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최악의 하루>의 김종관 감독이 24일 오후 서울 통의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화 <최악의 하루>의 김종관 감독. 인터뷰는 그의 자택 인근인 서촌의 한 카페에서 진행됐다. ⓒ 이정민


영화나 TV로 접한 남녀의 사랑이야기는 8할이 가슴 절절한 아픔과 누군가의 오열을 동반하곤 했다. 물론 이것도 사랑의 속성이지만 잔잔한 파동 역시 파동이다. 은근하게 다가오거나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건드리는 이들 역시 사랑하고 있다고 말한다.

김종관 감독이 6년 만에 내보인 신작 <최악의 하루>는 후자에 속한 영화다. 단 하루 동안에 서울 서촌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한 여자와 그를 둘러싼 세 남자의 이야기를 그렸다. 흔히 말하는 썸을 타는 두 남자와 우연히 만나게 된 한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이와세 료)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한 여자에게 다가간다. 

사랑, 자세히 들여다보기

영화는 남녀의 호감이라는 감정과 사랑이라는 감정에 현미경을 들이댔다. 가령 이런 식이다. 배우 지망생 은희(한예리 분)는 현 남자친구 현오(권율 분)를 만날 때와 구 남자친구이자 돌싱남 운철(이희준 분)을 만날 때가 서로 다르다. 작은 거짓말도 천연덕스럽게 내뱉는 은희는 현오를 만날 땐 풋풋한 20대의 사랑을, 운철을 만날 땐 보다 농익은 사랑의 속성을 보인다. 오히려 연인 관계가 아닌 료헤이를 만날 때 비로소 정직한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낸다.

감정의 격차는 크지 않지만 각자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는 모습이 어쩐지 귀여우면서도 짠하다. 서촌과 남산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이런 '의외의 미'를 찾아내는 게 바로 김종관 감독의 장점 아니던가. 마치 그가 발표해왔던 <폴라로이드 작동법>(2004), <침묵의 대화>(2006) 등의 여러 단편들처럼.

 영화 <최악의 하루>는 한예리가 주연이다.

영화 <최악의 하루>는 은희(한예리 분)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일종의 소동극이다. ⓒ CGV아트하우스


"영화에 몇 가지 키워드가 있다. 그 중 하나가 관계. 사람들은 저마다 관계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고 봤다. 영화에선 세 남자에 따라 타입을 달리하는 여성을 설정한 거다. 어떤 관계에선 나쁜 성격을 보이고, 또 어떤 관계에선 좋은 모습만 보이는 식이다. 여기에 거짓말 하는 여자의 이야기가 들어가면서 진실과 거짓에 대한 생각도 함께 하길 원했다. <최악의 하루>를 캐릭터 코미디라고 생각한다. 다른 작품을 보면 종종 캐릭터를 과장시키는데 난 현실성에 착안했다. 현실적인 캐릭터는 (홍상수 감독 등의) 특정 작가주의 작품에서만 볼 수 있었는데 관계에 따라 성격을 달리하는 건 사실 보편적 특징이라고 본다."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회심의 일격이 담겨있었다. 상업성이 떨어진다며 한 구석에 치워두곤 했던 여러 작가주의 영화에서 우린 종종 삶에 대한 반짝거리는 통찰을 발견할 때마다 전율하지 않았는가. 김종관 감독은 "전혀 로맨틱해 보이지 않는 연애에서 자기모순을 깨달을 수도 있다"며 "이 영화를 현실감 있게 받아들이면서 관객 분들이 어떤 부분에선 위로도 받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관계의 충돌을 재치 있게

모든 과정이 1년 안에 이뤄진, 비교적 단시간에 마무리된 작품이지만 발상부터 따지면 그렇지 않다. 6년 전부터 서촌에 이사와 살고 있는 김종관 감독은 동네 골목 곳곳을 거닐다 떠오르는 생각과 이미지를 정리해왔다. 그 사이 여러 기획들이 엎어지거나 미뤄졌다. 감독 입장에서 아쉬울 수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최악의 하루>가 탄생했다. 어쩌면 이 영화는 서서히 낯선 공간을 탐색하고 자신을 바라본 감독 자신의 내면 고백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루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지만 인생의 어떤 부분이 보일 거라 생각했다. 은희만 따라가도 재밌다. 경쾌한 분위기가 있지만 또 다르게 보면 여러 겹의 이야기가 있고, 은유가 있길 원했다. 원래 원제는 <최악의 여자>(영화의 영어제목은 'Worst Woman'이다-기자 주)였다. 나름 반어적이라고 생각했거든, 진짜 최악은 남자일 수도 있었고. 근데 마케팅 회의 과정에서 최악과 여자가 붙는 건 부정적이라는 의견이 있어서 지금의 제목이 나왔다.

