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를 보면서 <너의 이름은> 혹은 <목소리의 형태>가 떠올랐다. 이 영화들은 모두 본국에서의 높은 흥행으로 한국에서도 개봉한 영화라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에서 일본 영화가 2% 정도의 점유율을 보이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연이은 세 영화의 인기와 흥행은 신기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일본 영화는 한국인들에게 잘 맞지 않는 게 사실이다. 낮은 점유율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 특유의 정적이면서 과잉된 정서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 정서가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있었다면 하나의 답이 나온다. 영화가 담고 있는 이념이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사실이다. 재난 앞에서, 왕따를 대하며, 죽음 앞에 서 있는 세 영화는 분명 다르다.

일본이 겪는 현기증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스틸 사진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스틸 사진 ⓒ (주)NEW


이전에 개봉한 두 영화를 보았을 땐 막연하게 느껴지기만 했던 그것을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를 보고 나서야 확실히 깨달았다. <너의 이름은>에서 '타키'와 '미츠하'는 재난을 겪고, <목소리의 형태>에서 '쇼야'와 '쇼코'는 왕따를 당한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에서 '나'와 '사쿠라'는 죽음을 본다. 각 영화의 두 남녀는 해결할 수 없는 사건을 겪고 있다.

그들의 사회는 운석을 막을 수 없고, 왕따에서 구해주지 못하며,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 위에서 고뇌하는 주인공들은 현기증을 겪는다. 아주 지독한 무기력함을 대변하는 '친구 아닌 소년'과 가식을 뒤집어쓴 '야마우치 사쿠라는 현기증의 가장자리에 서 있다. 빙글빙글 세상이 돌고, 가장자리에서 원심력으로 튕겨 나갈듯한 위기감이 팽배해 있다.

11년의 대지진은 일본에 큰 상처를 남겼다. 그때부터 일본의 청소년들은 현기증에 시달리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그들은 여태껏 그만한 재난을 겪어본 적이 없었기에. 95년의 고베 대지진 후로 태어난 96년생들은 2011년, 15세가 돼 처음 큰 재난을 겪었다. 그동안 기록으로 듣고 보았던 것을 몸소 체험했을 때 가슴 속 깊이 다가왔으리라 생각한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2017년, 그들은 21살이다. 대학교 3학년,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해야 할 나이다.

<너의 이름은>은 일본인이 느끼는 재난에 대한 공포감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그 영화에서 남녀는 역할교환을 통해 재난을 막고자 한다. 그러나 다른 곳으로 향하던 운석이 갈라져 나와 그들 마을에 피해를 입힌다.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재난이 일어난 것이다. 결국 재난은 막을 수 없음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행동이 있다. 재난을 미리 감지하고 피하는 것, 그 후의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2011년 일본 정부가 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너의 이름은>은 재난에 대한 현기증을 안고 있다.

<목소리의 형태>는 사건 후에 고립된 사람들을 말한다. 작품에서는 왕따를 방치한 권력에 해당하는 선생이 나오며,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동창생이 나온다. 청각 장애가 있는 '쇼코'와 일부러 듣지 않는 '쇼야', 그들은 왕따 탓에 세상과 단절되어 산다. 그들에게 왕따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재앙인 동시에 평생 안고 가야 할 상처다. 그들은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며, 달리 행동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것들은 모두 피해 이후의 상황과 겹쳐진다. 보상하지 않는 정부, 호소할 곳 없는 피해자들, 쓰나미에 고립된 것처럼 세상과 단절된 이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사건으로부터 몇 년 후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마치 과거의 상처를 잊지 말라는 듯 말이다. 작품에서 '사쿠라'는 필연적으로 죽을 운명이다. <너의 이름은>에서 운석이 다가오는 것처럼 말이다. 다른 점이라면, 미리 알고 '공병문고'라는 일기장에 현재를 기록해둔다. 그녀는 '재난'에 대비하는 자세가 철저하다. 항상 웃고 슬픔을 내색하지 않는다. 주인공 남녀는 어쩔 수 없었다고 서로 다독이며 밝은 미래를 기약한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와 2014년 세월호 참사는 일본의 사례와 겹친다. 느끼는 감정은 얼추 비슷할 것이다. 분명 일본 영화는 한국의 정서와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상처는 아무 말 없이 이어진다. 두 나라가 항상 으르렁대며 싸워도 아픔만큼은 온전히 전해진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와 양가적 감정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스틸 사진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스틸 사진 ⓒ (주)NEW


