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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사람들을 죽인 이유를 370페이지에 걸쳐 떠들어대는 핏빛 소설이라도 중간에 놓을 수가 없다. 정유정 소설이기 때문이다. 정유정 소설을 읽기 시작한 독자는 일단은 끝까지 읽는다. 뒷 이야기가 너무 궁금하니까. 그래서 정유정 소설을 읽을 땐 소설 속 이야기가 마음에 드느냐, 들지 않느냐를 따질 수 없다. 그건 읽고나서야 가능하다.

첫 장편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로 작가로는 꽤 늦은 나이인 마흔한 살에 등단한 정유정. 그는 이후 내놓는 소설마다 히트를 쳤다. <내 심장을 쏴라>가 20만 부, <7년의 밤>이 40만 부, <28>이 20만 부. 3년 만에 내놓은 신작 소설 <종의 기원>은 2주 만에 8만부가 팔렸다.

지난 16일 정유정 작가를 인터뷰하러 서교동으로 향하는 길, 나는 먼저 '시작'을 물어야겠다 생각했다. 정유정은 어떻게 소설을 쓰기 '시작' 했을까.

스스로를 벼랑 끝에 세운 작가

정유정 작가 .
 정유정 작가 .
ⓒ 황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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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호사로 5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9년을 일하셨죠. 그러다 삼십대 중반에 소설을 쓰겠다 결심하셨어요.
"어려서부터 작가가 꿈이었어요. 제 고향이 전라도 함평인데요. 그 시절 5일장이 제가 누린 유일한 문화혜택이었어요. 서커스도 열렸고 서커스 내 천막극장에선 만담꾼이 옛날이야기를 해줬어요. 그 이야길 듣고 동네에 와서 애들에게 해주면 애들이 박수를 치며 내가 더 잘한다고 칭찬해주는 거예요. 그때부터 막연히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제가 어렸을 때 선머슴처럼 돌아다니길 잘했는데, 책 읽을 때만 얌전해졌어요. 책을 읽으니 자연히 글도 쓰게 됐고, 학교에서 대회가 열리면 상을 많이 탔어요. 저는 그때 제가 글을 잘 쓰는 줄 알았어요."

- 상을 탔다면 잘 쓰셨던 거 아니에요?
"(웃음) 그런데 엄마가 글 쓰는 걸 반대했어요. 외삼촌이 희곡을 쓰셨는데 가난 때문에 사십 초반 나이에 요절하셨거든요. 우리 딸도 그렇게 될까 봐 그러셨을 거예요. 니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직업을 가지라고 하셔서 간호사가 됐죠."

- 어머니가 이름도 바꾸셨다면서요.
"제 원래 이름에 글을 써서 먹고 살 운명 같은 게 들어있었나 봐요. 그 말을 듣고 엄마가 이름까지 바꾸셨어요."

- 결국 글을 쓰셨어요.
"삼십대 중반이 돼서야 제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게 된 거죠. 그런데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작가가 되고 싶다고 작가가 될 수는 없고. 제가 6년 습작 기간 동안 공모전에서 11번을 떨어졌어요."