현오를 보면 치기어리고 이기적이지만 귀엽다. 운철은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포장하려 한다. 은희는 이들과 만나며 서로에게 다른 모습을 보인다. 사실 연애가 아니더라도 직장에서든 그러지 않나. (배경음악을 재즈 장르로 한 이유도) 일종의 패턴이 있고 리듬이 있는 영화라고 생각해서다. 사람들 간 관계 충돌이 극악하게 흐를 수도 있고 위협적으로 갈 수도 있다. 아찔한 현실과 닮았지만 그것 자체로 위트로 보고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이길 원했다."

 영화 <최악의 하루>의 김종관 감독이 24일 오후 서울 통의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소소한 작가주의를 표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범죄, 느와르, 판타지 등 김종관 감독이 관심을 두고 있는 장르는 다양했다. ⓒ 이정민


출연 배우들 역시 다양한 관계에서 갈등하는 캐릭터를 밉지 않게 소화할 수 있어야 했다. 한예리와 이와세 료 모두 감독의 최선이었다. 상대마다 태도를 달리하는 은희 역이 진중해 보이는 한예리와 만났을 때 나오는 느낌이 독특하다. 나름의 복안이었다. 이와세 료는 그의 출연작 <한 여름의 판타지아>를 인상 깊게 본 김종관 감독이 직접 만나 출연이 성사됐다. "<한 여름의 판타지아>에선 고 도시에 머무는 여행객 역할이었는데 그가 한국에 와서 여행하는 캐릭터를 맡으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고 김종관 감독이 덧붙였다.

직유가 아닌 은유로

돌아보면 김종관 감독 전작의 상당수가 사랑에 맞닿아 있다. 수줍은 소녀였든 원숙한 여성이었든 그를 만나면 생동감 있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입체적 캐릭터로 태어났다. 정유미, 권다현 등 김종관 감독의 손에서 매력을 뽐낸 여배우들이 많다. 가히 사랑 영화의 연금술사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연애는 일종의 (영화적) 도구라고 생각한다. 관계의 불안에서 생기는 결핍을 다루고 싶은 것 같다. 아직은 연애 영화가 좋은 게 일단 적은 규모로 찍다 보니 딱 두 사람만 나와도 되잖나. 적은 예산에 할 수 있기에 팠던 장르인데 다른 장르에도 욕심이 많다(웃음). 판타지나 느와르도 하고 싶고. 나 역시 미장센과 스타일 있는 걸 추구하니까 내 색깔을 지닌 장르 영화를 하고픈 마음이 있다.

음…. 사랑이란 거. 나이를 먹는다고 발전된 사랑을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예전에 했던 실수를 덜 할 수는 있는데 나이를 먹으면 새로운 결핍이 생긴다. 한 쪽을 메우면 다른 쪽이 무너지는 거지. 그래서 균형을 잡고 사는 건 참 힘든 일이다(웃음)."

보편적인 걸 다루면서도 현실의 결이 있는 영화. 김종관 감독이 현재까지 추구해온 길이다. 어쩌면 우리가 1990년대와 2000년 초반에 향유해 온 여러 멜로,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 그의 감성 일부가 기대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과장되고 비현실적 캐릭터가 난무한 지금의 것보단 오히려 설득력이 강했고, 잔잔한 감동이 있지 않았나. "이명세 감독님의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유하 감독님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 등이 있죠"라며 그가 웃으며 맞장구 덧붙였다.

"관계에 대한 안정보다는 불안을 얘기하는 사람". 김종관 감독은 스스로를 이렇게 설명했다. 최근 그가 낸 수필집 <그러나 불은 끄지 말 것>이 그 증거 중 하나다. 좋은 인상의 그가 치열하게 방황하고 헤맨 흔적이 담겨 있는 책이다. 그의 내면세계를 이해할 좋은 참고서기도 하다.

"직유보다는 은유를 좋아한다. 사적인 이야기에 큰 것을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사회적이면서도 정치적인) 큰 사건을 작품으로 말할 수 있지만 그걸 이야기 하는 영화는 많잖나. 이에 비해서 관계의 속성을 확대하는 영화는 드문 것 같다."

그가 던진 이 말이 김종관 감독 작품의 정수로 보인다. 은유의 작가. 세상과 사람에게 들이댄 그의 현미경이 또 다른 작품에서 어떻게 작용할지. 참고로 김종관 감독은 범죄소설을 좋아하는 의외의 면모도 갖고 있다. "추리소설이 아닌 고립된 범죄자의 외로움을 좋아한다"고 설명까지 덧붙였다. 이 사람, 분명 세심한 사랑꾼만은 아니다.

 영화 <최악의 하루>의 김종관 감독이 24일 오후 서울 통의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가 한국 영화계에 자리매김 하면서 선보인 작품들이 소중하다. 대형 기획 중심의 상업영화와 저예산 독립영화 사이 어느 지점에 김종관의 영화들이 있다. 다양성 측면에서 관객들의 관심이 유독 필요해 보인다. ⓒ 이정민



김종관 최악의 하루 한예리 이희준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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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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