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집자말]
고레에다 히로카즈 특유의 감성이 장면마다 살아있는 또 하나의 영화가 재개봉했다. 역시나 '가족'이었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의 가족은 부모세대와 자식세대의 갈등과 융합이 과제로 등장했다. 부모가 원하고 바랐던 자식의 삶도 있을 것이지만, 어느새 다 커버린 자식들의 삶은 이미 부모의 것이 아니었다.

극 초반 아버지 쿄헤이가 자택에서 나와 자식들이 모두 모일 집안의 행사 준비를 돕지 않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와 걷는 산책 장면은 이미 처음부터 모든 걸 말해주는 듯 했다.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이미 닿을 수 없는 자식이 있고, 닿을 듯 가까이 있지만 어쩌면 결코 절대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자식들이 있다는 것을.

자식들 모두에게 향하는 듯 노쇠하여 절룩거리는 다리로 온힘을 다해 내딛는 그 거리에서 쿄헤이는 진즉 알았을 것이다. 더 이상 맞닿을 수 없는 그 거리에 각자 서 있다고 말이다. 그래도 걷는 것을 멈출 수 없는 건, 자식들에 대한 희망이 아직 있음을 뜻했다.

아버지로 사는 방식

 사고로 죽은 장남 준페이를 기리기 위해 모인 가족들로 인해 주방은 더 분주해진다.

사고로 죽은 장남 준페이를 기리기 위해 모인 가족들로 인해 주방은 더 분주해진다. ⓒ (주)영화사 진진


'내가 이리 노력하듯이 너희들도 나를 좀 봐 달라.' 오묘하고 뒤틀린 방식으로 고집스런 구애를 하는 아버지 쿄헤이는 차갑고 냉철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자식에 대한 애정이 깊은 사람이다. 평생을 의사로 살며 직업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과 가족을 향한 책임감, 그리고 내면의 고독을 재료삼아 삶을 일구었던 그.

놀러온 손자 손녀가 "할머니 집이 좋다"고 들뜨고 기쁜 마음으로 저들 할머니와 나눈 대화에 상한 감정을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드러내기도 하는 귀엽고 불편한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지은 집을 왜 할머니 집이라고 하느냐?"

이렇게 다그치는 대목에서 그의 눈에는 잠시 외로움이 비쳤다. 원래 사람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외롭기 마련이다. 평생을 자기 잘난 맛에 살다가 은퇴하여 집에 있다 보니 그 잘난 맛이 덜해지기도 하나보다.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점심상을 물리고 차 한 잔 하며 나누는 아내와 자식들의 대화에 끼기 싫은 척하지만 실은 낄 수가 없는 신세가 되어버린 아버지의 존재는 그간 그의 행적을 알 수 있게도 해준다.

어쩌면 일하느라 가까워질 수 없었고, 이젠 어떻게 가까워져야 할지, 자식들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린 늙은 아버지는 괜히 심통 내기만 한다. 죽은 큰아들을 추모하기 위해 가족들이 모두 모인 그 날에도 아버지 쿄헤이는 언제나 그랬듯 자신만의 그 방에서 거의 나오는 일이 없다. 그저 누군가 와주고 불러주기만 기다리는 듯 먼저 다가서는 법이 없다.

인정받고 싶은 아들, '나는 왜 아버지처럼 되지 못했을까'

불안정한 직업 상태를 아버지에게 숨기고자 죽은 형의 추모를 위해 본가로 떠나는 중에도 아내에게 여러 번 다짐시켰던 료타. 아버지에게는 절대 사실대로 말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근황이 실은 스스로도 부끄러울 지경인 것이었다.

전 남편과 사별하고 남긴 아들 하나를 데리고 료타와 재혼한 그의 아내 유카리는 료타의 그런 태도가 좋지만은 않다고 여기지만 묵인해준다. 그보다 걱정인 건 아들이 아직도 료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것이 시댁에서 들통 나는 일이다.