- 6년이 말이 6년이지 정말 긴 시간이에요. 이 시간을 어떻게 버티셨나요.
"저는 운이 좋았어요. 남편이 뒷바라지를 잘 해줬어요. 그래도 힘들었죠. 공모전에서 계속 떨어지니까 패배주의에 빠지게 됐어요. 안 되는 걸 내가 이러고 있는 건 아닌가. 그럴 때마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나, 글을 쓰고 싶나, 이 질문을 자주 던졌어요. 작가가 되고 싶은 건 직업에 관련된 거고, 글을 쓰고 싶은 건 '자유의지'에 관련된 거잖아요. 내가 삶에서 가장 원하는 게 무엇이냐, 그러면 글을 쓰는 거라는 답이 나왔어요. 글을 쓰기 위해 모든 걸 그만두고 벼랑 끝에 나를 세웠으니, 실패도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 스스로를 벼랑 끝에 세우신 건가요.
"네, 처음부터 힘들 거라고 생각했어요. 전 문예창작학과를 나온 사람도 아니고, 그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으니까.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공기업이고 좋은 직장이었어요. 그만둔다고 하니까 미쳤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일 하면서 글을 쓰라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그런데 돌아갈 길이 있어버리면 꿈을 놔버리게 되잖아요. 그래서 회사를 그만둔 거죠. 저는 글에 목숨을 걸기로 했어요. 글을 쓰지 않으면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 '달리지 않으면 고꾸라진다는 두려움, 고꾸라지면 죽는다는 두려움이 있었다'고 쓴 적이 있어요.
"그 말은 제 청춘에 대한 말이었어요. 제가 대학교 졸업하고 중환자실에서 일할 때 엄마가 아프셨어요. 3년 반 동안 투병하셨는데 그때 동생 세 명과 아버지를 제가 다 챙겨야 했어요. 스물셋에서 스물아홉까지. 제 청춘을 오로지 동생들 가르치고 부모님 챙기며 살았어요. 친구들은 연애하고 재미나게 세월 보낼 때, 전 어디 가서 커피 한 잔 마시지 못했어요. 캄캄하고 차가운 굴 속을 걷는 기분이었어요. 아무한테도 의지할 수 없고, 모두 나한테만 의지할 때.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고꾸라지면 죽는다고. <내 심장을 쏴라>가 제 청춘을 생각하면서 쓴 거예요. 온전히 누리지 못했던 제 청춘을 생각하며. 그래서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시는 것 같아요."

미학적인 이야기 추구

- 2007년도에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로 청소년세계문학상을 받으셨어요. 이 책을 쓸 때는 '어떻게'가 아닌 '무엇'에 집중하셨다고 하셨지요. 여기서 '무엇'에 해당하는 게 '신나는 모험 이야기', '겁나는 심리스릴러'라는 거잖아요. 왜 모험과 스릴러예요?
"제가 좋아하는 책들이 그런 거예요. 저는 책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생각해요. 사유하게 하거나, 체험하게 하거나. 제 책은 후자에 속해요. 제가 읽는 것도 후자의 책을 좋아해요. 생각하게 하는 책보다는 감정을 요동치게 하는 책. 스티븐 킹 같은 책. 그러다 보니까 모험이거나 스릴러가 되는 거예요.

- 세계문학상을 받은 <내 심장을 쏴라> 심사평에 "문체가 내면화되지 않은 점을 지적한 의견이 있다"고 쓰여 있더군요. 이런 말 들어도 상관없으시죠? (웃음)
"네. (웃음) 문장 자체에서 미학을 추구하지 않아요. 저는 이야기에 복무해야 하는 게 문장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문장을 생각할 땐 꼭 필요하냐 안 필요하냐, 정확하냐 정확하지 않냐, 가 제겐 가장 중요해요. 대신 저는 이야기가 미학적으로 뛰어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문장이 아니라."

- 좋은 문학은 '힘 있고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말하신 적도 있죠.
"네,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게 행복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라는 게 아니라, 이야기 자체로서의 완성도를 말하는 거예요. 제가 이야기 안에서 중요시하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인물이에요. 인물의 내면, 인물의 갈등, 인물의 심리상태. 제 소설에선 사건이 끊임없이 이어져요.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사건들이 전부 내면의 갈등에서 빚어지는 사건이거든요. 전 사건 자체를 만들기 위한 이야기는 쓰지 않아요."

- 글을 말 그대로 술술 읽히게 쓰시잖아요. 비결이 뭔가요.
"문장과 문장 사이의 리듬을 굉장히 중요시해요. 그래서 접속사를 거의 안 쓰죠. 리듬감을 살리려면 조사와 부사를 잘 써야 해요. 이 작업을 수도 없이 해요. 소리 내서 읽어보고, 체크하고, 수정하는 작업이 반복돼요."

