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보라 립스타트는 홀로코스트에 대해 이야기하는 유명한 역사학자이다

데보라 립스타트는 홀로코스트에 대해 이야기하는 유명한 역사학자이다 ⓒ 티캐스트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증언하는 책을 읽고 영화를 봐도 알지 못하던 사실 하나가 있었다.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의 말이 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나는 증언의 책들과 영화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진실 여부를 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진실로 확정된 비극을 상세히 드러내고, 또 나치가 '얼마나 비인간적이었는지'를 알리기 위해서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비인간적인 면 때문에 홀로코스트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아이히만 쇼>는 1961년에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이히만 재판을 재현한 영화다. 실제 이 재판은 이스라엘 전역으로 생방송 되는데, 방송의 이유 중 하나가 '홀로코스트는 있었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였다. 영화에서 홀로코스트 피해자 여인은 아무도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아 상처에 상처를 덧입은 채 고립돼 살고 있었다. 후반부가 되어서야 비로소 여자의 말은 진실이 된다.

<아이히만 쇼>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장면 하나는 한 명의 나치주의자가 진실을 알리려는 주인공들을 죽이기 위해 악을 쓰는 모습이었다. 수류탄을 들고 주인공을 찾아온 나치주의자는 저지당해 끌려나가면서도 당당하기만 하다. 질질 끌려나가며 그가 외친 한 마디가 나치가 경례할 때 붙였던 구호인 '하일 히틀러'(히틀러 만세)였다. 이들에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통하는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 만세라는 걸까.

맹목적인 추종자는 좁은 골목에 서 있는 사람과 같다. 시야에 들어오는 좁쌀만 한 지식이 그들에겐 다른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래서 그들은 단단한 신념을 지닌 신앙자가 되어 그 지식을 신으로 모신다.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너른 들판에 서게 된다 해도 이들은 이미 신에 의해 눈이 먼 시각장애인이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에서 궁금한 게 하나 있다. 그런데 이들에게도 죄가 있는 걸까? 정말 그렇게 믿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고 말을 하는 것뿐인데도 그게 죄가 될까?

 감정을 배제하고 이기는 재판을 하는 변호팀

감정을 배제하고 이기는 재판을 하는 변호팀 ⓒ 티캐스트


거짓말 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한 <나는 부정한다>에서 데이빗 어빙(티모시 스폴)은 재야의 역사학자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홀로코스트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유대인 역사학자 데보라 립스타트(레이첼 와이즈)를 고소하면서 스스로 법정에 선다. 데보라가 책에서 어빙을 '증거를 왜곡한 히틀러 추종자'라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이제 데보라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영국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스스로 입증해내야만 한다. 즉, 홀로코스트가 있었다는 걸 증명해 내야만 한다. 역사적 진실을 법정에서, 그것도 한 명의 판사가 가려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영화 외적인 문제다. 영화는 사무 변호사 앤서니 줄리어스(앤드류 스캇)와 법정 변호사 리처드 램프턴(톰 윌킨슨)을 위시한 변호팀이 감정을 배제한 채 논리와 이성만으로 어빙의 허점을 공략해나가는 과정을 긴장감있게 그린다.

자기 자신이 원고이면서 변호까지 맡은 데이빗 어빙은 뻔뻔할 정도로 당당한 태도로 자신의 논리를 입증해나간다. 데이빗이 논리를 입증해나가는 방식은 치졸하지만 강력하다. 하나의 꼬투리를 잡은 뒤 전체 본질을 흐려놓는 것. 데이빗은 먼저 아우슈비츠 가스실에는 지붕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는 '가스실에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뜻이므로 '홀로코스트는 없었던 것'이라며 억지 논리를 편다. 이에 데보라의 변호팀이 해야 할 것은 '가스실에는 지붕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지만 이 역시 꼬투리를 잡힐 가능성이 크므로 쉽게 맞대결할 수도 없다.

결국 변호팀은 그들의 모든 역량을 데이빗 어빙이라는 사람에 집중한다. 그의 말은 신뢰할 수 없는 말이라는 걸 증명해 낸다면 승산이 있다. 변호 팀은 데이빗의 과거 말들을 파헤쳐 그 말들 속에서 반유대주의자의 모습을 끄집어낸다. 반유대주의자의 말을 신뢰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거의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결국 재판은 이 문제로 넘어가고 만다. 데이빗 어빙이 진짜 홀로코스트가 없었다고 믿고 있다면 그게 죄가 될까.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고 말했을 뿐인데 그게 죄일까.

마지막 재판에서 판사가 던진 질문이다. 이 질문 하나로 그동안 법정을 지배하던 논리는 희미해지고, 아무도 승리를 확신할 수 없게 된다. 이제 기다려야 할 건 위의 질문에 대한 판사의 판단. 답답한 시간이 흘러 판결이 내려지는 날.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짧고 강렬하게 그려진다. 판결문을 읽는 판사. 어빙은 의도적으로 진실을 왜곡한 것인가, 아니면 정말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은 것인가.

영화에서 판사는 의도적 왜곡이라고 결론을 낸다. 판사가 어떻게 어빙의 믿음이 진짜인지, 가까인지 알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 영화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지만(그래서 조금 맥이 빠졌다), 우리는 마지막 재판에서 변호사 리처드가 한 말로 판사가 하지 않은 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모든 정황이 '홀로코스트는 있었다'라고 가리키고 있을 때 혼자 '홀로코스트는 없었다'라고 말하는 건 의도가 들어갔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정황이 A를 가리키고 있을 때 홀로 B를 믿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모든 정황이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말하는데, 홀로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감옥에 계신 그분이 아무리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라고 스스로 믿는다 하여도 모든 정황이 '그 사람은 알고 있었다'라고 가리킨다면 그 사람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법정의 논리로 어빙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도.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황보름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나는 부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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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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