료타 역시 자신의 결혼이 집안 내에서 자신 모르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아서 내내 불안하다. 특히 자신이 사랑하는지 미워하는지 모를 아버지에게서 인정받고 싶은 그 욕구가 드러나는 장면은 료타의 불안이 더욱 급증한 듯 했다. 어쩌면 태어나면서부터 늘 형의 뒤에서 인정받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둘째 아들 이었던 것 때문일까. 인정욕구와 그에 따른 불안만으로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늦게나마 개선시키기는 힘들어 보였다.

아주 순수했던 어느 때에 '아버지처럼 의사가 되고 싶다'고 꿈꿨던 그 순간들을 아직은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굳이 기억해내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 그건 상대에 대한 원망과 자책으로 번진다. '나는 왜 아버지처럼 되지 못했을까' 라고 말이다. 그러나 실로 료타가 의사가 되지 않은 것만 빼면 아버지와 료타는 이미 많이 닮아 있었다.

 뻣뻣한 아버지 쿄헤이와 그와 꼭 닮은 아들 료타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뻣뻣한 아버지 쿄헤이와 그와 꼭 닮은 아들 료타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 (주)영화사 진진


"제가 형을 대신할 수 없어요"

전도유망했던 장남의 급작스런 죽음이 드리운 가족의 그늘이 쉽사리 걷히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노부모의 슬픔, 남겨진 자식들의 부담감은 그들 사이의 골을 더 깊게 했다. 멀리 사는 딸 가족이 오래된 이 집에 들어와 자기들 입맛에 고쳐서 함께 살고 싶다는 의견을 냈을 때, 노부부들 중 누구도 선뜻 수락하지 못했다. 행동이 아닌 말로만 살갑게 군다고 느껴지는 사위와, 늙어서까지 되려 챙겨야 할 것 같은 철없는 딸, 그리고 그들의 천방지축 자녀들은 늙은 노부부에게 반갑지 않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장남의 죽음으로 휑하니 비워진 가슴을 채워줄 무언가가 필요했지만 그건 다른 이가 채울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그것을 노부부도 알았고, 둘째 아들 료타도 알았다. 형의 죽음으로 인해 변화된 가족관계 속에서 료타가 형을 대신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누구도 죽은 아들 준페이를 대신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비통하게 내짖는 들개처럼, 자신이 형을 대신할 수 없다고 쐐기를 박는 료타의 심정이 잘못된 것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걸어도 걸어도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았지만

죽었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라지만 죽음은 누구에게나 인생 통틀어서 가장 완벽한 이별이고 잔인하리만큼 슬픈 갈라섬이다. 오래도록 땅에 박혀 굳어진 나무 기둥처럼 변하지 않을 것 만 같던 아버지의 죽음은 예상보다 빨랐다. 노랑나비가 죽은 아들 준페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사라지지 않아 집에 우연치 않게 들어온 샛노란 나비를 미친 듯 쫓던 어머니의 죽음 역시 아버지의 죽음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후였다.

언젠가 같이 축구장에 가자고 말했던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언젠가 차를 사게 되면 꼭 태워주겠다는 어머니의 바람도 들어드리지 못했다. 알 수 없는 인생이라고 하지 않던가. 살아있는 모두의 삶은 알 수가 없다. 살아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살아있기에 가능했던 죽음이 부모에게 닥친 이후의 삶은 또 이어지긴 한다.

걸어도 걸어도 닿을 수 없을 것만 같던 아버지와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일부나마 화해한 걸까. 진짜 부모가 되어보면 알게 된다던 부모 심정의 바통을 이어받아 부모로서 살아내는 것으로 닿을 수 없을 것만 같던 삶이 닿는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가족 관계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가족 관계 이야기를 다룬다. ⓒ (주)영화사 진진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순지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blog.naver.com/rnjstnswl3)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걸어도 걸어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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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문화, 다양한 사회현상에 관해 공부하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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