- 감각으로 되는 게 아니네요.
"네, 계속 보는 거예요. 퇴고, 또 퇴고예요. <종의 기원> 같은 경우는 문장이 부드러울 거예요. 문장 길이도 길고, 부드럽게. 사이코패스 이야기인데 살벌하고 딱딱하게 쓰면 너무 편견에 갇히게 될 것 같았어요. 이 아이를 더 섬뜩하게 보이게 하려면 용모도 예쁘게, 말도 예쁘게. 유진이가 화가 나도 말을 예쁘게 하잖아요. 행동도 예쁘게."

- 그래서 무서워요.
"그렇죠?(웃음)"

우리 안의 악한 본성

정유정 작가.
 정유정 작가.
ⓒ 황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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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을 쓰고 나서부터 사이코패스 이야기를 쓰겠다 마음먹은 건가요?
"슬럼프가 왔어요. 그래서 여행을 갔어요. 히말라야 다녀온 후 산티아고 순례길 걸으면서 구체적인 구상을 시작했어요. 노트 한 권이랑 볼펜 한 자루만 있으면 어디서든 초고가 만들어지니까요. 전 초고는 노트에다 직접 쓰니까요. 40일 걸으면서 구상한 거죠."

- 산티아고에선 깨달음을 얻으셨나요.
"아니요.(웃음) 깨닫기는 무슨, 아무 생각 없어져가지고. 글 생각만 했죠. 산티아고에선 총 980km 걸었어요. 200km 정도 걸은 후부터는 정신력으로 걷는 거예요. 산티아고는 힘으로 걷는 길이 아니고 정신력으로 걷는 길이더라고요. 저보다 나이 많은 분들이 많이 걸으시더라고요. 그분들에겐 이 길을 걷는 게 인생에서 큰 성취인 거죠. 누가 알아주진 않아도 본인 스스로 생각할 때는 큰 성취. 이게 중요한 것 같아요."

-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부터 악인이 계속 나와요. 악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있나요.
"작가마다 인생의 테마가 있잖아요. 한두 가지 테마를 평생 변주하며 글을 쓰잖아요. 헤밍웨이는 죽음, 찰스 디킨스는 가족이나 아버지, 스티븐 킹은 인간 내면의 공포. 저는 인간의 본성에 관심이 많았어요.

제가 이렇게 무신경하게 생기긴 했어도(웃음), 어렸을 때부터 상처를 잘 받았어요. 저 사람은 왜 내게 상처를 줄까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보니까 아무 이유도 없는데 저도 누군가를 미워하는 거예요. 뭐지? 하면서 인간의 내면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나쁜 면과 함께 우리 내면엔 좋은 면도 있잖아요. 타인을 위해서, 심지어 동물을 위해서 목숨을 던지는 분도 있고. 아름다운 행동, 아름다운 생각을 할 수 있는 동물이 또 인간이고요. 이 두 가지가 다 공존하고 있는데, 그랬을 때, 이 아름다운 면을 잘 쓰는 작가들은 많아요.

그런데 저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엔 관심이 가지 않을 뿐더러, 반대로 우리 안의 악한 본성에 더 관심이 많은 거예요. 더 잘 쓸 수 있을 것도 같고, 더 들여다보고 싶은 거죠."

- 악을 알면 악에 대처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죠.
"알면, 악을 누를 수 있는 거죠. 내가 남한테 어떤 상처를 주는지 알아야 하는 거예요. 우리가 남의 삶을 어떻게 망치고 있는지 우리는 모를 수 있어요. 불편하지만 이런 글을 읽고 나면 시야가 넓어지잖아요. 사람 보는 눈이 넓어지고요. 이면을 보게 되고요. 자신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우리 안의 악한 본성을 바라보자는 거예요.

