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에 있어서 흔히 '라이벌'이라고 하면 일본을 떠올린다. 한국과 함께 아시아 최강의 자리를 다투는 일본은 팀 전력이나 플레이 스타일, 메이저 대회 성적 등을 놓고 끊임없이 비교 대상이 되어 왔다. 무엇보다 양국 간 복잡하고 미묘한 정치적, 역사적 배경을 둘러싼 국민 정서의 영향이 가장 크다.

하지만 축구만을 놓고 봤을 때 아시아 무대에서 한국 축구에게 가장 두렵고 어려운 상대가 누구였는가 생각해 보면 오히려 '중동의 맹주' 이란이 더 첫 손에 꼽을 만하다. 한국과 지리적, 역사적으로 거리가 있는 이란은 일본과 달리 오직 '축구 그 자체로만 쌓아온 악연'이라는 점에서도 더 눈길을 끈다.

이란, 중동의 난적에서 '악연의 숙적'으로

뻔뻔한 이란 '침대축구' 이란 축구대표팀의 쇼자에이가가 18일 저녁 울산 문수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4 브라질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한국과의 경기에서 볼을 다투다 넘어진 뒤 고의적으로 그라운드에 앉아 시간을 지연하고 있다.

이란 축구대표팀의 쇼자에이가가 지난 2013년 6월18일 저녁 울산 문수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4 브라질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한국과의 경기에서 볼을 다투다 넘어진 뒤 고의적으로 그라운드에 앉아 시간을 지연하고 있다. ⓒ 유성호


일본이 아시아 축구에서 한국과 본격적으로 대등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한 역사는 1990년대 이후로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란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아시아 정상과 세계 무대를 꿈꾸던 한국 축구의 앞길을 번번이 가로막아온 난적이었다. 양 팀은 서로 영광과 상처를 주고받으며 팽팽한 경쟁 구도를 형성해왔다.

아시아 무대에서 한국이 상대 전적에서 열세인 팀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이란에게는 27전 9승 7무 11패로 뒤진다. 특히 이란 축구의 성지이자 원정팀의 악몽으로 불리는 테헤란(아자디 스타디움)에서는 2무 3패로 역사상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양 팀의 축구 악연은 무려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4년 9월 이란 테헤란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본선(당시는 A대표팀 출전)에서 한국은 차범근, 이회택 등 최고의 선수들이 총출동했음에도 이란에 0-2로 완패했다. 양 팀의 역사상 첫 맞대결이었다. 약 반세기에 이르는 한국축구의 '테헤란 징크스'가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후 양 팀의 라이벌 구도에 본격적으로 불이 붙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아시안컵부터였다. 1996년 아시안컵 8강전에서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한국은 알리 다에이에게만 4골을 내주며 2-6으로 참패했다. 한국 축구가 아시아 무대에 당한 가장 충격적인 참패 중 하나였다. 이 패배의 후유증으로 박종환 감독이 경질되는 결정적 빌미가 되기도 했다.

이 대회를 시작으로 한국은 이란과 아시안컵 8강에서만 무려 5회 연속(1996, 2000, 2004, 2007, 2011)으로 마주치는 기묘한 악연을 이어갔다.양 팀은 만날 때마다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연장전만 3회, 승부차기 1회. 96년을 제외하면 모두 한 골 차 이내로 승부가 갈린 접전이었다.

2000년 아시안컵(허정무 감독)에서는 연장전에 터진 이동국의 골든골에 힘입어 한국이 2-1로 신승했다. 2004년(조 본프레레 감독)에는 양 팀 합계 7골을 주고받는 난타전 끝에 3-4로 석패했다. 2007년(핌 베어벡 감독)에는 120분 동안 0-0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으나 승부차기에서 이운재의 선방에 힘입어 4-2로 승리했고, 지난 2011 아시안컵에서는 연장전에서 윤빛가람의 결승골로 1-0 승리를 거두며 우위를 점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혈전의 후유증 탓인지, 이 기간 동안 두 팀 모두 아시안컵 우승에 이르지는 못했다.

