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연말에 홍보 문구에 끌려 산 책이 있다. 소설가들이 뽑은 올해의 책 1위라고 했다. 오호, 소설가들이 뽑은 책이라면 믿고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냉큼 주문했다. 오자마자 그날 밤에 읽기 시작했는데 응? 하는 기분이었다. 얇은 책이었음에도 반 정도 읽다가 내려놨다. 아무래도 내가 나중에 소설가가 되거나, (독서에도 이런 게 있다면) 독서 전문가가 된 뒤에 읽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알고 지내는 소설가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당장 전화해서 따져 묻고 싶기도 했다. "소설가들은 이걸 재미있다고 추천해준 거래요?" 하지만, 태어나서 만난 소설가라고는 단 한 명(사인받은 건 제외)뿐이 없는 나는 소설가들은 왜 이 소설을 좋아했을까 봐 혼자 추측해볼 수밖에 없었다. 추측의 결과는 어쩌면 '새로운 스타일' 때문 아닐까 싶었다. 아무래도 소설가들은 지금까지 나왔던 소설들의 스타일을 잘 알 것 아닌가. 그런데 그 소설은 정말이지 너무 스타일이 독특한 거라! 거기다가 내용 또한 소설가들이 딱 좋아하는 종이에 대한 것 아닌가.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

 루이는 12년 만에 처음으로 가족을 찾는다. 하지만….

루이는 12년 만에 처음으로 가족을 찾는다. 하지만…. ⓒ (주)엣나인필름


제69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단지 세상의 끝>을 볼 때도 세 번의 응? 과 그보다는 조금 더 자잘한 응? 들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먼저 루이로 분한 가스파르 울리엘(처음 본다)의 잘생긴 외모에 충격을 받고 응? 했고, 중간 즈음에는 영화가 무얼 말하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기에 응? 했으며, 영화가 끝났을 때는 이대로 끝나도 괜찮은 건가 하는 생각에 응? 했다. 하지만 때로 어떤 명작들은 시간을 두고 찬찬히 생각해야 '아!'하는 상쾌함을 주기 때문에 나는 조금 더 생각해보기로 했다. 조금 더 생각해보자 나는 또 막연히 '새로운 스타일' 때문 아닐까 싶었다.

심리적으로 얽히고설킨 관계의 최고봉이 가족이라고는 나도 생각해왔다. 수십 년을 함께 살아야 하는 부부 사이만큼 쉽게 헤어질 수 없는 가족관계도 자연의 섭리를 벗어나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자주 하곤 한다. 세상 누구보다 더 사랑하는 가족이지만 가족만큼 서로를 잘 모르는 사이도 없다. 가까이 있기에 더 이해할 수 없고, 내 삶에 미치는 영향일 크기에 더 많은 걸 바라게 된다.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바라기만 하기에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본연의 나'를 찾을 가능성은 터무니없이 낮다.

영화가 말하고자 한 바가 이런 것이었을 테다. '가족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다.' 여기에 덧붙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존재다'라는 걸 아주 작은 목소리로 전하고도 있지만, 이 작은 목소리는 영화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내뱉은 자기주장들로 인해 거의 묻힌다. 그래서 관객들은 '가족이라면 정말 지긋지긋하다'라는 감정을 안고 극장을 나서게 된다. 그래서 어느 영화평은 이렇게 신랄하다.

"루이가 집을 떠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루이는 12년 만에 처음으로 가족을 찾는다. 내가 곧 죽을 거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연을 끊다시피 발길을 뚝 끊었던 루이를 대하는 가족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가장 반기는 순서대로 하면 동생(레아 세이두)-엄마(나탈리 베이)-형수(마리옹 꼬띠아르)-형(뱅상 카셀)이다. 루이에게 가족들이 섭섭해하는 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아무리 제가 잘났기로서니 어떻게 가족을 이렇게 내팽개칠 수 있을까, 싶을 수도 있다.

역시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라서

 밥을 같이 먹는다고 가족일까.

밥을 같이 먹는다고 가족일까. ⓒ (주)엣나인필름


그래서 가족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보다는) 푼다. 형 앙투안은 애처럼 삐뚠 자세를 취하며 내내 화만 내고, 동생 쉬잔은 진한 화장과 무언가 바라는 표정으로 오빠 곁을 맴돌고, 엄마는 반갑게 반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못난 자식'들 생각에 '잘난 자식'인 루이에게 책임을 지우며, 형수는 무언가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에 겁을 집어먹은 사람처럼 그저 조심스럽게 말하고 행동한다.

한 판의 '감정 굿판'이 벌어지는 것처럼 집안에는 감정들이 넘쳐난다. 그리고 그 감정들은 모두 루이를 향한다. 루이는 그저 집에 들렀을 뿐인데 단 3시간 만에 땀에 젖고 눈의 초점을 잃으며 지치고 만다. 가족 중 그 누구도 루이의 말에 귀를 기울일 여유도, 생각도 없다. 루이는 결국 내가 곧 죽을 거라는 말도 하지 못한 채 지키지 못할 약속만을 늘어놓고 집을 떠난다.

서로 대화라는 걸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가족 이야기는 흔하다. 이처럼 과격하게 표현되지는 않지만, 가족이 소재로 채택된 영화에서 '소통 불가 테마'는 자연스러울 지경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만의 장점은 무엇일까. 역시 '새로운 스타일'일까. 영화가 끝나도 한동안 지워지지 않는 이미지가 루이와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앙투안의 이해할 수 없는 말과 그 말을 할 때의 얼굴이었다(정확히는 옆얼굴). 카메라는 루이에게 감정을 쏟아내는 앙투안의 얼굴을 불편할 정도로 가까이에서 흔들흔들 잡는다. 고개를 뒤로 물리고 싶을 정도로.

그런 적이 있었다. 상대가 말을 하면 할수록 대화는 점점 더 불가능해지고, '나는 누구, 여긴 어디' 같은 느낌이 든 적이. 내 눈에 보이는 건 상대의 말이 주위 공간을 떠다니며 의미 없이 흩어지는 것뿐이었다. 나는 상대를 바라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상대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럴 때일수록 상대의 존재는 미칠 듯이 내게 크게 느껴졌고, 이때의 내 감정은 끔찍했다. 카메라에 잡힌 앙투안을 보면서도 이런 감정이 들었는데, 영화를 보며 느낀 적이 없는 감정이긴 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황보름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단지 세상의 끝 자비에 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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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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