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오 밝히는 바히드 할릴호지치 일본 감독 동아시아축구연맹(EAFF) E-1 챔피언십에 출전하는 바히드 할릴호지치 일본 남자 축구대표팀 감독이 7일 오전 일본 도쿄 프린스호텔에서 열린 공식 기자회견에서 각오를 밝히고 있다.

▲ 각오 밝히는 바히드 할릴호지치 일본 감독 동아시아축구연맹(EAFF) E-1 챔피언십에 출전하는 바히드 할릴호지치 일본 남자 축구대표팀 감독이 지난 7일 오전 일본 도쿄 프린스호텔에서 열린 공식 기자회견에서 각오를 밝히고 있다. ⓒ 연합뉴스


일본축구가 지난 동아시안컵 한일전 참패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16일 '2017 동아시아축구연맹(EAFF) E-1 챔피언십' 경기에서 신태용 감독이 이끄는 한국이 일본을 4-1로 대파하며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초반 2연승을 달리며 안방에서 우승의 꿈에 부풀었던 일본은 예상하지 못한 대패에 충격에 빠졌다.

할릴호지치 일본대표팀 감독에 대한 자국내 여론은 급격이 악화됐다. 대패도 대패지만 경기 후 할릴호지치 감독의 인터뷰는 가뜩이나 부글부글 끓던 분위기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할릴호지치 감독은 이미 경기 전부터 대회 내내 한국을 '전력상 이번 대회 최강팀'이라며 호평해왔는데, 한일전 패배 이후에는 "한국이 일본보다 모든 면에서 우위였다. 힘과 기술, 경기를 운영하는 모습이 정말 대단했다. 이번 대회에 우리가 원했던 선수들을 모두 데려오지 못했지만 그들이 왔다고 해도 오늘의 결과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의 언론과 축구전문가들은 할릴호지치 감독의 발언과 태도를 비판하며 융단 폭격을 퍼붓고 있다. '이미 싸워보기도 전에 상대가 더 강하다고 인정한 것은 심리적으로 지고 들어갔다'라는 식의 비판이다. 또한 '한국에도 이렇게 완패할 정도라면 내년 월드컵 본선에서 만나게 될 폴란드나 콜롬비아, 세네갈과는 해보나 마나 아니겠느냐'는 울분을 터뜨리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할릴호지치 감독의 경질을 주장하는 극단적인 여론까지 나오고 있다. 물론 월드컵이 반년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실제로 성사될지는 미지수지만 그만큼 할릴호지치 감독에 대한 현지 분위기가 대단히 좋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불과 3년 전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할릴호지치 감독

할릴호지치 감독은 지나치게 소신이 강하고 독불장군 같은 성격 때문에 예전부터 구단, 언론, 팬들을 가리지 않고 자주 불협화음을 일으켰던 전력이 있고 일본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동안 월드컵 본선진출이라는 성과로 그나마 아슬아슬한 선을 유지하던 할릴호지치에 대한 불만 여론이 이번 동아시안컵 참사로 한꺼번에 폭발했다는 분석이다. 할릴호지치 감독이 월드컵까지 지휘봉을 유지하더라도 리더십에 큰 상처를 받은 만큼 레임덕을 피할수 없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할릴호지치의 추락과 일본축구가 맞이한 혼란은 우리에게도 묘한 감정을 가지게 한다. 할릴호지치 감독은 지난 브라질월드컵에서 알제리를 이끌고 홍명보 감독이 이끌던 한국을 4-2로 완파하며 '의리축구의 심판자'로 국내 팬들에게 강한 첫 인상을 남겼던 인물이다. 당시 한국 축구와 언론은 모두 알제리를 만만한 1승 제물로 여겼으나 뚜껑을 열자 오히려 한국이 '승점자판기'로 전락했다.

당시 할릴호지치 감독은 한국축구의 전력을 분석하기 위하여 K리그 경기까지 일일이 챙겨보며 현미경 분석을 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며, 국가대표 훈련기간 중 토지 매입 논란 등으로 구설수에 올랐던 홍명보 감독과 비교되어 더욱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랬던 할릴호지치 감독이 하필이면 한국의 최대 라이벌 일본의 지휘봉을 잡는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국내에서도 내심 부러움과 경계심까지 느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세상만사는 새옹지마'라고, 불과 3년 전 알제리를 16강으로 이끌고 '국민영웅' 대우를 받았던 할릴호지치 감독은 이번엔 현재 일본축구의 역적취급을 받으며 뭇매를 맞고 있다.

한국축구 입장에서는 그동안 쓴 맛을 안겨줬던 할릴호지치와 일본에 모처럼 설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통쾌하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은 웬지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부분도 있다. 만일 지난 한일전에서 결과가 정반대로 나오기라도 했다면 지금 일본이 겪고 있는 '카오스'는 바로 신태용 감독과 한국축구의 몫이 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멀리 볼 것도 없이 허정무 감독은 2010 남아공월드컵을 앞두고 동아시안컵 중국전에서 사상 최초로 0-3 완패를 당하며 엄청난 비난과 함께 경질여론에 직면하기도 했다. 조 본프레레 감독은 실제로 2005년 동아시안컵에서 2무 1패라는 초라한 성적에 그친 뒤 월드컵 본선행을 이끌었음에도 경질까지 당했다.

