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저녁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 이승엽의 은퇴식에서 이승엽이 행사 중 감회에 젖어 눈물을 흘리고 있다

3일 저녁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 이승엽의 은퇴식에서 이승엽이 행사 중 감회에 젖어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의 모든 야구팬들이 사랑한 '국민타자'가 23년의 현역생활을 마무리했다.

삼성 라이온즈의 영원한 '라이언킹' 이승엽은 3일 대구삼성 라이온즈파크에서 열린 2017 타이어뱅크 KBO리그 넥센 히어로즈와의 정규리그 최종전이자 자신의 은퇴 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터트렸다. 이승엽은 은퇴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기록한 최초의 선수이자 은퇴 시즌에 시즌 20개 이상의 홈런을 때린 KBO리그 최초의 선수가 됐다.

사실 24홈런 87타점을 기록한 이승엽의 올 시즌 성적을 보면, 그가 왜 은퇴를 선택했는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야구팬들에게 수많은 기쁨과 감동을 안긴 이승엽은 자신의 은퇴 시기를 스스로 선택할 자격이 있다. 이제 내년부터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국민타자' 이승엽이 현역 시절 때려 낸 결정적인 홈런들을 돌아보자.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 삼성의 첫 KS우승을 이끈 동점 3점포

이승엽은 입단 3년 차였던 1997년 홈런왕과 정규리그 MVP를 차지하며 혜성처럼 등장해 1999년과 2001년까지 총 3차례나 홈런왕에 오르며 KBO리그 최고의 타자로 군림했다. 하지만 소속팀 삼성은 언제나 중위권을 맴돌며 기대만큼의 성적을 내지 못했고 2001년 생애 첫 한국시리즈에서는 두산 베어스와의 화력전에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따라서 2002년 한국시리즈에 나서는 이승엽의 각오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창단 후 한 번도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했던 삼성을 우승으로 이끈다면 진정한 '라이언킹'으로 인정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승엽의 마음과 같지 않았다. 이승엽은 LG트윈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 6차전 4번째 타석까지 20타수 2안타(타율 .100) 3타점으로 극심한 부진에 빠지고 말았다.

시리즈 전적 3승2패로 앞서 있던 삼성은 6차전 9회를 맞을 때까지 6-9로 뒤지며 패색이 짙었다. LG의 김성근 감독은 미국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야생마' 이상훈을 9회 마운드에 올렸다. 하지만 한,미,일 프로야구를 거치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이상훈도 한국시리즈 7차전을 목전에 둔 경기에서는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상훈은 선두타자 김재걸에게 2루타, 1사 후 틸슨 브리또에게 볼넷을 허용하며 1사 1,2루의 위기를 맞았다.

다음 타자는 한국시리즈에서 부진을 면치 못하던 이승엽이었고 이상훈은 당연히 정면승부를 걸어 왔다. 하지만 이승엽은 이상훈의 2구째를 잡아당겨 우축 담장을 넘기는 동점 3점 홈런을 터트렸다. 이후 마해영이 최원호로부터 끝내기 홈런을 터트리며 삼성은 창단 후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아무리 부진해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언제나 한 방을 쳐내는 이승엽의 해결사 기질이 본격적으로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2003년 아시아신기록] 왕정치의 기록을 넘은 대한민국의 '국민타자'

 3일 오후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열린 2017 타이어뱅크 프로야구 넥센 히어로즈와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 3회말 2사 상황에서 삼성 이승엽이 솔로 홈런을 치고 있다. 이승엽은 앞 타석에서도 2점 홈런을 기록해 연타석 홈런을 기록했다.

