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평상 신인여우상을 수상한 정하담의 <스틸 플라워>.

영평상 신인여우상을 수상한 정하담의 <스틸 플라워>. ⓒ (주)인디스토리


올해로 36회를 맞은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아래 영평상). 그 중 감독상을 수상한 여성 감독은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임순례 감독이 유일하다. 1980년부터 시작해 영화평론가 집단이 수여하며 권위를 인정받아 왔지만, 감독상을 수상한 여성 감독이 임 감독뿐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간 한국영화계에서 여성감독의 입지가 현실적으로 얼마나 협소한지, 아니 척박함 그 자체인지를 증명하는 한 장면이라 할 수 있다(주요 스태프의 비율이나 현실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신인감독상의 경우 3명으로 늘어난다(영평상은 1989년 제9회부터 신인감독상을 독립적으로 시상해 왔다). 역대 영평상 신인감독상 수상 여성감독은 19회(1999년) <미술관 옆 동물원>의 이정향 감독을 필두로 25회(2005) <오로라 공주>의 방은진 감독, 32회(2012년) <밍크코트>의 신아가 감독(이상철 감독과 공동연출)이 전부다. 3명이란 숫자 역시 오십 보 백 보라 할 만하다. 영화적인 권위를 강조해온 영평상의 수상 리스트가 이렇다면, 여타 영화상의 경우도 대동소이하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

그리고, 24일 2016년 영평상 수상작(자) 명단이 발표됐다. 환영할 만한 소식이 전해졌다. 두 여성 감독이 나란히 감독상과 신인감독상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비밀은 없다>의 이경미 감독이 감독상, <우리들>의 윤가은 감독은 신인감독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여자연기상을 거머쥔 <비밀은 없다>, <덕혜옹주>의 손예진, <스틸 플라워>로 주목 받은 정하담의 신인여우상 선정 소식도 반갑다.

이번 영평상을 수상한 여성영화인들, 현장 스태프를 포함한 여성영화인들은 물론 여성 관객들 역시 한국사회, 영화계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투쟁을 벌이는 중일지 모른다. 관객들 역시, 작년부터 불어온 페미니즘 열풍과 올해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전후로 높아진 '여성혐오 반대' 운동의 영향 속에서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아 낸 작품들에 관심을 보내는 중이다.

최근 SNS 상에서 불거진 문화예술계를 포함한 각계 전반의 성폭력·성추행 폭로들 역시 이러한 분위기의 자장을 반영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꼽아 봤다. 스크린 밖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는, 올해 개봉한 국내외 작품들 중 특히 두드러지게 '투쟁하는 여성들'을 그린 국내외 작품들을. 사회와, 가족과, 자기 스스로와 싸워 나가는 스크린 속 여성들이 여기 있다. 한국영화에서도 '그녀'들을 더 많이 만나길 고대한다.

[서프러제트] 여성 참정권 투쟁의 어제와 오늘

 영화 <서프러제트>의 포스터.

영화 <서프러제트>의 포스터. ⓒ UPI 코리아


1912년, 산업혁명의 도시 영국 런던은 여성 참정권 투쟁의 열기로 뜨거웠다. "여성이 투표할 경우 사회 근간이 흔들린다"거나 "여성은 감정이 약하고, 균형 감각이 없어서 정치적인 판단을 잘 못한다"는 의식이 팽배했을 시절이다. 영화는 별다른 정치적 의식 없이 살아가던 아내이자 엄마, 세탁 공장 노동자인 모드(캐리 멀리건 분)가 참정권 운동에 뛰어들게 되는 사연과 각성 과정, 투쟁의 궤적을 통해 당시 시대상과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와 필요성을 되짚는다.

중반부 등장하는 여성사회정치연합(WSPU)의 리더였던 실존인물 멀린 팽크허스트(메릴 스트립 분)의 연설 장면과 같이, <서프러제트>는 직설화법의 영화다. 무력 투쟁을 포함, 모드가 왜 민주투사로 거듭날 수밖에 없는가, 페미니즘 투쟁은 어떻게 발화됐는가를 이 시대 관객들에게 공감시키기 위한 서사로 자연스레 진행되기 때문이다. 무리 없고, 이성적이며, 또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진짜 가슴 아픈 지점은 우리의 과거다. 영화의 말미, 사라 개브론 감독은 과거 여성운동 관련 흑백 사진들과 함께 여성 참정권 운동에서 승리를 쟁취한 국가들을 나열한다. 2015년 사우디아라비아까지, 20세기를 넘어 현재까지 오대륙 전 세계 국가 여성들의 투쟁의 역사들이 그 자막 위로 겹쳐진다.

거기에, 대한민국은 없다. 임시정부의 임시헌장에 명시된 평등권을 바탕으로 여권이 신장됐었다고는 하나, 1948년 헌법 제정을 통해 '외부로부터 주어진' 참정권이라는 해석이 강하다. '투쟁'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절실함이 덜했기에 남녀평등에 관한 사회전반의 의식이 전근대적이었다는 얘기다. 여러모로 <서프러제트>는 좋은 교과서다. 

[백엔의 사랑] "꼭 이기고 싶었다고..." 

 영화 <백엔의 사랑>의 스틸컷. 주연배우 안도 사쿠라.

