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무도 모른다> 포스터

영화 <아무도 모른다> 포스터 ⓒ 동숭아트센터


이 영화는 처음부터 불안했다. '엄마는 정말 우릴 버린 걸까'라는 문구가 새겨진 영화 포스터는 극 중 주인공인 4명의 아이들에게 닥칠 비극을 예고했고, 그렇기에 나는 영화를 보면서 마치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처럼 아이들에게 닥쳐올 비극을 걱정하며 안절부절 못 했다. 앞으로 일어날 세상의 모든 일들이 적힌 예언 책을 가지고 있어서, 아이들에게 닥쳐올 비극에 대해 알고 있는데 하필 그들의 결말이 적힌 페이지가 물에 젖어서 결말을 알 수 없게 된 느낌, 이 느낌이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내가 느낀 기분이다. 나는 엄마가 아이들을 떠나는 그 순간부터 영화의 결말에 대해 생각했다. 엄마가 경찰서에 잡혀갈까? 아니면 아이들에게 다시 돌아올까? 그것도 아니면 아이들이 사회복지단체에서 생활하게 될까? 나는 최대한 불행하지 않은 쪽으로 결말을 생각했고, 부디 이 아이들의 결말이 너무 비극적이지 않길 바랐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의 결말은 비극이었다. 엄마는 아이들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잘 살고 있었고, 아이들은 수도와 전기가 모두 끊긴 집에서 엄마가 보낸 약간의 돈을 가지고 살아갔다. 이건 끔찍한 결말이다. 나는 영화의 결말부에선 아이들 인생의 변화가 있기를 바랐는데, 영화는 아이들이 어떤 어른의 도움과 사회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로 계속 살아가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나는 정말로 이런 결말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나는 이 결말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놀랐던 건 바로 이 지점이었다. 나는 이러한 결말을 영화를 보는 내내 원하지 않았는데, 정작 이렇게 영화가 끝났다는 사실이 좋았다. 나는 심지어 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거장으로 불리는 지에 대해서도 이해했다. 그 만큼 멋진 결말이었다.

이 영화의 결말은 관객을 울리지 않는다.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은 울리지 못한 것이 아니라 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차마 울지는 못하겠다는 느낌이, 아니 울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픈 영화를 볼 때면 어김없이 눈물을 터뜨리는 나였지만, 이 영화는 왠지 울면 안 될 것 같았다. 뭐랄까 우는 게 이 영화 속 주인공인 아이들에게 죄를 짓는 것 같이 느껴졌다. 자기만족을 위한 싸구려 동정심은 이 아이들의 삶과 어울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아이들은 울지 않았고 동정 받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엄마가 떠났을 때도, 엄마가 크리스마스까지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어겼을 때도, 다음 해 여름까지 돌아오지 않았을 때도, 막내 여동생이 죽었을 때도 울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울 수 없었고 동정할 수 없었다.

동정하지 않는 것, 이 영화의 미덕은 여기에 있다. 동시에 이 영화는 관객들이 순간적인 당혹감에 빠지도록 한다. 불쌍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언제든지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비극적인 삶을 동정할 준비가 되어있던 나는 영화가 비극적으로 끝남에도 비극적이지 않은 듯 구는 상황에 직면하고 당황했다. 비극적인 결말인데 마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와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이 영화의 엔딩 장면을 보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감독이 사회적 약자의 이야기를 듣는 방식에 감탄했다. 그는 단 한 순간도 아이들을 동정하지 않았고, 그러한 시선으로 영화를 만듦으로써 관객들조차 아이들을 동정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사회적 약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대부분의 영화들이 그들을 바라보는 태도와 차별되는 동시에, 우리 사회가 약자를 바라보는 태도와도 차별된다. 감독은 차별시킴으로 써 반성하도록 한다.

누군가를 동정하다는 것과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아프다는 것은 차이가 있다. 동정하는 것은 나 스스로를 우위에 둘 때 나오는 감정으로, 우리는 동정하는 대상과 결코 동등해 지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 장애가 있는 사람,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들을 동정하려고 한다. 그럼으로써 동등해지길 거부한다. 어떤 측면에서 동정이란 공감이 결여된 감정이다. 또한 동정은 오만한 감정이다. 동정은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고,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방식으로 그들을 바라볼 때 만들어 지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 부분을 예리하게 지적해 냈다. 그리고 우리에게 '동정하지 않음'의 미덕을 얘기한다. 그는 극중에서 단 한 번도 그런 대사를 사용하지 않지만, 그가 영화를 만들어 내는 방식은 그렇게 말한다. <아무도 모른다>는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왜 일본이 배출한 최고의 감독인지, 왜 칸이 그를 사랑하는지 확인시켜 주는 영화였다. 거장은 이 영화를 통해 사회적 약자의 이야기를 듣는 새롭고, 올바른 자세를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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