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너의 힘을 빌어 세상을 바꾸고, 넌 나의 힘을 빌어 세상을 비추자꾸나."

창경궁 문정전에서 펼쳐진 야외 궁중극 <고종, 여명의 빛을 찾아서> 철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왕위에 오른 고종(역 김승현)
안동 김씨 권신을 척살하는 포졸(역 신동환)

▲ 창경궁 문정전에서 펼쳐진 야외 궁중극 <고종, 여명의 빛을 찾아서> 철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왕위에 오른 고종(역 김승현) 안동 김씨 권신을 척살하는 포졸(역 신동환) ⓒ 극단 <집현>


창경궁 문정전에서 울려퍼지는 철종의 부음으로 시작되는 극은 시간을 되돌려 역사의 격동기로 관객을 데려간다. 왕으로 즉위한 고종의 목을 감은 붉은 천은 권력의 다툼으로 앞으로 벌어질 피바람을 암시하기도 한다.

고종(역 김승현)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역 류재필)은 어린 아들이 임금 자리에 오르자 섭정으로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여, 세도정치의 본산인 안동 김씨 권신들을 척살하고, 서원 철폐, 경복궁의 중건 등 과감한 정책을 단행한다.

흥선대원군은 파벌로 득세하는 세상 없애고 못나든 잘나든 누구나 잘사는 나라 만들어 백성들의 신망 받는 임금이 될 것을 주문하며 또한 자주력을 갖출 때까지 쇄국을 명하고 이를 어길 시엔 가혹하게 참할 것이라 엄포를 놓는다.

"왕권을 찾으셔야 합니다.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순 없지 않습니까?"

창경궁 문정전에서 펼쳐진 야외 궁중극 <고종, 여명의 빛을 찾아서> 고종(역 김승현)에게 친정할 것을 설득하는 중전 민씨(역 이도우)

▲ 창경궁 문정전에서 펼쳐진 야외 궁중극 <고종, 여명의 빛을 찾아서> 고종(역 김승현)에게 친정할 것을 설득하는 중전 민씨(역 이도우) ⓒ 극단 <집현>


그러나 민심에 이반하는 개혁정책은 반발을 불러 일으키는 법, 고종을 앞세워 정치적 반전의 기회를 노리던 중전 민씨(역 이도우)는 유생들과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을 도성 밖으로 물러나게 하고 정권을 장악한다.

최익현은 "요즘 정치는 문란해지고 대신들은 부패하여 정론과 직언이 없다"면서 "조정은 오직 한 사람의 눈치와 비위만을 맞추고 있으니 대체 누가 나라를 이렇게 만들고 있습니까? 임금 위에 앉아 과장된 직분을 누리는 국태공 대원군이 아니십니까?"라고 흥선대원군을 향해 직격탄을 날린다.

견제세력이 없는 제왕적 절대권력은 독단과 전횡으로 흐르고 부패하기 쉬운 법. 우리는 현대의 민주공화국에 살면서도 흥선대원군의 섭정보다도 더한 국정농단의 참담한 현실을 온몸으로 절감하지 않았던가. 최익현의 상소문처럼 내치의 근본은 권력이 제 역할을 다하도록 위민법치의 근간을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민심을 외면하고 백성과 나누지 않는 권력은 한줌의 모래처럼 허약하다는 것을"
창경궁 문정전에서 펼쳐진 야외 궁중극 <고종, 여명의 빛을 찾아서> 청나라로 압송되어 가는 흥선대원군(역 류재필)

▲ 창경궁 문정전에서 펼쳐진 야외 궁중극 <고종, 여명의 빛을 찾아서> 청나라로 압송되어 가는 흥선대원군(역 류재필) ⓒ 극단 <집현>


섭정을 못하게 된 흥선대원군은 그 후에도 정계복귀를 노렸지만 정국의 주도권은 중전 민씨가 쥐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역모에도 연루되었으며 임오군란을 계기로 입궐하여 잠시 정권을 잡기도 하였지만 민비는 청을 끌어들여 대원군을 압송하게 만든다. 그는 정권을 다시 잡으려고 여러 세력과 결탁하면서 기회를 노렸지만 모두 실패하고 정치적으로 유폐되는 처지에 이른다.