영화의 전반적인 이야기는 이렇다. '나(키타무라 타쿠미)'는 맹장으로 입원한 병원 로비에서 '공병문고'라는 일기장을 줍는다. 그런데 그것은 같은 반 여자아이 '야마우치 사쿠라'의 것이었고, 그 일을 계기로 사쿠라는 '나'에게 들러붙는다. 사쿠라는 '나'에게 자신은 췌장에 병이 있어 곧 죽으니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사쿠라는 어딜 가나 밝고 긍정적이어서 소위 말하는 인기인이었고, 반대로 '나'는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다. 그런 '나'에게 사쿠라가 적극적으로 들이대자 주변에서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이야기의 흐름이 끊기는 부분에 있다. 개연성이 없다고 느낄 수 있는 부분들, 첫째로 사쿠라는 죽음이 예견된 상황이고 숨기지도 않는다. 모두에게 숨기는데 '나'에게는 말한다. 왜 하필 '나'일까? 만약 영화를 보지 않은 당신이 그게 사랑 때문이라 말한다면 할 말이 없다. 그렇지만 당신이 영화를 보았다면 사랑 때문은 아니라 생각할 것이다. 

사쿠라는 운명을 믿는다. '나'와의 대화에서 그렇게 말한다. 몇 번 정도 반복해서 말하는 그 대사는, '나'를 향해 말하는 것보다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 크다. 일종의 자기암시인 셈이다. 서로가 만난 건 운명이라는 둥 자기가 죽는 것도 그렇다는 둥, 결정적으로 오늘 췌장 탓에 죽나 내일 '묻지마 살인'으로 죽나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둥의 이야기. 하지만 이러한 말은 '나'와 어울리려는 행동으로 반박되고 만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건 사람 간의 끈, 인연, 삶의 의지를 잇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가 말하는 운명이란 건 '죽음'으로 향하는 것보단 '살 수 있다는 믿음'을 뜻한다.

그러나 믿음은 믿음일 뿐이고 우리는 높은 확률로 정해진 결과를 알고 있다. 그렇게 느껴지는 건 삶을 이야기하면서도 죽음을 느끼고 있는 모습 때문이다. '공병문고'라는 일기는 세상에 흔적을 남기는 행위, 죽음 앞에서 '나'와 죽기 전에 해보아야 할 버킷 리스트를 실행에 옮기는 행동, 모든 친구에게 밝고 긍정적인 행실. 죽음 앞에 초연한 사람은 없다. 다만 숨기고 있을 뿐이다. 그녀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죽음과는 반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심리학에선 이것을 반동형성이라 부른다. 

1월에 개봉한 <너의 이름은>에서는 과거로 돌아가 재난을 피한다. 막지는 못했지만 피해는 없었다. 운석은 저항할 수 없는 운명의 역할이다. 무스비라는 인연의 끈은 행운과도 같은 역할이다. 5월에 개봉한 <목소리의 형태>는 막을 수 있었던 현실을 막지 못한 것에 괴로워하며 뒤늦게 참회하려 한다. 그 영화에서도 대화를 목적으로 한 '일기'가 나온다. 그러나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그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을 운명이라 말하며 해탈한 척하지만 무기력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

사쿠라는 왜 이리 밝은 것일까. '나'는 왜 이리 침착한 것일까. 두 극단은 통한다. 두 사람은 모두 소외되어 있다. 그녀는 사회 안에 속하지만 동시에 죽음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다. '나'는 사회밖에 있지만 책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다. 두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그것을 교차하고자 한다. 테두리를 합해 교집합을 세우고자 한다. 사쿠라는 '나'를 친구들과 어울리게 하고 '나'처럼 책에 빠진다. 도서위원으로 일하며 타인의 기록(책)을 정리한다. 자신의 기록(일기)도 완성해나간다.

