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 온(play on)' 규정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일터에서도 적용될 날은 언제나 올까? 그리고 반칙을 자꾸 하는 회사가 옐로우를 넘어 레드카드를 받는 날은?   

'플레이 온'. 일반적으로는 '계속하다'를 뜻하면서, 스포츠에서는 축구, 핸드볼, 럭비 등에서 반칙이 일어났을 때, 오히려 그 상황이 반칙을 당한 쪽에게 유리하면 심판이 계속 경기를 진행시키는 규칙을 일컫는다. 

지난달 30일 개막한 제43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새로운 선택' 중 장편영화 분야에, 이 스포츠 규칙과 동명인 다큐 <플레이 온(Play On)>(12월 1일)이 상영되었다. 변규리 감독과 5명의 노동자가 등장하는 이 영화는 이미 인천, 강릉, 서울 인권영화제를 비롯하여 DMZ국제다큐영화제, 인디포럼, 인디다큐페스티발에도 소개되었다. 

팟캐스트를 하는 주인공들 SK브로드밴드 금천광명지회 고객센터에서 근무하는 5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구로FM에서 팟캐스트 <노동자가 달라졌어요!>를 진행한다.

▲ 팟캐스트를 하는 주인공들 SK브로드밴드 금천광명지회 고객센터에서 근무하는 5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구로FM에서 팟캐스트 <노동자가 달라졌어요!>를 진행한다. ⓒ 서울독립영화제


자, 여기에서 질문 하나. SK브로드밴드 제복을 입고 인터넷, TV를 설치, 수리를 위해서 우리의 집을 찾는 기사가 있다. 그들은 SK 직원일까? 힌트. 영화에 등장하는 기사의 표현에 따르면, "다단계 직원"이다. 

꽤 오래 전의 일이다. 전세를 찾아 또다시 이사를 했다. 새로 인터넷 설치를 요청했고 SK 기사가 방문했다. 일을 끝낸 기사에게 음료수를 건네면서, "SK, 대기업에 다니니 대우가 좋지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기사가 일순 주춤하더니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하는 대답. "뭘요. 정식직원도 아니에요. 그냥 SK에서 일감 주는 업체에서 일해요." 그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SK 옷을 입어도 다 같은 SK 직원이 아니고, 그래서 근무환경도 다름을. 

이 영화의 주인공은 SK브로드밴드 금천광명지회 고객센터에서 아파트와 주택을 담당하는 설치기사 김용호, 김준홍, 남훈, 이진환, 전봉근씨다. 이 5인조 역시 기자의 집에 왔던 기사처럼 하청업체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다. 다른 점은 구로공동체라디오 구로FM에서 <노동자가 달라졌어요!>라는 팟캐스트 방송을 진행하는 아마추어 방송인이라는 것. 이들은 일터에서 생기는 각종 서글픔을 회사 눈치 보지 않고 까발리면서 사이다 발언을 한다.

카메라는 방송국 내에서 벌어지는 이들의 수다 현장뿐만 아니라, 방송국 바깥 진짜 일터에서 벌어진 상황을 부지런히 담았다. 이들은 암벽등반가와 카우보이가 되어 전봇대와 담을 거침없이 오르면서 까만 케이블 선을 연결한다. 그러다 자칫 다치더라도 "지표가 떨어져" 산재 처리를 하지도 못한다. 회사는 다치지 말라 말하면서 실적을 위해 궂은 날에도 작업을 강요한다.

"걱정 마세요. 점수 잘 줄게요"라는 고객의 말을 듣기 위해서, 이 집 저 집 뛰어다니느라 생긴 "꼬랑내"와 땀내를 숨겨야 한다. 또 전봇대 오르느라 옷이 더러워져도 "복장 불량"으로 지적 받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설치에 필요한 자재 대부분은 기사가 사비로 구매한다. 길고 긴 선이 이리저리 구불거리는 현장에선 욕이 나오더라도 참아야 한다. 그리고 전화가 오면 무조건 흑기사가 되어 달려가야 하니 휴일도, 식사시간도 따로 없다.

결국 노동자들이 뿔났다. 노동 인권 찾겠노라 노조를 처음 결성해 본다. 결국엔 파업하고 찬바람 휭휭 부는 거리에서 몇 달 노숙까지 하면서 "진짜 사장 나와라"를 외쳐본다. 100% 외주인 상황에서 하청에 하청으로 꼬리를 무니, 진짜 회사의 사장이 누구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노동자는 누가 책임져야 할까? 파업하는 날은 케이블 선처럼 길고 길기만 하다. 

스포츠에서야 반칙을 하면 심판이 경고에 이어 퇴장 명령도 하건만, 회사는 제아무리 반칙을 해도 퇴장을 당하는 법이 없다. 그리고 반칙을 저지른 회사만 유리한 상황임에도, 이 불공정한 경기는 중단되지 않고 계속된다. 특히 상대가 대기업일 경우는 더더욱.

인터넷을 설치하는 기사. 스틸컷 주택 담당의 설치기사가 전봇대에 올라 인터넷을 설치하고 있다. 일을 하다가 다치더라도 지표 떨어질까봐 산재 처리를 하지도 못한다.

▲ 인터넷을 설치하는 기사. 스틸컷 주택 담당의 설치기사가 전봇대에 올라 인터넷을 설치하고 있다. 일을 하다가 다치더라도 지표 떨어질까봐 산재 처리를 하지도 못한다. ⓒ 서울독립영화제


그래서 반칙을 당한 노동자들이 오히려 싸우다 지쳐서 자의든 타의로 중도에 경기장을 떠나기도 한다. 파업에 돌입한 노동자들은 수입이 끊겨 점점 힘들어지고, 결국 가족불화마저 겪는다. 그래서 '생계투쟁'으로 알바를 한다. 난생 처음 드라이버와 펜치 대신에 창과 칼을, SK 로고가 박힌 점퍼가 아닌 조선시대 갑옷을 입은 채 서본다. 어색하고 창피하면서 서럽다. 

결국 "사람답게 살아 보려고" 파업을 시작한 이들 중 몇은, 먹고 살기 위해, 가족 때문에 파업을 그만두기도 한다. 동지들도 처지를 알기에 뭐라 말할 수 없다. 

카메라는 이 5인조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몇 년 간 뒤따른다. 그리고 파업을 하고 난 후의 모습까지도 압축해서 보여준다. 노동자들은 기나긴 파업을 끝내고 하청업체 정규직이 되었지만, 수입은 과거에 비해 절반 수준이다. 기본급에 성과에 따라 인센티브가 주어지는데, 인센티브 받을 만큼의 일감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캠핑을 가고 싶은 봉근씨의 소원은 이뤄질까?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진환씨 사연은? 이들 노동자들이 환하게 웃을 날이 올까? 스포츠 '플레이 온' 규칙이 적용되는 때가 올까? 팟캐스트의 "ON AIR"처럼 노동 인권을 위한 투쟁도 여전히 살기 위한 '생'방송이다.

참, 여기서 에티켓 둘! 더운 날 설치기사에게 뜨거운 커피는 금지. "한약을 먹어서", "장염에 걸려서"라며 거절할 수도 있다. 이열치열도 한계가 있으니까. 그리고 이들도 누군가의 소중한 아빠, 아들, 형제임을 기억하며 존중해 주기.

플레이 온 서울독립영화제 노동 인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한자어로 '좋아할, 호', '낭만, 랑',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 '이'를 써서 호랑이. 호랑이띠이기도 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