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스틸 이미지 및 포스터.

의사의 권유로 일을 쉬어야 했던 다니엘 블레이크. 하지만 수당을 받기 위해서는 구직 활동을 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펼쳐진다. ⓒ 영화사 진진


"나, 다니엘 블레이크. 나는 인간이지 개가 아닙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불친절한' 노장의 엔딩 크레디트는 짧았고, 급하게 불이 켜진 영화관의 구석 자리에서 큰 소리로 울고 있는 나를 조심스레 피해 퇴장하시던 아주머니는 '괜찮다'고 어깨를 토닥하며 지나가신다. 그 작은 위로에 멈추었던 눈물이 또다시 쏟아진다.

올봄, 칸의 선택은 여든이 넘은 노장 감독 켄 로치의 복귀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였다. 감독의 관심은 항상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한 사람에게 향해 있었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그의 메시지를 담은 장편 영화를 제작하는 것은 항상 고된 노동이었다. 제대로 된 지원을 기대하지 못한 채 영화를 찍던 로치는, 아일랜드 독립영웅에 대한 이야기인 <지미스 홀>(2014)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하지만, 그를 다시 영화계로 불러낸 것은 우리 평범한 이웃을 닮은 '다니엘 블레이크'였다.

현실이 된 의심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스틸 이미지 및 포스터.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모두가 믿고 싶었던 사회적 안전망이 실은 불충분하다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 영화사 진진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은, <트레인스포팅>의 젊음으로 상징되는 영화감독 대니 보일의 감각적인 연출로 호평을 받았었다. 하지만, 문화 강국인 영국의 다양한 콘텐츠들 사이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그들의 건강관리시스템인 NHS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유럽의 여러 '복지국가'들 중에서 다소 뒤떨어진 사회보장 시스템을 가진 영국이다. 하지만 그들이 '민영화'의 광풍 속에서도 지켜낸 무상의료 시스템에 대한 퍼포먼스는, 어딘가 '이것만은 꼭 지킨다'고 웅변하는 것 같았다.

'완벽하게 갖춰지지 않은' 영국의 복지가, 지금을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에겐 다가서기 힘든 '혜택'일 수 있다는 불안감의 '또 다른 표현'이 이 영화이다. 오늘 만난 다니엘 할아버지와 아이 둘을 키우는 미혼모 케이티의 고난을 살펴보니, 의심은 현실이 된다.

평생을 목수로 살아온 인정 많은 할아버지 '댄' (다니엘 블레이크)은 지병인 심장병으로 '일을 쉬어야 한다'는 주치의의 진단을 받는다. 어쩔 수 없이 '질병 수당'을 신청하지만 석연치 않은 이유로 탈락한 후, '실업수당'을 받고자 하나 '구직활동'을 계속하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는다. 일을 할 수 없는데 일을 구해야 한다니, 모순이다. 규정을 들어 그를 몰아세우는 광경은 코미디의 한 장면처럼 폭소를 불러오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설명하려면 복잡하지만, 미안하오. 의사가 일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실업수당을 받으려면 구직활동을 해야 한다고 하는구려."

구직활동을 위해 보냈던 이력서를 보고 연락을 해 온 목공소의 사장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어쩔 줄 모르는 그의 모습이 안쓰럽다. 호의를 갖고 그가 보낸 이력서를 정성스럽게 읽어준 사장에게 미안해하는 그. 그 모습을 보는 내가 다 안절부절못하다. 그의 수당 신청을 거부한 공무원도, 그에게 '자신의 시간을 허비하게 했다'며 호통을 치는 사장도, 규정을 들어 그를 내쫓던 사람들도 모두 나의 모습인 듯하여, 미안하다.