영화 <백엔의 사랑>의 스틸컷. 주연배우 안도 사쿠라. ⓒ 씨네룩스


이치코(안도 사쿠라 분)는 '그냥' 백수다. 아니, '진짜' 민폐 형 백수다. 서른 두 살이나 먹었지만, 변변한 직장에 다니기는커녕 식당을 운영하는 어머니에게 폭언을 일삼을 만큼 철이 없다. 스스로도 그런 자신이 썩 달가워 보이진 않는다. 그러다 이혼 후 집에서 함께 살게된 동생과 말 그대로 머리채까지 잡고 대판 싸운다. 어머니의 도움으로 독립까지 하게 된 이치코는 '알바'와 함께 우연하게 복싱을 시작한다.

흔한 복싱영화라 보면 곤란하다.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일본의 'N포 세대'를 위한 응원가로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 일본 내에서 그 작품성을 인정받고, 전세계 12개 영화제에서 작품상 등 21개 부문 수상한 <백엔의 사랑>은 그저 인생살이에 서툰 사람들을 잔잔하고 담담하게 위무하고자 한다. 주인공 이치코를 비롯해 잘 안 풀리(는 것처럼 보이는)는 평범한 인생들의 순간을 포착하려 한다. 게다가 이치코는 은연중에라도 '여성성'을 강요받는다. 역시나 그 순간들엔 스스로의 한계를 모르는 바 아니면서도 무언가 이뤄보고자 하는 노력이 포함돼 있지 않은가.

언제나 감동적인 순간은 마지막에 찾아온다. 몇 달을 노력했지만, 결국 링 위에서 패배한 이치코는 경기 직후 애인과도 같은 카노(아라이 히로후미 분) 앞에서 기어코 눈물을 쏟아 낸다. "이기고 싶었다고,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이기고 싶었다고." 반면 그저 밥이나 먹으러 가자는 카노의 행동처럼, 일본 특유의 섬세한 정서가 살아있는 이 작품은 이치코의 이 진심에서 우러나는 눈물에 '방점'을 찍는다. 이치코가 꼭 여성일 필요가 없을 것도 같지만, 오히려 여성이라 더 공감 가고 유의미한  그런 눈물에.

[비밀은 없다] 독보적인 여성 캐릭터

 영화 <비밀은 없다>의 스틸컷.

영화 <비밀은 없다>의 스틸컷. ⓒ CJ엔터테인먼트


중학생 딸이 사라졌다. 엄마이자 선거를 앞두고 바쁜 정치인 종찬(김주혁 분)의 아내 연홍(손예진 분)은 눈이 뒤집혔다. 연홍은 유세를 돕는 한편, 단서와 관련 인물들을 하나하나 직접 찾아다니며 딸의 행방을 쫓는다. 대략 여기까지 알릴 수밖에 없는 <비밀은 없다>의 '태그라인' 덕분인지, 개봉 전까지 이 영화는 정치스릴러의 인상을 풍길 수밖에 없었고 마케팅 포인트 역시 꽤나 애매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데뷔작 <미쓰 홍당무>에서 예측불허이자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창조한 바 있는 이경미 감독은 또 하나의 독보적인 캐릭터를 관객들에게 선물했다. 딸을 찾아 헤매며 결국 추악한 진실에 맞닥뜨리는 연홍은 시종일관 불안하고, 윽박지르다, 아파하고, 허탈해하다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진면목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하여 연홍이 내리는 결단은 <친절한 금자씨>의 복수와 비견할 만하다. '올해의 페미니즘' 영화로 손꼽히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

영평상이 인정한 손예진의 연홍 캐릭터도 독보적이지만, 그의 딸과 딸의 단짝 친구, 딸의 선생님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여성 캐릭터들도 여느 한국영화와 비교해도 각자의 입장과 설득력으로 가득하다. 여성감독이라 가능한 섬세함이라고 할까. 이경미 감독은 남성성이 과하게 주입된 주류 한국영화의 분위기 속에서 획일성을 거부한 서사와 캐릭터, 연출력을 선보이며 소포모어 징크스를 부셔버린 좋은 예로 남게 됐다.

[고스트 버스터즈] 유령과, 편견과, 남자와 싸워라

 영화 <고스트 버스터즈>의 스틸컷.

영화 <고스트 버스터즈>의 스틸컷. ⓒ 컬럼비아픽처스


그리고, 현재까지 '단(체)관(람)'이 이어지고 있는 <고스트 버스터즈>. 1984년과 1편 개봉 이후 5년 뒤 개봉한 2편까지, 1980년대를 대표하는 유쾌발랄한 유령퇴치 소동극을 '여성 버전'으로 재탄생시킨 제작진의 용단에 박수를. 성역할을 전도시키면서, 그러니까 소위 '미러링' 전략으로도 충분히 즐길만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사례를 만들었다. 전 세계 흥행 면에서도 그리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뒀다고 할 수 있다.

초자연 현상 전문가, 물리학 박사, 무기 개발자 등 이 여성 4인조는 그리하여 유령과, 남자들과, 세상의 편견과 싸운다. 장르적 속성을 크게 이탈하지 않으면서 그러한 '의미'들을 무리 없이 녹여 냈다. 영화 밖에선 원작의 아우라, 다시 말해 남성적 관점에 찌든 블록버스터 취향 관객들의 편견과 싸웠다.

전작 <스파이>로 전복적인 '여성' 스파이코미디 영화를 성공시켰던 감독 폴 페그먼과 배우 멜리사 맥카시 '짝패'는 여성 캐릭터와 여성 배우에게 박한 환경을 유쾌하고 발랄하게 이겨냈다. 특히나 차기작 역시 동료들과 함께 여성 캐릭터의 향연을 펼칠 것으로 예상되는 멜리사 맥카시의 눈부신 행보에 박수를.

비밀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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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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