3일 오후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열린 2017 타이어뱅크 프로야구 넥센 히어로즈와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 3회말 2사 상황에서 삼성 이승엽이 솔로 홈런을 치고 있다. 이승엽은 앞 타석에서도 2점 홈런을 기록해 연타석 홈런을 기록했다. ⓒ 연합뉴스


지난 1992년 빙그레 이글스의 '연습생 신화' 장종훈이 한 시즌 41개의 홈런을 터트렸다. 장종훈을 제외한 역대 최다 홈런 기록이 1998년 김성한의 30개임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전인미답의 대기록을 세운 셈이다. 그리고 장종훈의 기록은 6년 후 OB 베어스의 '흑곰' 타이론 우즈에 의해 경신됐다. 당시만 해도 장종훈의 기록은 '불멸'로 여겨지고 있었기에 우즈가 보여준 충격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우즈의 파워에 감탄할 때 남몰래 우즈를 넘어서기 위해 칼을 갈던 선수가 있었다. 바로 우즈에게 홈런왕 자리를 빼앗긴 이승엽이었다. 이승엽은 1999년 54홈런을 치면서 우즈의 기록을 12개나 뛰어넘는 새로운 홈런 신기록을 작성했다. 언론들은 메이저리그와 일본 프로야구의 홈런 기록들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이승엽이 일본의 왕정치가 1964년에 세운 55홈런에 매우 근접하게 따라갔음을 알게 됐다.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꿈을 이룬 이승엽은 2003년 무서운 홈런페이스를 보이며 왕정치의 기록에 빠르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좋은 홈런왕 라이벌이 된 심정수의 존재도 이승엽의 홈런 행진에 큰 도움이 됐다. 결국 이승엽은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2003년 10월 2일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당시 25세였던 젊은 투수 이정민(지금은 그도 불혹을 앞둔 노장이 됐다)을 상대로 시즌 56호 홈런을 터트리며 아시아 신기록을 세웠다.

이승엽의 홈런 기록이 임박하던 시기 야구장에는 진풍경이 벌어지곤 했다. 관중 입장이 시작되면 응원석 대신 외야석에 먼저 관중이 들어찼고 그곳에는 응원용 막대풍선 대신 대형 잠자리채를 든 사람들이 보였다. 당시 이승엽은 단순히 삼성의 스타가 아닌 한국야구의 아이콘이자 자존심이었다. FA자격을 얻은 이승엽이 미국이 아닌 일본을 선택했을 때 야구팬들이 한 목소리로 커다란 아쉬움을 표현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예선 부진 씻어버린 일본전 결승 투런 홈런

'라이언킹', '국민타자', '승짱'. 이승엽을 표현하는 별명은 많지만 이승엽에게는 '합법적 병역 브로커'라는 조금 독특한 별명이 있다. 국제대회마다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군미필 동료 선수들에게 병역 혜택을 안겨 준다는 뜻이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만들어진 이승엽의 이 별명은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과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을 거쳐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절정을 이뤘다.

사실 이승엽은 베이징 올림픽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다. 한국은 예선 7경기에서 전승을 거뒀지만 4번타자로 나선 이승엽은 22타수 3안타(타율 .136)로 전혀 이름값을 하지 못했다. 이승엽은 2008년 8월 22일 일본과의 준결승에서도 첫 타석과 세 번째 타석에서 삼진을 당했고 두 번째 타석에서는 무사 1,3루라는 절호의 기회에서 병살로 물러났다. 해결사 역할을 해주긴커녕 한국 타선의 구멍 노릇을 한 셈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국민타자'는 2-2로 맞선 8회 1사1루에서 그 동안의 부진을 완전히 씻어버리는 결승 투런 홈런을 터트렸다. 맞는 순간엔 평범한 외야플라이 같았지만 타구는 계속 뻗어나갔고 결국 우측 담장을 넘기는 홈런이 됐다. 이후 한국은 전의를 상실한 일본에게 2점을 추가로 뽑아냈고 6-2로 승리하며 결승에 진출했다. 이대호(롯데)를 비롯한 14명의 병역 혜택이 확정된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승엽은 경기가 끝난 후 인터뷰에서 굵은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홈런으로 한국이 결승에 진출했다는 기쁨보다는 자신의 부진으로 동료들에게 폐를 끼쳤다는 미안함이 더 컸던 것이다. 그리고 이승엽은 쿠바와의 결승전에서 1회 결승 홈런을 터트리며 한국의 '퍼펙트 금메달'을 견인했다. 어쩌면 '국민타자' 이승엽의 진정한 가치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때린 626개의 홈런보다 야구를 대하는 진지한 자세와 동료를 생각하는 속 깊은 마음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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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리그 삼성 라이온즈 이승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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