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시그널>의 한 장면.

드라마 <시그널>의 한 장면. ⓒ tvN


tvN <시그널>에 '명품드라마', '웰메이드 드라마'와 같은 상찬이 차고 넘친다. 시청률은 케이블 드라마로서는 홈런에 가까운 11%를 넘겼다. 김혜수를 비롯해 조진웅, 이제훈 등 연기자들에 대한 찬사 쏟아지고, 종영을 코앞에 둔 지금 시즌2에 대한 가능성과 기대 또한 높아가는 중이다.

반면 영화 <프리퀀시>나 미제전담반을 다룬 <콜드케이스>의 설정을 뒤섞은 듯 하다거나, 미제사건을 쫓는 두 형사의 장기간 수사를 그린 '미드' <트루 디텍티브>의 오프닝과 비슷하다거나 하는 장르적인 유사점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신 의문의 무전기로 이어진 현재와 과거의 형사가 미제사건을 해결한다는 판타지와 형사물을 엮으려 노력했다.

시청자들이 <시그널>에 열광한 요인은 한마디로 "불의가 만연한 공권력과 사회현실에 대한 분노"일 것이다. 무능한 경찰과 그런 경찰 조직을 혐오하는 박해영(이제훈 분) 형사, 그 보다 더 신중하고 세심한 차수현(김혜수 분) 형사의 시선을 통해 그간 한국사회가 간과했던 피해자 중심주의와 그 가족들의 고통을 조명한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최근 <이데일리 스타>와 인터뷰를 가진 김은희 작가의 말 속에 잘 드러난다.

"'20년이 지났는데, 뭐라도 달라졌겠죠?'라는 재한의 대사가 있어요. 과연 이 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죠. 제가 생각하는 좋은 사회는 가난하고 힘이 없어도 노력한 만큼 보상 받는 사회에요. 똑같은 죄를 지었다면 힘이 있는 자와 없는 자 모두 동일하게 부합하는 죗값을 치러야죠. 그게 정당한 사회 아닐까요?"

<싸인>과 <유령> 등 유독 스릴러와 장르물에 천착해온 김은희 작가는 <시그널>에서도 여전히 같은 질문을 던지는 중이다. 그러니까, 불의와 범죄에 대항해 싸워나가는 정의로운 개개인들, 그들을 보호하고 시민들을 지켜야 할 시스템, 즉 우리의 공권력은 믿고 따를 만 한 것일까?

김은희의 주인공들은 법의학자와 사이버 수사대, 청와대 경호관, 프로파일러 등 직업이 바뀌고 환경이 변주될지언정 우리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저 '공권력'에 대한 자문을 잃지 않는다. <시그널>은 판타지라는 장르적 장치를 끌어들여서라도 이 주제를 고수하고 싶은 김은희 작가의 의지요, 군사정권이란 과거로까지 그 질문을 확장시킨 문제작인 셈이다.

드라마로 인해 현실에서 발생한 '버그'

 경남 한 경찰서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한 여성 경찰관의 파면을 요구하는 글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 여성 경찰관은 12년 전 고3일 때,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의 가해자를 옹호하는 취지의 글을 미니홈피에 올렸다.

경남 한 경찰서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한 여성 경찰관의 파면을 요구하는 글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 여성 경찰관은 12년 전 고3일 때,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의 가해자를 옹호하는 취지의 글을 미니홈피에 올렸다. ⓒ 윤성효


그런데, 종영 즈음 드라마 밖에서 일종의 '버그'가 생겼다. 드라마 후반부의 이야기를 채운 '인주 여고생 사건' 때문이다. 이 에피소드의 모티브가 된 '밀양 여중생 성폭행사건'은 이창동 감독의 <시>와 이수진 감독의 <한공주> 역시 소재를 삼았던 사건으로, 2004년 밀양의 고등학생 40여명이 1년여에 걸쳐 같은 지역 여중생을 성폭행한 사건이다.

그런데 <시그널>이 화제가 되면서 실제 사건에 대한 관심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버렸다. 당시 가해자의 친구였으며 가해자를 옹호하는 글을 올렸던 현직 경찰관의 신상이 인터넷 상에 공개되고, 재직중인 경찰서에 항의가 빗발치는가 하면, 사건에 연루된 당시 고등학생들의 실명과 사진 등 신상정보 역시 유포되고 있다.

