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께서는 다음에 큰 내기를 한 번 하십시오. 신이 반드시 장군이 이기도록 계책을 마련해 놓겠습니다."

전기가 손빈의 말대로 큰 내기를 걸자 손빈이 전기에게 귀띔했다.

"먼저 상대가 제일 빠른 말을 내보내면 장군은 제일 느린 말을 내보내고, 상대가 중간 말을 내보내면 제일 빠른 말을 내보내며, 상대가 제일 느린 말을 내보내면 중간 말을 내보내십시오."

경마의 결과는 2승 1패로 전기의 승리였다. 이에 감탄한 전기는 손빈을 위왕에게 추천해 손빈은 전기의 참모가 되었다. 그 후 전기의 군대는 연전연승했고 후에 손빈은 제나라의 군사(軍師)가 되었다.(사마천, <사기(史記)>,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 중)

끝까지 눈을 뗄 수 없는 한 해였다. 처음 절반은 할리우드가, 다음 절반은 한국영화가 극장가의 패권을 쥐었다. 한 대작이 막을 내리면 곧이어 다음 기대작이 개봉했고, 1년 내내 규모 있는 영화가 끊일 줄 몰랐다. 그 흐름 속에서 3편의 천만 영화가 탄생했다. 그중 둘은 여름특수를 겨냥한 한국형 블록버스터였다. 최동훈 감독은 다시금, 류승완 감독은 처음으로 천만 감독의 영예를 거머쥐었다.

얼핏 보면 할리우드와 한국영화가 엎치락뒤치락 치열한 싸움을 벌인 것만 같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상대의 가장 빠른 말과 우리의 가장 느린 말

2015년 쌍천만 한국영화 2015년 한국영화 중 최고 흥행 성적을 기록한 <암살>과 <베테랑>. 전자는 쇼박스가 후자는 CJ엔터테인먼트가 관여했다.

▲ 2015년 쌍천만 한국영화 2015년 한국영화 중 최고 흥행 성적을 기록한 <암살>과 <베테랑>. 전자는 쇼박스가 후자는 CJ엔터테인먼트가 관여했다. ⓒ 쇼박스/CJ엔터테인먼트


지난해 개봉한 할리우드와 한국의 대작 라인업을 겹쳐놓으면 기묘한 풍경이 펼쳐진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분노의 질주: 더 세븐>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쥬라기 월드> 등 할리우드의 규모 있는 영화가 줄줄이 개봉한 시기, 이들과 맞상대한 한국 영화는 코미디와 저예산 장르물이 주를 이뤘다.

한국의 기대작이 본격적으로 개봉한 건 여름 성수기를 앞두고였다. 여전히 강성하지만 전반기에 비하면 다소 무게감이 떨어진 할리우드 라인업이 이들의 상대였다. 이 시기 개봉한 두 편의 천만 영화 <암살>과 <베테랑>의 맞수는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와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이었다. 규모 있는 블록버스터임이 틀림없지만, 전반기 대작에 비하면 한 수 아래로 평가받는 작품이었다. 실제로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과 <분노의 질주: 더 세븐>은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와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에 비해 각 1억 달러의 제작비를 더 들여 만들었다.

<암살>(쇼박스)의 크랭크업(촬영 종료 시점)은 지난 2015년 1월이었다. <연평해전>(NEW)은 2014년 12월, <베테랑>(CJ엔터테인먼트)은 2014년 6월 촬영을 마쳤다. 롯데엔터테인먼트의 기대작 <협녀: 칼의 기억>은 2014년 2월에 촬영이 끝났다. 통상 장편영화 한 편에 두 달 정도 후반 작업이 이뤄지는 점을 생각해보면 촬영종료와 개봉 시점 사이의 기간이 상당히 길다. 배급사가 경쟁작 등 개봉여건을 고려해 일정을 조정했다는 뜻이다. 6월부터 7월 말까지 연이어 개봉한 한국 4대 투자·배급사의 작품이 모두 그렇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면 <손빈병법>으로 유명한 제나라 책사 손빈의 고사가 떠오른다. 우리의 가장 빠른 말을 상대의 가장 빠른 말과 맞서게 해선 안된다는, 이제는 고전이 된 전략 말이다. 손빈은 전기에게 우리의 가장 느린 말이 상대의 가장 빠른 말과 경주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가장 느린 말은 버리는 패다. 두 번의 승리를 위한 노림수.

할리우드 초대형 블록버스터와의 맞대결은 누구에게나 피하고 싶은 길이다. 그 영화가 개봉하기만 기다리는 팬이 수도 없고 규모와 재미 면에서 우위를 확보하기도 어렵다. 가장 큰 영화의 사정이 그러니 작은 영화는 오죽할까. 하지만 경기장에 내몰리는 영화는 하나같이 몸집이 작은 영화다. 할리우드 대작은 손쉽게 스크린을 점령하고, 이렇다 할 대항마는 찾아볼 수 없다.

그렇게 할리우드 초대작과 한국의 대작은 한 해 스크린을 나눠 가졌다. 오래전 손빈이 내놓은 전략 아래서.

