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일본 삿포로 마코마나이 실내 빙상장에서 열린 2017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쇼트트랙 여자 1000m 결승. 심석희(앞)와 최민정이 결승선을 향해 달리고 있다.

지난 22일 일본 삿포로 마코마나이 실내 빙상장에서 열린 2017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쇼트트랙 여자 1000m 결승. 심석희(앞)와 최민정이 결승선을 향해 달리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19일에 개막한 제8회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이 지난 26일 8일간의 일정을 모두 끝냈다. 한국은 목표로 잡았던 금메달 15개를 뛰어 넘어 16개의 금메달을 포함해 총 50개의 메달을 수확하며 개최국 일본에 이어 메달 순위 2위를 차지했다(물론 한,중,일,카자흐스탄 정도를 제외하면 아시아에서 동계스포츠를 적극적으로 하는 나라가 드물어 사실 메달 순위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피겨스케이팅의 최다빈은 동계아시안게임 역사상 최초로 여자 싱글 종목에서 금메달을 차지했고 스피드 스케이팅 '장거리 황제' 이승훈은 4관왕을 차지하며 대회 최다 금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노르웨이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김마그너스는 한국에는 낯선 종목이었던 크로스컨트리에서 최초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배추보이'로 유명해진 이상호는 스노보드 회전과 대회전에서 2관왕을 차지했다.

하지만 11개 종목 중에서 한국의 스포츠 팬들을 가장 편안하게 했던 종목은 역시 여자 쇼트트랙이었다. 여자 쇼트트랙은 이번 대회에 걸린 금메달 4개 중 3개를 휩쓸어 오는 압도적인 기량을 과시하며 세계 최강의 면모를 또 한번 뽐냈다. 돌이켜 보면 한국 여자쇼트트랙이 세계 정상으로 군림한 것은 1990년대 초반부터였다. 무려 25년 여의 시간 동안 꾸준히 최고의 선수들을 배출해 오며 세계 최강의 자리를 지켜온 것이다.

4번의 올림픽에서 금메달 9개 휩쓸다 2010년 무관

많은 사람들이 한국 여자 쇼트트랙의 초대 여왕을 전이경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한국 최초로 세계선수권대회 종합 우승을 차지한 선수는 전이경이 아닌 김소희였다. 90년대 한국 여자 쇼트트랙의 양대 산맥이자 전이경의 영원한 라이벌이었던 김소희는 1992년 덴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개인종합우승을 차지했고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서는 3000m 계주 금메달을 따냈다. 하지만 고질적인 허리부상으로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에 나가지 못하고 1997년 은퇴했다.

김소희가 부상과 불운 때문에 기량에 비해 크게 빛을 보지 못한 경우라면 전이경은 자신에게 온 기회를 멋지게 잡아내며 한국 동계스포츠의 전설이 됐다. 전이경은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서 1000m와 3000m 계주 금메달을 따냈고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도 같은 종목을 휩쓸며 한국 스포츠 사상 유일무이한 올림픽 2연속 2관왕의 주인공이 됐다.

김동성과 아폴로 안톤 오노의 악연으로 기억되는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에서는 목일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여중생 고기현이 신설된 1500m와 3000계주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쇼트트랙 여왕 계보를 이어갔다. 당시 스포츠 팬들은 이제 막 중학교를 졸업한 고기현이 최소 두 번의 올림픽에 더 출전할 수 있을 거란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한국 여자 쇼트트랙의 선수층은 사람들의 생각보다 훨씬 두꺼웠다. 고기현은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선발전을 통과하지 못했고 사람들의 기대는 2003,2004년 세계선수권대회 개인종합 우승을 차지한 최은경에게 쏠려 있었다. 하지만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1000m와 1500m, 3000m 계주의 금메달을 싹쓸이한 선수는 당시만 해도 국제대회 경험이 많지 않았던 광문고 2학년생 진선유였다.

진선유는 올림픽 이후에도 2006, 2007년 세계선수권 대회 개인종합 우승을 차지하며 세계 쇼트트랙 여제로 군림했다. 하지만 2008년 월드컵에서 중국 선수와의 몸싸움에 밀려 인대를 다쳤고 결국 밴쿠버 동계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했다. 한국 여자쇼트트랙은 밴쿠버 올림픽 개인전에서 은1개, 동2개를 따내는 데 그쳤고 3000m계주에서는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하고도 실격을 당하며 중국에게 금메달을 내주고 말았다.

한국 쇼트트랙 양대산맨 심석희와 최민정의 동반 2관왕

비록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16년 만에 노골드를 기록했지만 한국 여자쇼트트랙의 위상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한국은 4년 후 소치 올림픽에서 지금은 스피드 스케이팅으로 전향한 박승희와 진선유 이후 오랜만에 등장한 '괴물 여고생' 심석희를 앞세워 금메달 2개를 목에 걸었다. 특히 심석희는 한국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한 대회에서 금, 은, 동메달을 모두 따내는 기염을 토했다(남자 선수였다면 군면제 3회).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한국 여자쇼트트랙은 심석희가 독주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소치 올림픽이 끝난지 1년이 지난 2015년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1000m와 3000m 슈퍼파이널, 3000m 계주를 휩쓸며 종합우승을 차지한 또 한 명의 괴물 여고생이 등장한 것이다. 바로 심석희가 3년 동안 놓치지 않은 세계 빙상연맹(ISU) 쇼트트랙 월드컵 종합 우승 자리를 빼앗아간 최민정이 그 주인공이다.

한 살 터울의 심석희와 최민정은 전이경과 김소희를 잇는 한국 여자쇼트트랙의 양대산맥으로 우뚝 섰고 이번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에서도 사이 좋게 2개의 금메달을 나눠 걸며 완벽한 팀워크를 자랑했다. 175cm의 큰 신장을 자랑하는 심석희가 앞에서 끌고 폭발적인 순간스피드와 추월능력을 가진 최민정이 뒤에서 압박을 하니 상대 선수들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특히 두 선수는 막판 순위싸움을 위해 서로 경쟁하지 않고 금메달을 양보하는 '대인의 풍모'를 보이기도 했다.

한국 여자쇼트트랙의 계보는 심석희와 최민정에서 끊어지지 않는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계주 금메달을 딴 화정고의 김지유가 열심히 언니들의 뒤를 따르고 있고 국가대표 2진이 출전한 월드컵 6차대회에서 500m 금메달을 딴 평촌고의 김예진도 다크호스로 대기중이다. 특히 김예진은 한국이 상대적으로 취약하다고 평가 받는 500m에서 강세를 보여 미래가 더욱 기대되는 유망주다.

한국은 수영의 박태환이나 피겨의 김연아 같은 걸출한 스타를 보유해 왔지만 아직 이들의 뒤를 잇는 확실한 후계자들을 발굴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자 쇼트트랙에서는 적어도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소치올림픽이 끝나고 박승희와 조해리의 뒤를 심석희와 최민정이 이은 것처럼 분명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그들의 다음 세대가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목표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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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여자 쇼트트랙 심석희 최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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