가난을 증명해야 하는 사회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스틸 이미지 및 포스터.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통해 켄 로치 감독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명확하다. ⓒ 영화사 진진


몇 년 전, 우리는 아이들 밥 먹이는 문제를 논의하며, '가난을 증명하라'고 그들을 협박했다. 그 아이들이 '부모'와 '가족'을 선택이라도 한 것처럼, 우리 사회는 '가난한 부모'를 증명하면 '밥을 주겠다'며 그들을 몰아세웠다. 게다가, 그런 논쟁의 와중에 현 집권당의 국회의원이라는 자는 '어릴 때 그런 고난도 견디지 못하면서, 어찌 훌륭한 어른이 되겠나?'하는 궤변을 '당당하게' 내뱉기도 했다. 우리가 살아온 세상이 언제부터 이렇게 냉정하고 잔인했는가? 아이들에게 '평등'하게 밥도 못 먹이는 나라에서, '평등한 대한민국'을 가르치는 것이 '힘'을 가질 수 있겠는가?

아이들에게 '밥' 한 끼 주는 것에도 인색한 우리는, 여전히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문제도 해결해 주지 못했다. 깔창 생리대 문제가 나왔을 땐 미처 알아채지도 못했던 관심의 사각지대가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가난을 짊어지고 일가족이 자살을 선택할 때에도, 컵라면 한 개를 싸 들고 지하철의 스크린 도어를 고치다 사고를 당할 때도, 나의 일이 아니고 가족의 일이 아니라며 외면했다. 그저 '좋은 운'에 기댄 채, 아픔이 나를 피해 가는 것만 기대하며 말이다. 세상을 더 좋게 바꾸는 것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느꼈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으로 우리를 밀어 넣었다. '아픔'을 애써 외면하며 얻어낸 '위장된 평화'를, 힘들게 지켜내면서….

"우리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어야 한다. 다른 세상이 가능하고, 필요하다고 말해야 한다."

칸의 황금 종려를 손에 들고 평생을 '좌파'로 살아온 여든의 켄 로치는 세상을 향해 외쳤다. 이 세상이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얘기해야 한다고. 그는 '제도'의 폭력 앞에, 인간의 존엄을 지켜내고 싶었던 소시민 '다니엘 블레이크'를 통해 우리의 각성을 촉구한다. 이웃이 힘들 땐 돌봐주고 도와주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는 당연한 얘기를 하는데, 자꾸만 눈물이 난다.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면, 결국 우리도 '개-돼지'로 살게 될 것이라는 그의 말에 지금의 내 삶이 겹치니, 부끄럽다.

지난 한 달 넘는 시간 동안, 주말의 광장에서 백만분의 하나, 이백만분의 하나로 서 있던 내게 가장 큰 선물은 '위로'였다. 그동안 주변의 아픔을 외면하며 살아왔던 날들로 쌓여왔던 '미안함'에 대한, 우리끼리의 따스한 '위로'. 이는 우리가 누구보다 위대하기에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위에 있지도 아래에 있지도 않은, '우리, 하나의 시민'이기에 나눌 수 있고 건넬 수 있던, 진심 어린 '위로'였다. 광장에 자리를 펴고 앉은 우리는, 다니엘 할아버지를 도와줄 수도, 미혼모 케이티의 힘든 상황을 보살펴 줄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정말, 기분 좋다!

"우리에겐 기대어 쉴 바람이 필요하오. 인간이 자존심을 잃는다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오."

우리 위에서 군림한다고 착각했던 그들에겐, 우리에게 '인간됨'을 버리라고 강요할 권리가 없다. 게다가, 우리는 그들의 강요에 굴종하며 자신의 삶을 버릴 필요도,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며 미안해할 이유도 없다. 우리가, 우리의 '기대어 쉴 바람'이 되어주자. 우리, 같이 살자.

로치 할아버지, 맞죠? 고마워요, 다니엘 블레이크.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스틸 이미지 및 포스터.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포스터. 복지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이다. ⓒ 영화사 진진



오늘날의 영화읽기 나, 다니엘 블레이크 위로 켄 로치 깐느 황금종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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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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