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차였어."

A가 전화를 걸어온 건 일요일 늦은 밤이었다. 그 시간만큼이나 뜬금이 없는 소식이었다. 그가 수줍게 연애를 시작했다고 고백한 것이 고작 2주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결별을 전하는 목소리에는 슬픔 보다는 황당함이 가득했다.

내가 자초지종을 묻자 A는 말했다. 아침에 눈을 뜨고 함께 외출에 나서기 전까지 A의 전 애인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반나절이 지나, 중간에 일정을 끊고 집으로 돌아간 그가 갑자기 메신저의 답변도 소홀해지고 연락도 잘 닿지 않게된 것이 아닌가. 결국 답답해진 A가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그는 이 연애를 너무 성급하게 시작한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말과 함께.

"미안해, 만나다 보니 넌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사람이었던 것 같아."

 Lady Gaga 'Million Reasons'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Lady Gaga 'Million Reasons'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 레이디 가가


더 이상 사랑의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주변에 연애를 하는 친구를 만나면 이런 고민을 들려주곤 한다. 막상 관계를 시작한 후, 그 사람이 내가 예상한던 것과 다른 사람일 때 어떻게 해야할까. 시간이 흘러 연인에게서 나를 사랑에 빠지도록 만들었던 그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 떠나야 할 이유도 없지만 남아 있어야 할 이유도 찾지 못할 때 말이다.

언젠가 가까운 선생님 한분이 명쾌한 결론을 내린 적이 있다. 그럼에도 함께할 이유가 있는지 일단 찾아보고, 그 다음에 결정할 것. 사실 A도 그랬다. 그도 점점 알게 된 전 애인이 상상하던 것과는 달랐지만 조금씩 그를 알아가며 기다리기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째서 맞은 편에 있던 사람은 그러지 않았을까.

그러던 와중에 떠오른 것이 레이디 가가의 노래 <Million Reasons>였다. 이 노래 속의 화자가 처한 상황이 언급한 지인들의 것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사실은 이 쪽이 더 안 좋다. 제목처럼 이 노래의 상황은 떠나야 할 이유가 백만가지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라는 것은 최악의 상황이 그저 나아 보이기 만을 바랄 뿐이고, 모든 가슴 아픔이 믿음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며, 숨을 멈출 때에도 완전히 깨어 있는 느낌이라니(이 말을 뒤집으면 두 상태의 차이가 없다는 뜻이 된다) 화자의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도 못할 수준이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노래의 결론이다. 화자가 결별을 선언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레이디 가가는 이렇게 노래한다.

"하지만 자기, 난 그저 당신 곁에 남을 하나의 좋은 이유가 필요해(But baby, I just need one good one to stay)"



돌아서지 못함의 의미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증>에서 산자가 죽은 자를 제대로 보내려면 그 사람에 대한 애착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망자에게 부착한 리비도를 회수하고 다른 대상에게 쏟아야 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명료한 정리이지만 무의식이 우리의 통제에서 떨어져 있는 만큼이나 이 일은 쉽지않다. 당장 하루하루 욱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다스리기도 어려운 와중에 길게는 수십년에 걸쳐 얽히고설킨 애정을 정리하는 것이 간단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여성학자 정희진의 말처럼 몸을 섞는 것보다 말을 섞는 것이 더 무서운 일이다. 그렇게 형성된 유대는 두 사람이 서로의 존재에 상포침투하고 감정적으로 강하게 연루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단절은 지옥같은 고통을 안겨줄 뿐이다. 그래서 좋은 것이라곤 하나도 남지 않은 관계에서 누군가는 말한다. 제발 남아 있을 이유를 하나만이라도 달라고.

물론 되지도 않는 관계에 매달리는게 진짜 사랑이라는 주장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더 이상 얻을 것이 상처 뿐이라면 그런 관계는 정리하는 것이 낫다. 그리고 개중에는 그 관계가 당사자에게 심각할 정도로 유해한 경우도 있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더 이상 누군가를 사랑할 이유를 찾지 못했음에도 주저하는 것, 그럼에도 함께할 이유를 찾아보려는 것 그리고 부디 남아 있을 이유를 하나라도 달라고 간절해 함이 의미하는 바다. 쉽게 돌아서지 못함은 어쩌면 그 사람이 자신이 맺은 관계를 어떤 것으로 여겼나를 알려주는 지표일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들 때쯤에야 나도 의아했던 A의 결별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사귀기로 한 것은 상호합의였지만, 연애를 하던건 오직 A 한쪽이었던 것이다. 호기심과 관심, 필요는 마음을 열고 애착을 전하는 것과는 명백히 다르다.

 Lady Gaga 'Million Reasons'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하지만 자기, 난 그저 당신 곁에 남을 하나의 좋은 이유가 필요해(But baby, I just need one good one to stay)" ⓒ 레이디 가가


적어도 당신은 존엄을 지켰다

책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에는 '경제적 인간'이라는 개념에 대한 비판이 등장한다. 시장 속의 이기적 개인인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결정을 내려 경제를 굴러가게 만드는 존재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 만들어진 인간이 사회의 다른 부분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랑, 결혼, 공동체 윤리와 같은 것에 말이다.

어쩌면 A의 전 애인이 내린 결정은 지극히 이성적인 것일 수 있다. 알고보니 A는 그가 원한 사람이 아니었다. 관계를 유지할 이유를 찾고자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성공 확률이 불투명한 모험에 가깝다. 그리고 정작 그 이유를 찾지 못했을 때, A를 손쉽게 버리지 못할 만큼 그와 관계가 깊어질 수도 있다. 그의 결정은 이익형량의 법칙을 적용했을 때 최선이었다. 경제적이고 효율적이다. 하지만 인간적인가?

어쩌면 답은 A의 말에서 찾을 수도 있겠다. 결별의 순간 그는 스스로가 반품이 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전 애인이 마치 '미안한데 생각보다 소음이 심하네요', '사진으로 볼 때보다 색상이 어두운데 이걸 쓸 순 없겠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사실 그의 경우보다 더 오래된 관계에서도 이런 일은 늘상 발생한다. 힘겹게 스스로를 낮추며 관계를 이어나갔지만, 어느 순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이별을 통보 받고 상대방이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서는 것을 보는 일. 나에게는 어려웠던 행동을 손쉽고 무던하게 해버리는 그를 보면, 어쩌면 박탈감이나 패배감이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식의 쿨한 이별이 가능함은 무엇을 뜻하는가. 어쩌면 그는 관계를 맺는게 아니라 소비를 하고 있었고, 사랑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효용이 다해서 단절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A에게도, 그보다 더 심각한 이별을 겪은 사람에게도 말하고 싶다. 적어도 당신은 스스로의 존엄은 지켰다.

레이디 가가 MILLION REASONS 이별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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