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어요?" 창피하지만,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2016년 10월에 시작됐던 탄핵 촛불집회에도 가지 않았다. '나 하나 나선다고 과연 달라질까'라고 생각하며 지켜만 봤다. 방관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모두가 주인공이었던 그 때, 세상은 바뀌었다. 1987년 온갖 위협으로 인해 생사가 좌우되던 그 시절에도 모두가 주인공으로 나선 때가 있었다.

 영화 < 1987 >에서 배우 하정우는 공안부장, 최 검사로 분했다.

영화 < 1987 >에서 배우 하정우는 공안부장, 최 검사로 분했다. ⓒ CJ 엔터테인먼트


1987년 1월, 한 대학생이 고문치사로 사망한다. 이에 경찰은 쇼크사로 덮으려하지만, 공안부장인 최검사(하정우)는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곧장 부검을 밀어붙인다. 부검 결과와 증거로 인해 드러난 사실은 고문으로 인한 사망이었다. 은폐를 주도했던 박 처장(김윤석)은 당시 고문을 맡았던 조 형사(박희순)외 1명을 미끼로 구속시키며 다시금 사건을 덮으려 한다.

 고문이 자행된 남영동 대공분실을 재현해놓은 세트장.

고문이 자행된 남영동 대공분실을 재현해놓은 세트장. ⓒ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 1987 >은 관객의 정서적 개입을 유도하려 부단히 노력한 영화다. 구조를 살펴보면, 영화는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난 직후부터 시작된다. 이후 유족들의 오열, 사건을 은폐하려는 공작,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이 차례로 나온다. 점점 관객은 실화를 다룬 이야기에 빠져들며 감정이입한다. 그리고 마침내 고 박종철 열사가 잔인하게 고문당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대목에서 분노, 슬픔, 안타까움 등의 감정이 솟구친다. 이미 감정이 차오른 관객에게 감독은 시위 도중 머리에 최루탄을 맞는 고 이한열 열사까지 보여준다. 관객은 감정이 차오르다 못해 터질 지경이다. 감독은 그 감정을 해소할 배출구까지도 친절하게 마련해놨다. 바로 모두가 거리로 뛰쳐나와 민주화를 외치는 웅장한 시위장면이다. 연희(김태리)가 버스 위로 올라가 함께 주인공이 된 이 장면에서 관객은 참았던 감정을 분출하며 전율을 느낀다.

장준환 감독은 배역 분배 및 캐스팅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먼저 '모두가 주인공이었던 그 해'라는 포스터 문구처럼 배역의 비중을 골고루 분배했다. 큰 비중을 차지할 줄 알았던 하정우마저 등장 씬이 생각보다 적다. 이는 한 명의 영웅이 큰일을 이룬 것이 아니라, 개개인 모두가 뜻을 모은 주인공이었다는 점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영리한 연출이다.

캐스팅에 또 하나의 비밀이 있다. 관객의 감정을 고조시켰던 두 열사의 안타까운 희생 장면. 감독은 관객의 이입을 극대화하기 위해 강동원과 여진구라는 카드를 꺼내든다. '아저씨'의 김새론, '변호인'의 임시완. 외국으로 눈을 돌려보면 '맨 온 파이어', '아이 엠 샘'의 다코타 패닝처럼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배우를 불러 모았다. 이 같은 인물들이 위기를 맞을 때, 관객의 감정이입과 동정심은 월등히 높아진다.

 영화 < 1987 >에서 성명서 발표가 이루어진 성당의 모습.

영화 < 1987 >에서 성명서 발표가 이루어진 성당의 모습. ⓒ CJ 엔터테인먼트


이렇듯 많은 노력을 기울인 '1987'에서 유독 인상 깊은 장면이 있다. 성당에서 세상 밖으로 비둘기 떼가 날아가는 장면이다. 교도소 밖으로 검열 받지 않은 서신을 전하던 사람을 일컫는 은어인 '비둘기'와 성당에서 벌어진, 사건의 진실이 담긴 성명서 발표를 합쳐 놓은 이 장면. 이제 더 이상 진실이 비밀이 아니라고, 모두에게 알린다는 것을, 상징을 이용해 효과적으로 보여줬다.

반면 아쉬운 부분도 있다. 고 이한열 열사와 연희는 시위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히후 알고 보니 같은 대학 선후배 사이였고 결국 둘은 꽤나 깊은 교류를 나눈다. 둘의 연결 고리를 만들며 연희의 변화를 유발하기 위한 설정이다. 문제는 둘이 교류를 나누기까지 과정이 그다지 납득이 되진 않았다는 점이다. 혹시 이 때까지 숨 가쁘게 달려왔으니 관객에게 잠깐 휴식을 주려는 의도였을까? 만약 그런 거라면 잘 못 생각했다. 다른 길로 샌 느낌이 더 강했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어요?" 연희의 대사다. 시작부터 끝까지 영화 속엔 많은 변화가 있지만, 그 중 가장 의미 있고 큰 변화는 연희다. 민주화 시위엔 별 관심 없던 그녀는 국정에 무관심한 또는 포기한 많은 이들을 투영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녀의 변화는 우리가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연희가 그 주먹을 쥐고 버스에 올라 민주화 시위에 동참하는 장면에선 보는 우리마저 그 때의 시위에 동참하고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이는 1987년, 그 현장에 우리를 던져 놓음으로써 뜨거웠던 우리네 역사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연희가 시위 대열을 따라 걸어가는 모습.

연희가 시위 대열을 따라 걸어가는 모습. ⓒ CJ 엔터테인먼트


'지구를 지켜라', '화이 : 괴물을 삼킨 아이' 등 좋은 작품들을 연출한 장준환 감독의 신작 '1987'은 그의 영리함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영화다. 그 영리함으로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역사를 다뤘다. 좋은 의도와 뛰어난 연출. 이 정도만으로도 '1987'을 볼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1987 영화 김윤석 김태리 하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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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를 꿈꾸는 일반인 / go992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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