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강철비>(2017)의 포스터

영화 <강철비>(2017)의 포스터 ⓒ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북의 1호가 남으로 내려왔다. 이 영화는 그러한 상상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왜 내려와야 하는지에 대한 그럴듯함이 필요하다. 최고 권력자이니 자기 발로 오지는 않을 테고, 아주 만약의 가정으로 쿠데타가 일어나 남한에 망명을 온다면 어떨까. 그러면 코미디에 가까운 설정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양우석 감독은 그것에 강철비를 뿌린다. 여기서 강철비는 중국에 수출하기 위해 붙인 '싸구려 제목'이 아니다. 수많은 자식을 품은 포탄이 사방으로 뿌리는 폭발이 바로 강철비다.

그러한 제목에서부터 모종의 암투가 뿜어져 나온다. 우리가 이 영화를 본다면 단언컨대 트럼프 시대의 한국 정세를 염두에 두고 있음이 틀림없을 것인데, 영화는 그러한 불안감을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한국은 몹시 춥고, 제목에 쓰인 '강철'과 다뤄지는 내용인 '냉전'은 '차가운' 느낌을 준다.

그래서 이 영화는 "머리는 차갑고 몸은 뜨겁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판단하는 입(머리)과 행동하는 손(몸)이 맞지 않는 북한을 보며 '차라리 쿠데타라도 일어나버렸으면' 한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상상에만 머물고, 상상 중에서도 일탈에 가깝다. 두 신체 간 소통의 불확실로 말미암은 일탈, 그러한 상상의 열쇠는 '1호'이며 마치 영원할 것 같던 권력의 금자탑이 남으로 올 때 이 영화는 비로소 시작된다.

영화에서 다루는 '핵 공격의 위협'

 영화 <강철비>의 한 장면.

영화 <강철비>의 한 장면. ⓒ NEW


쿠데타를 일으킨 북측의 인원은 핵을 발사하려 한다. 그런데 핵을 발사하기 위해선 복잡한 암호가 필요하다. 그것을 결정할 1호가 남한에 있다. 1호는 상태가 위독하니, 암호는 반반의 확률로 생사를 오고 가는데, 사실상 그것이 우리가 겪는 불안이라고 할 수 있다. 핵은 발사되거나 말거나 둘 중 하나다. 권력자도 죽거나 살거나 둘 중 하나다. 중요한 것은 핵과 권력자 어느 한 쪽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우리 남한도 '사라진다.' 이 영화에서의 핵 공격의 위협은 바로 그것이다.

자승자박 혹은 자업자득, 하지만 그것은 북한이 내세우는 명분이고 우리에겐 '동귀어진(함께 죽을 생각으로 상대에게 덤벼듦)'으로 보일 뿐이다. 영화 <강철비>에는 그것을 막으려는 두 인물이 있다. 그들은 차갑게 판단하지만 행동은 몹시 따스하다. 마치 처음부터 한몸이었던 것처럼 북의 최정예 요원 '엄철우'와 남의 외교안보수석 '곽철우'의 이름이 같다. 두 인물은 가장 냉철하게 판단해야 할 위치에 있음에도 서로의 우정을 나누는 것을 빠뜨리지 않는다. 이 영화가 재밌는 점은 바로 그것인데, 머리와 몸의 관계가 국가와 개인의 관계로 확대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국가는 그들(두 명의 철우)에게 명령을 내리니 '머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국가의 기준으로 행동하는 '몸'이다. 하지만 적어도 개인의 범주에선 자식을 책임져야 할 '머리'다. 여기서 머리라는 것은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존재가 아니라, 책임을 진다는 든든함으로 결정된다. 그들이 고생하긴 하는데, 절대로 "머리가 무식해서 몸이 고생"하는 건 아니다. 머리는 항상 냉철했고 적어도 각자의 가치관 안에서는 '합리적'인 판단이다.

그것은 영화에서 정치라는 이름으로 끝없이 되풀이된다. 선제타격할 것인가 점진적으로 유예를 두고 볼 것인가. 정권이 넘어가는 시기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임기 말 대통령과 새로운 당선인은 핵 문제로 대립한다. 그들이 평소에 친했음에도 그렇고, 동맹국이었던 미국도 그러하다. 영화 중에 대통령은 핵 문제를 두고 미국 측과 통화하는데, 미국 측 대변인은 이렇게 말한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철해져라." 어느때보다 냉철해야 할 긴박한 정세 속에서,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던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 무너지는 순간, 대통령인 '그'는 화를 내고야 만다. 

국가의 머리에 해당하는 대통령은 뜨거워지고, 개인의 머리에 해당하는 두 철우도 우정을 나누며 뜨거워지는데, 대통령의 판단은 그릇되고 두 철우의 판단은 옳은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분명 그러한 '뜨거움'으로 어느 쪽이 옳은지 '판단'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곧이 믿을 이유가 없다. 대통령의 '흥분'이란 그의 기준으로 '국민을 지키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단지 이상을 실현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북한을 '평면적 존재'로 그린 것은 다소 아쉽지만

 영화 <강철비>의 한 장면.

영화 <강철비>의 한 장면. ⓒ NEW


여기서 잠깐 언급해야 할 것이 있다. 남북분단을 소재로 한 한국의 액션영화는 <쉬리>(1999)에서 시작해 <베를린>(2013)을 거쳐 <강철비>(2017)로 이어진다. 그 영화들은 아군을 하나로 뭉치기 위해 북한을 등장시키는 경향이 있다.

북은 항상 적국이며 남한을 향해 매정하게 공작을 펼치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때 한국의 갈라진 정치는 국토수호라는 명분 아래 하나로 통합된다. 물론 북한은 우리의 주적이며 그것을 슬기롭게 극복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서사를 매끄럽게 진행하기 위해 북한을 평면적인 것으로 설정하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이 영화는 그 점에서 한 걸음 나아갔다고 볼 수 있다. 뜨거운 몸을 가진 두 인물은 차가운 머리로 절제된 행동을 선보인다. 두 사람이 서로의 우정에 이끌려 어느 한쪽을 감싸주었다면 분명 흔한 신파극으로 치닫았을 것인데, 다행히도 그러지는 않는다. 철우라는 이름으로 이어진 두 남자는 '대한민국'에서 '한'으로 이어진 남한과 북한을 떠올리게 하며, 서로가 함께 나아갈 동반자임을 상기시킨다.

두 남자는 자신의 국가만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위해 움직인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고, 그렇다면 이 영화를 보는 우리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선호 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동시 게재되었습니다.
영화 강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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