싫다는 이중적인 심리다. 이러한 부분을 망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적용해볼 수 있다. 비유하자면, 과거는 아깝고 현재는 싫다는 이중적인 심리다.

장난감을 버리기 아까운 이유는 그것과 함께했던 추억이 그만큼 가치 있기 때문이다. 장난감을 가지기 싫은 이유는 더는 볼 수 없는 추억이 그만큼 두렵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것도 저것도 아니며, 이러한 부분을 정체성 혼란이라는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은 숱한 현대인이 겪는 딜레마이자 가장 속 편한 문제 해결방법이기도 하다. 앞으로 나아가기도 싫고 뒤로 퇴보하기도 싫다면, 길을 이탈해 영원토록 주저앉는 게 해답이니까.

히키코모리 상태의 주인공과 가장 처음 만난 게 나루코인 것은 그 때문이다. 히키코모리라는 건 세상과 자신을 분리하는 행위인데, 내부에 마음을 고정하면서도 외부 세상이 흘러간다는 건 아는 상태다. 마치 진공포장처럼 말이다. 효과도 비슷하다. 첫째, 공기와 접촉하지 않으니 변질되지 않는다. 즉, 분리 상태에서 마음은 썩지 않는다. 둘째, 자신과 비교할 사람이 없으니 상처의 경중을 재지 않고 그 자체로만 받아들일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이도 저도 아닌 상태다.

나루코와 야도미는 이도 저도 아니라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사소한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라는 단어다. 야도미가 선택을 무르고 방안에 틀어박힌 사이, 나루코는 '그럼에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마음속으로는 선택을 무를지언정 흐르는 시간 속에 사는 이상 '흐름'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여러모로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영화를 떠오르게 한다).

 애니메이션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의 한 장면

애니메이션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의 한 장면 ⓒ 애니플러스


그들을 둘러싼 사회, 문제에 대항하여

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몸은 변해도 마음은 죽음 당시에 머무르는' 이들의 홀로서기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열심히 뛰어다니는 이들을 보면, 무엇이 그들을 절박하게 만들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아마 친구의 죽음 탓이겠지만, 부차적으로는 죽음 아래에 묻힌 개인의 문제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잘 나가던 야도미가 시련을 겪고 서서히 방안에 틀어박히게 되는 일련의 과정들은 마치 추락하는 로켓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추락이 어느 한순간에 이루어진다'고 쉬이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날아가는 데 들인 시간만큼, 높은 고도에서 내려오는 것도 제법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삶이 바닥이라 생각될 때마다 그보다 아래쪽의 사람들을 발견하곤 위안을 받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야도미의 추락은 사실상 영원토록 진행될 것이라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여기에 덧붙여서, 세간의 생각과는 달리 끝없는 추락은 끝없는 상승으로 쉽게 뒤바뀔 수 있다는 점도 알게 된다.

하지만 개인의 문제는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작품은 야도미라는 캐릭터를 통해 일본의 여러 고질적 문제를 논한다. 작품 초반 야도미는 그야말로 쓸모없어 보이나, 이야기가 진행되며 방구석 은거엔 나름대로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이유로 친구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를 제시하고, 그것을 극복하며 사회로 복귀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주인공을 통해 우리가 배울 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표면적인 것이고 둘은 심층적인 것이다.

 애니메이션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의 한 장면

애니메이션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의 한 장면 ⓒ 애니플러스


표면적인 면에서, 사회 문제는 그 누구도 아닌 사회 공동의 책임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야도미가 "우리는 친구잖아"라고 말하지만, 이 작품에서 죽은 친구가 보인다는 야도미의 말을 믿어주는 이는 8화 이전까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분명, 유령으로 찾아온 혼마는 환영이나 거짓이 아니라 개인에게 보이거나 만져질 수도 있는 실체였다. 그런데도 다른 인물들은 야도미가 죄책감을 해소하려 연극을 하는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즉, 주인공 야도미는 같은 상처를 앓는 이들과 진심으로 어울리지 못한다. 이것은 어쩌면, 특정 사회 문제에 공감하는 척하며 속으로는 안 될 것으로 여겨버리는 우리들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

심층적인 면에서, 작중 인물들이 마치 사회 문제를 외면하는 것처럼 보인다. 야도미의 말마따나 혼마를 성불하는 건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인데도, 단지 증명할 수 없다는 것만으로 외면해 버린다. 이런 부분에서 우리는 '사람은 꽤 단순하다'는 점을 상기하게 된다. 작중인물을 포함해서, 대부분 사람이 인지의 영역 밖의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으니 없는 것(無)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매 순간 맞닥뜨리고 있다. 이를테면 공기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고 맨몸 상태에선 '증명'할 수 없다. 혹은 우주 밖의 어느 소행성이 지구에 다가오는 걸 맨몸 상태에서 '전혀' 알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을 탐구하려는 시도야말로 문제 해결의 첫 번째 발걸음이다. 

죽은 친구를 기억하는 여러 인물의 발자취가 맞물린다. 해변가의 파도처럼 모든 것이 하얘진다. 모두에게 잊혀야만 비로소 그 위에 새 성을 쌓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재건의 미덕'을 떠올려볼 수 있다. 파도 앞에 모래가 휩쓸리듯 성은 무너지기 마련이지만, 잊지 않는 것보단 언제든지 떠올릴 수 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이제 떠올려 보자.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아직 모르고 있을 뿐이다.

애니메이션 만화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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