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마치지 못하여 구름이 걷히니 호승이 간 곳이 없고 좌우를 돌아보니 팔 낭자가 또한 간 곳이 없는지라 정히 경황하여 하더니 그런 높은 대와 많은 집이 일시에 없어지고 제 몸이 한 작은 암자 중의 한 포단 위에 앉았으되, 향로에 불이 이미 사라지고 지는 달이 이미 창에 비치었더라.

스스로 제 몸을 보니 일백여덟 낱 염주가 손목에 걸렸고, 머리를 만지니 갓 깎은 머리털이 가칠가칠하였으니 완연히 소화상의 몸이요, 다시 대승상의 위의 안이니 정신이 황홀하여 오랜 후에 비로소 제 몸이 연화 도량 성진 행자인 줄 알고 생각하니." - <구운몽> 중에서

조선 시대 김만중이 쓴 <구운몽>에서 주인공 성진이 꿈에서 깨는 장면이다. 원래 승려였던 성진이 세속적 욕망을 탐하자 그의 스승 육관대사가 성진에게 꿈을 꾸게 한다. 그리고 그 꿈속에서 성진은 양소유라는 인물이 되어 부와 명예를 얻고 당대 최고의 미녀 8명과도 함께 살게 된다. 누구나 다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살게 되었지만, 양소유는 죽고 나면 이 모든 것이 다 부질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나게 된다.

<구운몽>의 인생무상, <W>의 인생무상

 웹툰 <W>의 주인공 강철(이종석 분)은 현실 세상으로 나와 자신의 세상이 모두 허구였음을 알게된다.

웹툰 의 주인공 강철(이종석 분)은 현실 세상으로 나와 자신의 세상이 모두 허구였음을 알게된다. ⓒ MBC


인생무상을 느끼고 꿈에서 깨어났다는 이야기인데 이 부분을 볼 때마다 늘 드는 궁금증이 있었다. <구운몽>에서 성진이 양소유로 산 삶이 하룻밤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꿈에서 깨어나기 직전까지 한평생을 양소유로 살아오다 갑자기 자신의 삶이 사실은 가짜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인데 어쩜 그렇게 덤덤할 수 있는 것일까. 만약 나라면? 보통 사람이라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을 때 과연 성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오랜 시간 궁금했으나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의문이었다. 어쩌면 죽는 그 순간까지도 찾을 수 없는 답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렇다고 그런 의문을 던져준 <구운몽>의 주인공 성진에게 감정 이입하여 답을 찾기는 어려웠다. 성진은 '양소유'라는 인물로 평생 산 삶이 진짜가 아니었다는 것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게다가 '양소유'로 산 자신의 가짜 삶 덕분에 깨달음을 얻어 더 열심히 수행하며 산다. 그런 그에게 감정 이입하여 답을 찾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런 오래된 질문에 답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쩌면 힌트 정도는 던져줄 수 있는 드라마가 시작됐다. 바로 MBC 수목드라마 <W>다. <W>의 주인공 강철(이종석 분)은 진짜라고 믿었던 자신이 사실은 웹툰 속 주인공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구운몽>에서 양소유 주변의 모든 것이 한꺼번에 없어졌듯, 웹툰 안 모든 인물의 움직임이 정지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허구였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게 된다. 강철은 양소유와 다르게 엄청나게 큰 충격을 받는다.

'내 삶이 가짜라면'

'내 삶이 사실은 가짜라면?'이라는 고민은 '난 왜 사는 것일까? 난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는 질문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일장춘몽'이라는 말이 있다. '인생은 한바탕 봄 꿈과 같은 것'이라는 말을 할 때 자주 인용되는 고사성어다. 우리 중 누구도 우리가 죽은 다음 어떻게 되는지 모른다. 그 이야기는 바꾸어 말하면 곧 지금 사는 내 삶이 진짜 삶일까라는 의구심이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수학을 좋아하지 않던 나는 학창 시절에 수학을 배우고 나면 항상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었다. 그러면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선생님이 그 문제에 대해 설명해 주었던 것을 혼자서 다시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보고 했다. 그리고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드디어 그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게 되었을 때의 쾌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문제에 대해 끝까지 답을 찾지 못하면 답답함을 견딜 길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 문제에 대한 해설서가 있고 설명해줄 선생님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인생도 그렇다. 수학처럼 명확한 정답은 없지만 그래도 먼저 인생을 산 부모님들이나 친한 선배들에게 조언을 받을 수 있고 역사책을 통해 조금이라도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즉 문제집에서 문제를 풀 때처럼 정답을 찾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런저런 힌트는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엇이 정답이든 내 선택에 따라 어떤 결과가 펼쳐지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존재는 평생을 살아도 정답뿐 아니라 힌트도 그리고 선택에 대한 결과도 절대로 볼 수도 없고 풀 수도 없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지속되는 질문은 죽은 다음에는 과연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이다.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지금 내 삶에 대한 궁금증은 더해간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나는 왜 존재하는 것일까. 내가 사는 이 세계가 진짜일까. 사실은 꿈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존재에 대한 궁금증

 <W>의 남자주인공 이종석은 드라마 속 웹툰 'W'를 뚫고 나온 '만찢남'이다.

의 주인공 강철(이종석 분)은 진짜라고 믿었던 자신이 사실은 웹툰 속 주인공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구운몽>에서 양소유 주변의 모든 것이 한꺼번에 없어졌듯, 웹툰 안 모든 인물의 움직임이 정지한다. ⓒ MBC


그리고 이런 의문들은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인간이 닿을 수 없는 그 어떤 초월적 공간에 가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게 한다. 그곳에 가면 그 궁금증에 대한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나 그런 공간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 남는 것은 삶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답을 찾을 수 없는 것에 대한 답답함, 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뿐이다.

그런데 강철은 현실을 사는 우리와 달리 그의 세계에서 절대로 갈 수 없는 초월적인 공간에 발을 들여놓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어쩌면 그는 사람들이 궁금해하지만 답을 찾지 못했던 우리가 사는 이유에 대한 답을 들려줄 수 있지 않을까. 답을 들려주지는 못해도 조금이나마 힌트를 더 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W>는 모니터를 뚫고 웹툰에서 튀어나온 주인공이 활약하는 발랄하고 경쾌한 드라마라고만 생각하며 즐기며 보기에는 사실은 무거운 드라마다. <W> 속 화면이 아름답고 예쁜 이야기가 펼쳐지는 순간에도 결국 <W>는 끊임없이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또 던지고 있으니까.

'난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일까?' 설령 이 질문에 대한 답을 <W>가 마지막에 보여주지 못한다 해도 그 질문 덕분에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 아닐까?

W 이종석 구운몽 한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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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넓게 보고 싶어 시민기자 활동 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여행 책 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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