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블랙리스트에 항의하기 위해 정부세종청사를 찾은 문화예술인들이 문화체육관광부 앞을 지나 행진하고 있다.

지난 11일 블랙리스트에 항의하기 위해 정부세종청사를 찾은 문화예술인들이 문화체육관광부 앞을 지나 행진하고 있다. ⓒ 성하훈


"청산의 대상자들이 주체가 된 사과는 받아들일 수 없다."

블랙리스트 문제와 관련해 문화체육관광부(아래 문체부)의 대국민 사과에 대한 예술인들의 반응이다. "문화예술인과 국민 여러분께 크나큰 고통과 실망, 좌절을 안겨드렸습니다"며 사과한 문화부에 대해 문화예술계는 냉담했다. 사과에 진정성이 없다는 것이다.

블랙리스트로 공정성 문제 야기 참담하고 부끄러워

죄송합니다 지난 23일 오후 정부세종청사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송수근 장관 직무대행 1차관(왼쪽) 등 간부들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사건에 대한 유감의 뜻과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기에 앞서 절하고 있다.

▲ 죄송합니다 지난 23일 오후 정부세종청사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송수근 장관 직무대행 1차관(왼쪽) 등 간부들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사건에 대한 유감의 뜻과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기에 앞서 절하고 있다. ⓒ 연합뉴스


앞서 문체부는 23일 오후 정부세종청사에서 송수근 장관 직무대행 및 실·국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했다. 조윤선 장관이 현직 장관으로서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구속된 후 국민과 문화예술인들 앞에 납작 엎드린 것이다.

이 자리에서 문체부를 대표해 자리에 선 송수근 장관 직무대행은 "예술 표현의 자유와 창의성을 지키는 보루가 되어야 할 문화부가 공공지원에서 배제되는 예술인 명단으로 인해 문화예술 지원의 공정성 문제를 야기한 것에 대하여 너무나 참담하고 부끄럽다"며 고개를 숙였다.

문화부가 이날 발표한 사과문에는 "특검 수사에 적극 협조하고 져야 할 책임을 감내하겠다"는 입장과 함께 문화 예술 다양성을 확대해 문화예술의 정책과 지원의 공정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문화 행정의 제반제도와 운영절차를 과감히 개선하겠다는 다짐도 덧붙였다.

구체적인 개선책으로 "부당한 축소 또는 폐지 논란이 있는 지원 사업 등 다시 검토하여 문제가 있는 부분은 바로잡겠다"고 했다. 또 "조속한 시일 내에 문화예술계의 의견을 수렴하여 이러한 내용을 포함한 문화행정의 공정성, 투명성을 확립하기 위한 추가적인 대책들을 관계 부처와 협의, 마련하여 발표하겠다"고 강조했다.

실무직원들이 소신 있게 일하고 부당한 간섭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장치와 함께 특검의 수사 및 재판, 감사원 감사 등의 절차가 종료되면 그동안 논란 경위와 과정, 구체적인 사례들을 역사적 기록으로 남겨 '반성의 거울'로 삼겠다고 밝혔다.

평창 올림픽 및 패럴림픽의 성공적인 개최, 외래 관광객 유치 및 수용태세 점검, 강화되는 중국의 한한령(限韓令) 문제에 따른 국내 문화예술 활성화 대책 등도 한 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추진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공범으로 추정되는 범법자의 사과 수용 못해

 지난 1월 11일 '블랙리스트 버스'를 타고 정부세종청사를 찾은 문화예술인들이 거리행진을 하며 항의시위를 벌이는 모습

지난 1월 11일 '블랙리스트 버스'를 타고 정부세종청사를 찾은 문화예술인들이 거리행진을 하며 항의시위를 벌이는 모습 ⓒ 성하훈


하지만 문체부 사과 직후 나온 문화예술인들의 반응은 영하로 떨어진 날씨만큼이나 쌀쌀했다. 제대로 된 반성이 아닌 형식적인 사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박근혜 퇴진과 시민정부 구성을 위한 예술행동위원회(아래 예술행동위)는 "사과 주체부터가 진정성을 훼손하고 있다"면서 문화부의 사과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우선 송수근 문화부 장관 직무대행의 자격 문제를 거론했다. 송 직무대행이 이번 블랙리스트 사태와 관련해 조사를 받고 책임을 져야 할 박근혜 정권 부역자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전·현직 장관들이 구속된 지금 공범자로 추정되는 범죄자의 사과를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 문화예술인들의 단호한 입장이었다.

또한 문체부의 사과가 진실보다는 면피를, 블랙리스트 사태를 직시하기보다는 앞으로의 문체부 조직을 지키기 위한 절차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철저하게 내부 조사를 진행하고 스스로 진상을 규명하고 관계자를 처벌하는 것"이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과의 진정성이 의심된다는 지적이다.

예술행동위는 문화부의 대책이 진정성을 가지려면 "문화부 외부의 전문가들, 현장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 제기자 등이 실질적으로 참여하고 권한을 가지는 (가칭)'문화부 블랙리스트 사태 진상 규명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운영하라고 요구했다.

이어 블랙리스트 사태를 비롯하여 박근혜 정권 국정농단 전반에 대한 충분한 조사와 검토 그리고 대책이 수립될 때까지 자체적인 사업을 전면적으로 중단하고 최소화하라는 조건도 제시했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문책 후 사과해야

 2016년 11월 독립영화인들이 시국선언을 통해 문화부역자 처벌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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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에 오른 영화인으로 예술 행동에 참여하고 있는 고영재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문체부 입장을 사과로 보기 힘들다"고 잘라 말했다. 고 이사장은 "사과를 하려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조사가 이뤄져서 진실을 규명하고 관련자들이 책임을 지는 게 선행돼야 하는 데, 문체부의 사과는 그 기본조차 안 돼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수사대상이자 척결대상인 사람이 스스로 물러나지 않고 직원들을 끌어들여 사과하는 것은 자리를 지키겠다는 것이라며 송수근 장관 직무대행에 대한 불신을 나타냈다. 이어 "자꾸 세월호 참사 때 박근혜가 청와대에서 했던 사과 기자회견이 떠오른다"며 "박근혜가 송수근으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비난했다.

문화예술계는 문체부의 사과를 진정성이 결여된 언론플레이로 평가했다. 엎드리는 시늉은 있었으나 진심이 느껴지기는 어려웠다는 게 공통된 목소리였다. 수많은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나 구체적인 재발방지책 등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는 점도, 이번 사과가 그저 '꼼수'가 아니냐는 비아냥을 키웠다.

영화계에서 세월호 다큐멘터리를 주로 배급했던 영화사 시네마달은 현재 폐업 직전 상황에 몰려 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적용된 결과라는 게 영화계 중론이다. 문체부는 정말로, 당장 사라질 위기에 처한 피해자에게 단순히 말로 사과한다고 그냥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책임의식이 결여된 이번 문체부의 사과는, 블랙리스트로 피해를 본 문화예술인들의 감정만 더욱 자극하는 모양새이다.

문화부 블랙리스트 대국민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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