'나'는 사쿠라와 어울리며 사회로 발을 내딛는다. 그녀의 죽음 안에 들어가 감정을 공유한다. 그녀는 그를 삼키게 된다. 그러나 그녀가 죽고 '나'에게 남겨진 부분을 생각하게 된다.

사쿠라는 인기가 많아 보이지만 그만큼 고독하다. 그녀의 겉모습은 죽음 앞에 세워진 부실건물이기 때문이다. 겉과 속이 다르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재난의 형상이다. 위태한 것이나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자연재해는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그녀의 병도 자연재해와 같다. 살아남을 확률은 없다시피 하다. 그럼에도 삶을 이어가지만, 영화는 소녀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보여주지 않는다. 보란 듯이 그녀가 스쳐 지나가며 말했던 '묻지마 살인'으로 흔적을 지운다. 세상에 마지막 남은 것은 공병문고. 소통과 대화가 담긴 의지의 잔해다.

일본의 상처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중 한 장면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중 한 장면 ⓒ (주)NEW


그래서 두 사람은 일본의 상처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타인의 죽음 앞에 침묵하는 '나'와 알지도 못하고 떠들어 대는 반 아이들. 그들은 사건에 공감하지 않은 채 쉬이 남 일처럼 떠들어대는 누군가다. 왜 그러했는지 원인도 모른 채 결과만을 보고 떠들어 대는 언론 혹은 대중. 피해자는 사건에 의문을 품는다. 과연 정말로 자연재해가 맞는 것이었는지. 미리 알려주었다면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그럼에도 피해를 본 당사자는 힘껏 웃으며 살아간다. 그것이 일본인이 가진 정서다. 아닌 척하는 것. 불쾌해도 괜찮다 말하고, 예의범절을 지키려는 그들. 

현기증. 자연재해를 멋지게 극복해내거나 (<너의 이름은>) 혹은 인재(人災) 를 극복하거나 (<목소리의 형태>). 그런데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에서는 자연재해를 극복한 후 인재가 닥쳐온다. 경찰은 범인을 잡지 못했고 범인은 사쿠라를 죽인다. 말하자면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 영화엔 막을 수 있던 것에 대한 회의감이 팽배하다. '나'는 자신과의 약속이 없었다면 그날 살해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래서 그녀가 죽고 난 다음에 장례식에 가지 못한다. 한 달이 지나서야 겨우 그녀의 집에 조문을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흔적을 본다.

죽음 이후에 열린 공병문고. 마치 위기에 닥칠 때 열어보라는 주머니처럼 '나'의 위기를 극복하게 하는 도구가 된다. 그곳엔 그동안의 흔적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영화를 다시 보게 되면, 앞서 말했던 행운의 퇴화라는 것이 감정의 퇴화로 느껴진다. 더는 행운에 의존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다. 감정을 추스르면서 말이다.

췌장은 인체에서 흡수 및 성장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혈당 조절과 성장 호르몬의 분비. 동시에 가장 찾기 어려운 기관이다. 췌장이 병들면 더는 나아갈 수도, 머물러 있을 수도 없다. 그래서 그녀는 정체된 상태로 죽음 앞에 놓여 있다. 혹은, 일본은 정체된 상태로 죽음 앞에 놓여 있다. 심리학자 퀴블러 로스가 주장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처럼 보인다. 부인, 분노, 협상, 우울, 그리고 그 마지막에 있는 수용의 단계. 일본인들의 마음도 그러한 것일까. 답은 영화가 말해준다. 사쿠라. 봄. 4월. 새 시작.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포스터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포스터 ⓒ 미디어캐슬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선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영화 너의췌장을먹고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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