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을 재현한 영화 <1987> 포스터

1987년을 재현한 영화 <1987> 포스터 ⓒ CJ 엔터테인먼트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 분실에서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자행됐다. 1980년 5월 광주학살 이후 철권통치에 숨죽여 흐느끼며 지내던 한국사회는, 이 사건으로 인해 군사독재의 야만성에 분노하며 폭발, 사회변혁을 이뤄냈다. 조사를 받던 대학생이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국민들의 비웃음을 산 당시의 경찰의 발표, 군사독재를 향해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하는 민중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은 순간이기도 했다.

1987년은 1월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인해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았고, 그 사선이 나비의 날갯짓이 되어 폭풍을 일으킨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자리매김 된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 시대를 그린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했을 때, 어떤 영화로 완성됐을까 궁금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때의 감수성을 풍부하게 재현해낸 감동적인 현대사 드라마였다.

장준환 감독 연출한 <1987>은 역동적이었던 당시의 상황을 작은 공기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았다는 말이 과장되게 들리지 않을 만큼 세밀한 묘사가 크게 다가오는 영화다. 그 당시를 온몸으로 겪은 세대들에게는 극영화가 아닌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게 된다. 지금은 사라진 도심의 모습이나 백골단으로 불리던 경찰의 추격을 피해 다니는 장면 등은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일부 영화적인 각색은 있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대부분의 배역이 당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실명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배우들의 연기를 하고 있지만, 그 시절을 오롯이 묘사하는 풍경은 시간여행의 기분을 충분히 안겨준다. 애틋한 마음으로 1987년의 상황에 빠져들게 된다. 세대별로 느끼는 감성은 다르겠으나 영화가 전개될수록 그 시대의 한복판에 서 있던 사람들은 눈가에 점점 눈물이 번지는 것을 주체할 수 없게 된다. 아련하게 남은 기억이 생생하게 전달되는 탓이다. 2017년의 끄트머리에서 보는 1987년은 이루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한 감정을 만들어 낸다. 당시 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눈시울을 붉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눈시울 붉히게 만드는 1987년의 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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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은 대학생 박종철 고문을 당하다 죽은 순간부터 급박하게 전개된다. 이미 다 아는 사실이지만 영화로 묘사되는 장면은 기사의 문장으로만 봤던 내용이기에 다큐멘터리의 한 부분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고문으로 죽은 아들을 강가에 뿌리며 "종철아 잘 가그래이.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라고 말한 박종철 열사 아버지 모습은 영화를 통해 그 당시의 애절했던 분위기를 재현한다. 영화 초반 1987년의 기운을 가장 크게 불러일으키는 부분이다.

고문살인을 은폐 조작하려는 권력과 진실을 찾기 위해 애쓰는 기자들, 기본적인 절차를 지키려 했던 검사, 절규하는 유가족 등은 당시 사건의 전개 과정을 핵심적인 사안을 중심으로 속도감 있게 전개하면서 보도가 통제되던 시절 신문 기사 한 줄을 통해 전달되던 모습을 화면으로 전달해 준다.

사건의 단초는 1월 16일 자에 나온 일간지 1단 기사였고, 이후 대부분의 매체가 뛰어들어 군사독재 정권을 몰아넣는다. 분노한 민심은 거리에서 강력한 반정부 시위로 표출된다. 독재정권은 대충 꼬리 자르기로 사건을 덮으려 했지만 고문 사실을 은폐하고 고문 경관 수를 조작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독재정권은 더 큰 민중의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에 핵심역할을 했던 것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였다. 1월의 고문 사건이 은폐되고 축소됐다는 사실은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킬 만큼 컸다. 1987년 이후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알려진 것이지만, 그 과정 자체가 상당히 드라마틱하다. 하나의 톱니라도 맞물리지 않았으면 역사의 바퀴가 돌아가는 게 불가능했을 만큼 긴박한 전개가 이뤄졌다. <1987>은 그 과정을 긴장감 있게 그려낸다.

1987년 6월 항쟁의 불길을 일으키게 여러 열사의 모습도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해 재현하면서 관객을 1987년의 현장으로 안내해 전율케 만든다. 그 시대를 지나온 세대들에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는 순간도 그 열사들의 모습을 마주 대할 때다. 온몸으로 관통했던 지나온 시간에 대한 기억을 영화라는 거울을 통해 다시 조우하는 순간, 당시의 불길이 다시 일어나는 기분이다. 그리고 변혁의 기운이 여전히 세상 곳곳에 역사의 줄기를 따라 이어져 오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촛불 국민들에 대한 한국영화의 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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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은 민중 승리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감동과 의미가 크게 다가온다. 지난겨울 거리의 촛불은 1987년의 시간과 서로 통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1987> 배우들이 2017년 촛불의 현장에 함께하며 역사의 연대를 실천했다는 사실도 영화의 의미를 강조해 주고 있다.

<1987>은 저 멀리 1980년 5월 광주의 대동세상에서부터 명박산성 그리고 탄핵 촛불로 이어지는 역사를 잇는 가교가 된다. 특정인이 주도한 것이 아닌 국민적 저항이 찬란한 승리를 이뤄냈음을 보여 준다. 김윤석, 유해진, 하정우, 설경구, 오달수, 김의성, 이희준, 여진구, 강동원 등이 이름난 배우들이 총출동한 배역은 1987년의 승리가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나름의 역할을 통해 이뤄냈음을 강조하는 상징으로 다가온다. 시위를 이끄는 목소리의 주인공도 배우 문소리다.

박종철 열사의 고교 후배인 배우 김윤석이 반공정신에 찌들어 고문살해를 주도한 대공수사처장으로 나오고, 문익환 목사님의 아들인 문성근 배우가 권력기관의 핵심으로, 당시 총학생회에서 활동했던 우현 배우가 치안본부장으로 특별출연하는 모습은 권력의 비열함을 묘사하기에 적합한 눈에 띄는 캐스팅으로 영화의 재미를 더하는 요소다.

<1987>은 그 시대의 기억을 소환하면서 시키면서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도 강조한다. 권력기관에 걸려있는 사진과 결재 서류에 등장하는 사인을 통해 주범의 존재를 잊어서는 안 됨을 알려준다. 5월 광주에서 수많은 국민을 학살하고, 고문살해의 실질적 책임자가 여전히 편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못내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 없기 때문이다.

1987년의 기억이 있는 세대와 없는 세대가 <1987>을 보는 느낌은 많이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1987>이 당시의 투쟁에 대한 미화보다는, 불의한 권력에 저항했던 역사와 한겨울 거리에서 촛불을 들었던 위대한 국민들을 향한 한국영화의 헌사이자 오마주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1987 영화 장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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