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열> 관련 사진.

영화 <박열>은 항일영화로 분류하기 보단 인간애의 영화로 보는 게 타당하다. ⓒ 메가박스플러스엠


"나는 글을 쓰고 싶었다."

영화 <박열> 속 인물 중 하나인 가네코 후미코(최희서)의 대사다. 이는 그의 인생 목표이기도 하다. 1920~1930년대, 그러니까 제국주의의 광풍이 불던 일본의 국민으로 살면서 자기 자기 생각을 온전히 글로 표현하고 싶어 했던 사람. 그가 바로 박열의 영원한 동지이자 동반자다.

왜 이 여성부터 언급하냐고? 독립투사이자 아나키스트로 시대를 풍미했던 박열(이제훈)과 함께 이 여성이야말로 <박열> 속에서 가장 뜨거운 인물이자 진실한 삶을 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조력자이자, 보조 캐릭터로 쓰였을 법한 이 실존 인물을 이준익 감독은 성별을 뛰어넘어 자신의 존재 이유를 탐구한 인물로 그려 넣었다. 이 글은 후미코의 조명과 박열의 재조명을 반기는 심정으로 쓴다.

전형성을 경계하다

영화적으로 <박열>의 밀도는 상당히 높다. 초반부터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이 실존 인물임을 강조하며 각 장면과 사건마다 인물들이 던지는 말과 행동하는 방식에 현실성을 불어 넣었다. 필연적으로 대사의 비중도 높고, 감정선도 촘촘하다. 반대로 자칫 영화가 계몽적 혹은 교훈적이라는 느낌을 줄 여지도 분명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박열>은 관객에게 그 얼굴을 향하는 대신,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그리고 '불령사'로 칭해지는 아나키스트 단원 동지들을 주도면밀하게 묘사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일제 강점기 아래의 어둠 속에서 살아가던 청년들의 표정을 애써 가리거나 미화하지 않고 민낯으로 제시한다. 이 담백함이 <박열>이 지닌 첫 번째 장점이며, 이로 인해 영화가 빠질 수 있었던 계몽성의 함정을 피할 수 있었다.

13일 서울 동대문 메가박스에서 진행된 언론 시사회 자리에서 이준익 감독은 "적은 예산으로 최소한의 조건으로 찍어야 각 인물이 가진 진성성에 깊이 들어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30억 원이 안 되는 예산에 대한 물음이었지만 감독의 말에서 <박열>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영화 <박열> 관련 사진.

영화 <박열>에 등장하는 불령사 단원들의 모습. ⓒ 메가박스플러스엠


부모에게 버림받고 조선에서 식모살이한 일본인, 나라 잃은 슬픔을 가슴에 안고 자신을 스스로 '개새끼'라 칭하며 전복을 꿈꾼 한국인의 조합. 2017년 오늘, 부패한 권력을 합법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으로 뒤집은 우리 사회 보통 시민들에게 두근거리는 연대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 전복이 유쾌하다. 그간 여러 일제강점기를 다룬 영화들이 비장하고 진지했다면, <박열>은 한층 경쾌한 흐름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등장인물들이 무정부주의를 추구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청년들의 활기를 영화라는 이름으로 억누르지 않은 감독의 선택이 주효한 거로 보는 게 타당하다. 이쯤에서 이준익 감독의 말을 들어보자.

"일제강점기는 아직도 역사적으로 정리하지 못한 현실이다. 이걸 영화로 찍을 때 심각하고 진지해야 한다는 관습 또한 있다. 박열이라는 인물의 세계관에서 보면 일본 제국주의는 하찮은 것이라는 호기가 있었다. 그걸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실천한다. 천황을 죽이겠다고 선언하고, (자신을 대역죄로 몰아가는) 재판을 주도하려 한다. 여러 일제 강점기 영화가 독립군의 활약을 다루고, 우리 민족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근데 박열은 이성적으로 지적한다. 조선 특유의 해학과 익살로 접근하는 게 가장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이준익 감독)

잊지 말아야 할 이들

 영화 <박열> 관련 사진.

영화 <박열> 속 가네코 후미코. ⓒ 메가박스플러스엠


이준익 감독 말대로 영화는 바로 이 아나키스트들이 일본을 전복시키고 나아가 권력의 폐부를 유쾌하게 찌르는 데까지 간다. <박열>을 항일영화로 볼 수만은 없는 이유다. 여기에 더해 우리 스스로 가리거나 잊어왔던 보통 사람들의 위대함을 언급한다. 가네코 후미코를 통해선 이미 동양에 존재했던 위대한 페미니스트의 존재를, 박열이 형무소에 갇혔을 때 남몰래 그를 방문한 일본 문학가와 학생들을 통해선 일본 민중의 살아있는 양심을 조명한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건 폭력과 억압을 일삼는 부당한 권력이지 보통의 사람이 아님을 말하는 지점이다.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부끄럽지만 박열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고 고백한 이제훈처럼 우리 역시 박열에 대해 제대로 조명한 문화 콘텐츠를 갖고 있지 않다. 사실 아나키즘은 이준익 감독이 잘 다룰 수 있는 소재이기도 하다. 이미 17년 전 영화 <아나키스트>를 제작하지 않았나. 당시 참고했던 자료들과 이후 경험들이 분명 <박열>에 담겨 있다. 아나키스트들의 낭만과 본질을 이제훈 역시 잘 파악하고 있었다.

"박열에 깊이 빠지고 탐구해야 했다. 분명 그때와 지금 우리 삶이 차이가 클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기본은 자유와 평등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있기에 지금 내가 연기도 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갈망이 지금의 저와 맞닿아 있지 않나 생각한다. 박열을 연기할 때 그게 온전히 투영되길 바랐다. 이 작품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고, 이 시대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지 함께 생각했으면 좋겠다." (이제훈)

"사람들 사이에서 서서히 잊히게 하기 위해 무기징역을 받게 했다"던 일본인 검사를 향해 "그렇다면 오래 살아남아서 처절하게 하나씩 갚아주겠다"고 받아친 박열의 호기. 그 정신이 지금 대한민국을 이루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에 남아있지 않나. 부조리한 권력과 부당한 권력이 판치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박열>이 힌트를 던진다. 이 유쾌한 연대를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한 줄 평 : 항일영화의 문법을 넘어 새 지평을 열다
평점 : ★★★★(4/5)

영화 <박열> 관련 정보
감독 : 이준익
출연 : 이제훈, 최희서, 김인우, 권율, 민진웅 등
제작: 박열문화산업전문유한회사
배급: 메가박스(주)플러스엠
개봉일: 2017년 6월 28일
러닝타임: 1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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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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