이 극의 미덕은 권력을 둘러싼 주요 인물들의 첨예한 갈등만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물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야 양면이 있겠지만 이 극에선 실권을 잃고 칩거중인 대원군의 내면을 극중의 역할극을 통해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성찰하게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환각에 시달리는 대원군을 찾아오는 검은 옷의 사내들(역 문영동, 최태익)과 우중에 만난 중년의 거사(역 정의갑)와의 유희적인 만남은 대원군이 초심으로 돌아가 자신을 들여다 보는 역할을 한다. 그 질문은 권력에 대한 집착과 노욕에 빠져있지는 않았는지 스스로 반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저 또한 부강한 조선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창경궁 문정전에서 펼쳐진 야외 궁중극 <고종, 여명의 빛을 찾아서> 일본 낭인(역 신동환)에 의해 시해되는 명성황후

▲ 창경궁 문정전에서 펼쳐진 야외 궁중극 <고종, 여명의 빛을 찾아서> 일본 낭인(역 신동환)에 의해 시해되는 명성황후 ⓒ 극단 <집현>


흥선대원군만이 권력에 대한 집착을 보였을까. 민비(명성황후) 또한 흥선대원군과의 오랜 갈등과 임오군란으로 목숨마저 위협 받았던 일에 갑신정변으로 왕권이 위협받자 더욱 청나라를 가까이 하고 고종과 함께 모든 국정을 의논하며 권력을 더욱 강화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조선을 침탈하고자 했던 일본은 러시아를 이용하여 일본을 견제하고자 했던 명성황후를 그야말로 잔인무도한 난행으로 시해(을미사변)를 한다. 외세를 끌어들여서라도 권력을 지키기 위한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정치적 행보는 사실 별반 다름이 없어 보인다. 또한 힘의 우위에서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조선의 쇄국이나 급진적 개방과 개혁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 의지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을미사변 이후 흥선대원군은 또다시 정권을 잠시 잡지만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고 친러파가 대두하면서 그의 권력에 대한 욕망은 결국 노을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극에서는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회한 어린 대사로 비감과 희망이 교차하는 마지막 무대를 통해 국리민복보다는 권력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으로 국제 정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다가 망국의 비운을 맞게 되는 역사의 비극과 교훈을 당위적 진실로 전해준다.

"명을 다한 조선아 가거라, 새벽의 기운을 담은 새 조선아 일어나거라"
창경궁 문정전에서 펼쳐진 야외 궁중극 <고종, 여명의 빛을 찾아서> 을미사변 이후 조선의 앞날을 걱정하는 흥선대원군(역 류재필)과 고종(역 김승현)

▲ 창경궁 문정전에서 펼쳐진 야외 궁중극 <고종, 여명의 빛을 찾아서> 을미사변 이후 조선의 앞날을 걱정하는 흥선대원군(역 류재필)과 고종(역 김승현) ⓒ 극단 <집현>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을 맞아 창경궁 문정전에서 펼쳐진 야외 궁중극 <고종, 여명의 빛을 찾아서>는 종이나 징 등 전통 악기들을 직접 이용하는 음향효과에 전통에 바탕을 둔 상징적인 의상과 여백미의 무대 구성도 좋았고 모두 맨발로 등장하는 관록 있는 배우들의 호연도 있었지만 특히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원작을 과감하게 줄이고 속도감 있는 진행과 핵심 갈등의 전개를 통해 정극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재담 중심의 마당놀이와 같은 희극적 연희 요소의 차용 등 적절한 이완의 조율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무거운 역사적 비극의 재현만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함께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미래지향적인 희망의 서사로 재구성해 변주해 보이려는 시도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역사란 미래를 위해 과거와의 대화를 통해 현재적 의미를 묻는 것이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집착하는 욕망의 본질은 무엇일까? 겉으로는 국가와 백성을 위해 권력을 원한다고 하지만 그 것이 종국엔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우리가 함께 그 결말을 주시해야 할 질문이기도 하다. 신제국주의 열강의 위협과 정치적 갈등이 오늘날에도 상존하는 지금, 정통 사극을 주로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해 무대에 올려온 극단 <집현集賢>(대표 최경희)의 다음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극본: 김태수
연출: 이상희 
출연: 류재필, 최경희, 승의열, 문영동, 유학승, 권동렬, 정의갑, 석호진, 강성용, 김승현, 이도우, 최태익, 황윤희, 신동환, 이창훈, 임솔지, 김현주
공연: 창경궁 문정전, 5.3~5.6.

창경궁 문정전에서 펼쳐진 야외 궁중극 <고종, 여명의 빛을 찾아서> 커튼콜에 인사드리는 배우들

▲ 창경궁 문정전에서 펼쳐진 야외 궁중극 <고종, 여명의 빛을 찾아서> 커튼콜에 인사드리는 배우들 ⓒ 극단 <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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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리뷰어. 2013년 계간 <문학들>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명왕성 소녀>(2023), <물 위의 현>(2015), 캘리그래피에세이 <캘리그래피 논어>(2018), <캘리그래피 노자와 장자>, <사랑으로 왔으니 사랑으로 흘러가라>(2016)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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