차범근 감독은 98프랑스월드컵을 앞두고 하필 3.1절 무렵에 열린 다이너스티컵(동아시안컵의 전신)에서 일본에 완패하며 곤경에 처했다. 차 감독은 한달 후 2002 한일월드컵 공동개최 기념으로 열린 일본과의 친선 리턴매치에서 겨우 설욕에 성공했지만 정작 중요한 월드컵 본선에서는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차 감독은 훗날 당시 분위기를 회고하며 "월드컵 본선을 준비해야 할 시간에 여론에 떠밀려 한일전 결과에 매달려야 했다"며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신태용 감독도 일본전 승리 이전까지 중국과 북한전에서 저조한 경기력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만일 일본전에서도 결과가 좋지 않았다면 신태용 감독에게 쏟아질 후폭풍은 지금 할릴호지치 감독이 받고 있는 압박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국대 향한 비판과 칭찬, 쉽지 않지만 적절한 균형을 찾아야

동아시안컵은 사실 비중이 큰 대회라고 할 수는 없다. 각국 모두 해외파를 포함한 최정예멤버가 나오지 못했고 국내파들은 자국리그 일정을 모두 마치고 합류하며 체력적인 부담도 있었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독특한 정치-역사적 배경으로 얽힌 라이벌전이라는 정체성은, 어떤 이유로든 '결과'라는 부담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동아시아 라이벌 팀들도 못 이기면서 월드컵 본선에서 만날 상대들을 어떻게 이기냐"는 주장은, 얼핏 들으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과정의 의미를 무시하고 무조건적으로 눈앞의 결과만을 강요하는 '기적의 논리'가 되기 일쑤다.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 허정무의 한국은 예상을 깨고 원정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그러면 당시 한국이 승점을 따냈던 그리스나 나이지리아가 동아시안컵에서 패한 중국보다 약팀이 되는 걸까? 지난 11월 평가전에서 한국이 콜롬비아를 2-1로 한번 이겼다고 본선에서도 콜롬비아가 한국보다 약팀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까? 월드컵은 월드컵이고 동아시안컵은 동아시안컵일 뿐이다.

한일전 승장인 신태용 감독도 어쩌면 할릴호지치 감독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 7년 만의 한일전 완승과 동아시안컵 우승이라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작 일본 2군 이긴게 뭐가 대단하냐", "3경기 중 겨우 1경기 잘한 건데 과대평가할 필요없다"라며 깎아내리는 여론은 여전하다.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도 어차피 최정예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나, 동아시안컵 과정에서 이뤄낸 선수발굴이나 전술실험에 대한 성과는 의도적으로 무시당하고 있다. 진정으로 대표팀에 대하여 애정어린 비판도 있지만, 어떻게든 신태용 감독과 선수들의 노력과 성과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듯한 태도는 못내 아쉽다.

팬들 사이에서는 2014 브라질월드컵 당시의 홍명보호나, 2015년 호주 아시안컵 이후 슈틸리케호가 남긴 트라우마가 아직 강하게 남아있다. 홍명보호는 런던올림픽의 성공을 바탕으로 많은 기대를 모았으나 정작 월드컵에서는 의리축구 등 숱한 논란을 일으키며 자멸했고, 슈틸리케호도 출범초기 아시아의 약팀들을 상대로 승승장구했지만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점점 밑천을 드러내며 중도에 경질당했다. 전임자들도 한때는 잘나가던 순간이 있었지만 이후 자신들의 방식에 안주하며 불통과 독선의 늪에 빠졌고, 축구계와 일부 언론, 팬들이 이들을 지나치게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는 분위기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당시의 좋지 않은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팬들은 신태용호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욱 엄격하고 예민한 잣대를 들이대는 경향도 있다.

인터뷰하는 신태용 감독 2017 동아시안컵에서 숙적 일본을 4-1로 대파하고 우승을 차지한 축구국가대표팀 선수들의 신태용 감독이 17일 오후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한 뒤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인터뷰하는 신태용 감독 2017 동아시안컵에서 숙적 일본을 4-1로 대파하고 우승을 차지한 축구국가대표팀 선수들의 신태용 감독이 지난 17일 오후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한 뒤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평소 자신만만하던 신태용 감독도 최근 연이은 팬들의 질타와 냉담한 여론에 주눅이 든 듯, 동아시안컵 우승 뒤에는 튀는 발언이나 세리머니를 자제하고 최대한 자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선수들 역시 우승하고도 마음껏 기뻐하는 기색을 드러낼 수 없었던 분위기는 마찬가지다. 지면 지는대로, 이기면 이기는 대로 항상 칭찬에는 인색하고 욕먹는 데 익숙해져야 하는 일상은 유독 한국 대표팀 감독과 선수들의 숙명이기도 하다.

무조건적인 지지도, 비난도 모두 답은 아니다. 결과와 과정, 비판과 칭찬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상반된 경기결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는 할릴호지치와 신태용 감독의 모습을 보면서 영광과 오욕도 어쩌면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내년 월드컵까지 한일 양국 대표팀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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