울타리인가, 포식자인가 : 한국 영화 거대 자본의 이중성

 2015년 화제작 <연평해전>과 <협녀, 칼의 기억> 포스터. 전자는 NEW가 후자는 롯데엔터테인먼트가 관여했다.

2015년 화제작 <연평해전>과 <협녀, 칼의 기억> 포스터. 전자는 NEW가 후자는 롯데엔터테인먼트가 관여했다. ⓒ NEW/티피에스컴퍼니


국내와 할리우드를 막론하고 지난 한 해 흥행에 성공을 거둔 작품 대다수는 제작과 배급 과정에서 대규모 자본의 지원을 받은 영화였다. 수백억이 넘는 제작비와 톱스타의 기용, 온갖 수단을 동원한 마케팅의 지원을 받은 작품만이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다. 4대 대형 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 롯데엔터테인먼트, 쇼박스, NEW를 제외한 어느 곳도 흥행작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단 몇 개의 기업이 영화의 기획부터 제작·배급·상영까지를 과점하는 오늘의 상황은 한국 영화생태계를 피폐하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다. 독립영화제인 선댄스영화제가 성장을 거듭하고 독점금지법에 따라 상영관 쿼터가 철저히 지켜지는 미국이나, 멀티플렉스 외에도 예술영화 장기상영극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유럽과 달리, 한국의 중소 제작·배급사 대다수는 대기업 자본이 장악한 멀티플렉스에서 국내·외 공룡들과 맞대결을 벌여야 한다.

물론 이들이 있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거센 침공에도 버텨낼 수 있었다는 목소리도 있다. 영화산업 전반을 수직계열화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대 자본이 영화계의 다양성을 무너뜨리는 탐욕스런 포식자가 아닌 든든한 성곽과도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일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이들의 시장지배력이 어느 때보다 강력했던 지난 몇 년간 한국 영화계가 가장 찬란한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개봉연도를 기준으로 2012년 <도둑들> <광해, 왕이 된 남자>, 2013년 <7번방의 선물> <변호인>, 2014년 <명량> <국제시장>, 2015년 <암살> <베테랑> 등 매년 두 편씩 천만 영화를 낳은 한국영화계는 외견상으론 전성기를 맞이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창동, 박찬욱, 김기덕, 홍상수, 봉준호, 김지운, 최동훈, 이윤기, 이준익, 윤제균, 류승완 등 확고하게 자리 잡은 선배 세대와 윤종빈, 나홍진, 박훈정, 양익준, 연상호, 박정범 등 재능 있는 후배 세대가 적절히 어우러진 한국 영화계의 오늘에선 할리우드에 침식돼 자국 영화가 설 자리조차 없는 상당수 나라와 비교할 수 없는 역동성이 느껴진다.

4대 배급사, 3대 멀티플렉스로 요약되는 규모의 경제는 한국 영화계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할리우드에 당당히 맞서 경쟁하는 한국영화의 오늘에선 의무상영제도(스크린쿼터)에 목을 맸던 과거의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한국영화는 안방을 지키는 것을 넘어 해외로 뻗쳐나가기 시작할 만큼 강하고 커졌다. 그리고 그 뒤에는 전국 스크린 수의 절반가량을 한 영화가 독차지하는 행태, 과징금을 내면서도 불공정한 스크린 배분을 이어나가는 멀티플렉스, 대작끼리의 맞대결을 피하고 스크린을 나눠 갖는 관행, 작은 영화는 상영 기회조차 잡기 어려운 현실, 그리고 이 모두를 가능케 하는 수직계열화가 자리 잡고 있다.

오늘의 느린 말이 내일의 빠른 말로 거듭나기 위해

현재 4대 배급사는 모두 자체 투자를 한다. 이 가운데 둘은 계열사가 멀티플렉스 극장을 소유하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발표에 따르면 전국 극장 356개 중 82.8%에 해당하는 295개가 멀티플렉스다. 멀티플렉스의 관객 점유율은 총 관객의 96.9%, 총 매출 점유율의 97.5%에 이른다. 대안이 될 수 있는 무대는 턱없이 부족하고, 그 무대를 찾는 관객은 전체의 2.5%에 불과한 게 현실이다. 외형적으로 전성기를 맞은 한국 영화계의 내면은 이토록 부실하다.

대기업의 자본에 의한 수직계열화와 규모의 경제는 외화에 맞서 한국 영화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일 수 있다. 하지만 현행 시스템이 미래까지 이어져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이제는 그렇게 지켜낸 공간에 무엇이 남았는지를 되돌아볼 때다. 그리고 그에 앞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기세를 올리던 시기마다 어째서 한국 거대 배급사의 야심작은 개봉하지 않았는지, 대형 제작·배급사의 존재가 적의 침공을 막아내는 울타리인지 약자를 핍박하며 제 살만 불리는 포식자인지를 점검해야 한다.

느린 말도 최선을 다하면 작은 승리를 거둘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오늘의 느린 말이 내일의 빠른 말로 거듭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느린 말이 살아남는 세상을 위해.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 CJ 엔터테인먼트 롯데엔터테인먼트 (주)쇼박스 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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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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