대중적인 여파가 큰 인기드라마의 화제 탓으로 돌리기엔 씁쓸한 뒷맛을 남길 수밖에 없는 논란이 아닐 수 없다. 그 와중에, 법원으로부터 무혐의 처분을 받은 한 연루자는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고 한다. 엉뚱한 곳에서 2차 피해자가 발생할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드라마 제작진이 의도하지도, 의도할 수도 없는 안타까운 상황임은 명백하다. 하지만 실화 소재의 영상화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나 <시그널>은 끊임없이 이재한(조진웅 분) 형사의 뜨거운 감정을 시청자들의 '공분'으로 치환시키며 극을 끌어가는 자양분으로 삼은 바 있다. 실제 사건에 대한 관심의 씨앗은 출발부터 잉태돼 있던 셈이다.

<시그널>은 '실화 소재'로 극 초반 몰입도를 올린 케이스다. 지명이나 사건명을 그대로 옮겨오진 않았다. 하지만 30대 이상 한국인이라면, 아니 나이와 경험과는 상관없이 영화나 뉴스를 통해 쉬이 접했을 법한 장기미제사건인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두 번째 사건의 모티브로 삼았다.

'현재'의 프로파일러와 '과거' 형사가 시간을 넘어서는 공조를 통해 사건을 잡는다는 <시그널>의 기본 골격은 역설적으로 과거나 현재 어느 한쪽의 여력만으로는 그 범인을 잡을 수 없다는 한계를 분명히 한다. 범인상이나 경찰 내부의 비협조 등 <시그널>은 이어지는 사건의 해결 과정에서도 그 기본 골격을 변주하며 '죗값'과 '정당한 사회'라는 주제를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그 과정들 속에서 굽이굽이 피해자와 가해자 가족의 사연들도 잊지 않고 묘사하는 것은 물론이다.

실화 소재 작품들이 가져야 할 어떤 태도 혹은 윤리의식

 드라마 <시그널>의 포스터.

드라마 <시그널>의 포스터. ⓒ tvN


그럼에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왜 굳이 실화를 소재로 삼아야만 했을까. <시그널> 속 부녀자 연쇄살인사건의 수사는 이재한과 박해영의 공조 덕에 의외로 어렵지 않게 풀린다. 극적 판타지를 끌고 들어와 현실에서 놓친 범인을 기필코 잡고야 말겠다는 <시그널>의 지향은 그 자체로 현실의 비판으로 기능할 수 있다.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은 소재들을 연쇄적으로 배치해나간 <시그널>은 그래서 더더욱 개별 에피소드의 묘사에 있어 섬세함과 세심함이 필수 덕목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화제성을 탐하기 위한 소재 선택, 즉 '소재를 위한 소재주의'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해 보인다.

한영대교 붕괴 장면이 대표적이다. <시그널>은 연쇄살인사건 이후 '대도 사건'과 '다리 붕괴 사고'를 연결시킨 뒤, 성수대교 붕괴를 연상시키는 한영대교 붕괴 장면을 CG를 동원해 기어이 재현하고야 만다. 그리고는 사건 피해자의 아버지인 '대도'를 살인범으로 둔갑시킨다.

피해자 가족의 억울하고 기막힌 감정을 극대화시키려는 의도가 오히려 독이 되는 순간이랄까. 그리고는 차수현을 죽음으로 몰아넣고는 타임슬립 설정을 이용해 부활시킨다. 혹자는 현실과 판타지의 결합이라 상찬할 수 있겠지만, 자극적이고 극적인 사건이 주는 충격효과를 기본 설정만으로 간단하게 봉합하는 기교로 받아들일 여지도 충분한 것이다.

이 모두가 실제 미제사건일지언정 드라마 속에서라도 범인을 검거하면서 생기는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를 시청자들에게 안기고픈 열망에서 비롯됐다면, 더더욱 위험해 보인다. 실제 사건에 반응하고 공분을 하게끔 만든 극적 구성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고민해볼 대목이다. 같은 이유로, '밀양 여중생 성폭행사건'과 관련한 논란은 이미 예고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시그널>은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는 점을 홍보의 도구로 톡톡히 활용해 왔다. 하지만, 허구의 사건들로 에피소드를 채웠다고 해도 제작진이 원래 의도한 주제는 훼손되지 않았을 것이다. 현실에 대한 환기와 극적 재미 사이 - 이렇게 <시그널>은 실제 사건을 작품 내로 가져올 때 창작자들이 가져야 할 어떤 태도 혹은 윤리의식에 대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러니 부디, 마지막회까지 그간 견지했던 주제의식만큼은 확실히 지켜내기를.

시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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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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