- <종의 기원>은 사이코패스 입장에서, 1인칭 시점으로 글을 쓰신 거잖아요. 세 번을 다시 쓰셨다고 하셨어요. 그 이유가 작가님 안의 윤리와 도덕이 사이코패스 유진이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게 해서라고 말하셨죠. 그렇다면 지금의 이 소설 속 유진이는 그런 모든 윤리에서 벗어난 인물인 건가요. 유진이는 사이코패스 전형인가요.
"이모를 죽이려 할 때 엄마의 환영이 사라지잖아요. 그 순간이 마지막 남아 있던 인간으로서의 양심이 사라지는 순간이에요. 이때 독자를 향해서 정면으로 돌아서는 거예요. 나 사이코패스야, 하고. 그 기점을 보시면 돼요. 이모를 죽이기 전까진 우리가 받은 교육과 사이코패스 기질이 혼재돼 있는 거고, 이모를 죽인 후부터 진짜 사이코패스인 거죠."

- 이 책을 읽으면서 전 유진이를 연민하게 되더라고요. 사이코패스를.(웃음)
"이 책은 유진이가 세상을 속이기 위해 쓴 글이에요. 여기에 나온 사건들은 다 진실이에요. 엄마를 죽이고, 이모를 죽이고, 해진이를 죽이고. 그런데 이걸 싸고 있는 것들이 자기 합리화로 이루어진 것들이고, 유진이가 말하잖아요. "도덕이란 말이 되는 그림을 그려 보이는 것이다." 즉, 이 책은 사이코패스의 자기 변론서인 거죠.

저는 글을 쓸 때 유진이 자체를 독자에게 안겨주고 싶었어요. 거짓말과 자기합리화와 정당화, 이런 것들로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게 해서 그 사람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이 악인을 독자와 만나게 하고 싶었어요. 이 소설 자체가 유진이예요. 그러니까 독자는 사이코패스를 만난 거예요."

- 우리가 우리 안의 악의 본성을 응시하게 하려면, 유진이가 일반적인 악인인 게 더 설득력 있지 않았을까요.
"굳이 사이코패스여야 하느냐, 이런 말들 많이 하시는데, 일반적인 악은 그전에 이미 다 썼어요. <7년의 밤>에서 오영제도 그렇고, <28>의 박동해도 그렇고요. 악인의 스펙트럼 상에서 점점 확장되면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이게 지금 악에 대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인 거죠."

- 묘사가 끔찍해요.
"엄마 죽일 때나 면도칼을 꽂을 때를 제외하곤 살인 묘사는 거의 없어요. 이모 죽일 때도 엄청나게 절제한 거예요. 만약 <7년의 밤>식으로 했다면 독자들이 아마 밥을 한 달 정도 못 드시지 않았을까.(웃음) 살인했다, 목을 땄다, 딱 여기까지만 보여 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쓴 거예요. 그 이상은 나가지 말자. 살인 장면에 대한 묘사보다는, 살인 심리에 대한 묘사에 더 집중했어요."

- 악인에 대해 쓸 때 무섭진 않나요.
"그럼 못 쓰죠. 유진이가 여자 따라갈 땐 저도 신나요. 제가 유진이니까. 거기서 끔찍한 느낌이 나버리면 그 장면 묘사를 망치는 거죠."

- 다음 소설에도 악인이 나오겠죠.
"아마 주인공으론 나오지 않을 거예요. 주인공과 적대관계에 있는 악인 정도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주변 인물로요."

- 다음 책도 2, 3년 후에 나오는 건가요.
"그럴 것 같아요."

정유정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벼랑 끝에 서서 어딘지 모를 다음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모든 것이 끝난 상황에서 소설은 시작되고, 이후 우리가 보게 되는 건 끝난 줄 알았던 곳에서 다시 시작되는 인간의 삶이다. 그래서 정유정 소설의 바탕은 모험이고, 도전이다.

서교동 카페를 나서면서 생각했다. 삶과 죽음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기어코 다시 삶으로 치닫는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이, 그녀와 참 많이 닮아있는 것 같다고. 숙명처럼 도전하는 삶을 살아온 소설가는 내내 밝고 환했다. 그녀 안의 두 가지 본성에서 밝은 쪽이 승리를 거둔 모습 같았다면 너무 섣부른 판단일까.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 중복게재합니다.



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은행나무(2016)


태그:#정유정, #종의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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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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