양 팀의 경쟁구도는 월드컵에서도 이어졌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과 2014 브라질월드컵에서 양 팀은 2회 연속 최종 예선에서 마주쳤다. 2009년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한국은 홈과 원정에서 이란에 두 번 모두 선취골을 내줬으나 박지성의 동점골에 힘입어 1-1 극적인 무승부를 거뒀다. 한국은 남아공 월드컵 예선을 당당히 무패 조 1위로 통과한 반면, 이란을 조 3위로 밀어내며 이란에게 월드컵 본선 탈락의 아픔을 선사했다.

브라질월드컵 최종 예선에서는 상황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최강희 감독이 지휘한 한국은 2012년 10월 16일 테헤란 원정에서 수적 우위를 살리지 못하고 네쿠남에게 결승골을 내주며 0-1로 패했다. 이듬해 설욕을 꿈꿨던 2013년 6월 18일 예선 최종전 울산 홈경기에서도 수비 실책으로 구차네자드에게 뼈 아픈 결승골을 내주며 2연속 무득점 패배의 굴욕을 당했다. 그나마 한국은 조 2위로 8회 연속 월드컵 본선 티켓을 사수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특히 이란의 원정 텃세, 양 팀 감독 간의 설전을 둘러싸고 대회 내내 계속된 신경전은, 최종전이 이란의 승리로 끝난 이후 카를로스 케이로스 이란 감독이 한국 벤치에 다가와 '주먹 감자'를 날리는 초유의 사태로 정점을 찍었다. 축구에서 일상적인 기 싸움 수준을 넘어선 한국 축구에 대한 심각한 도발이자 명예 훼손이었다. 40년간 누적되어온 양국 축구간의 첨예한 경쟁 의식이 어긋난 파행으로 치달은 희대의 사건이었다. 1년이 흘렀지만 한국 축구와 팬들은 아직도 당시의 모욕감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란과의 악연, 용서할 수는 있어도 잊을 수는 없다

불호령 14일 오후(한국시간) 요르단 암만 킹 압둘라 국제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요르단의 축구 평가전에서 슈틸리케 감독이 선수들에게 작전을 지시하고 있다.

지난 11월 14일 오후(한국시간) 요르단 암만 킹 압둘라 국제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요르단의 축구 평가전에서 슈틸리케 감독이 선수들에게 작전을 지시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은 이후 최강희 감독이 물러나고 홍명보를 거쳐 현재는 울리 슈틸리케 감독의 시대를 맞이했다. 이란은 케이로스 감독이 재계약에 성공하며 여전히 지휘봉을 잡고 있다. 케이로스 감독은 최근 한국과의 평가전을 앞두고 열린 기자회견에서 "당시는 월드컵 최종 예선이었기 때문에 감정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우회적이지만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용서는 할 수 있지만 잊어서는 안 될 것도 분명히 있다. 한국 축구는 2011년 아시안컵 8강전을 끝으로 지난 3년간 더 이상 A매치에서 이란을 이기지 못하고 있다. 최근 두 번의 월드컵 최종예선에서도 2무 2패로 열세다. 테헤란 원정 징크스는 무려 40년째 현재 진행형이다.

축구에서 단순히 숫자나 전력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여기에 있다. 한국 축구는 2000년대 이후 전반적으로 이란에 월등히 앞선다. 월드컵 성적이나 자국 리그의 위상, 유럽 무대에서 뛰는 선수의 숫자만 봐도 분명하다. 그러나 상대 전적과 피파 랭킹의 열세에서 보듯, 이란 축구의 저력은 분명히 무시할 수 없다.

한국은 정작 대표팀 간 A매치에서는 이란을 만날 때마다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란 특유의 선수비 후역습 축구와 원정 징크스에 알고서도 당했다. 분하지만 그것도 실력이다. 독일이나 스페인, 아르헨티나처럼 한국보다 한 수위의 강팀들을 만날때와는 또 다른 형태의 어려움과 압박감이 이란과의 경기 때마다 존재했다. 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면 한국에게 이란은 늘 천적이 될 수밖에 없다.

한국은 다가오는 내년 1월 호주 아시안컵에서 반 세기 만에 정상 탈환을 노린다. 이란과는 우승으로 가는 길목에서 언제든 마주칠 가능성이 높다. 어차피 이후에라도 이란과는 축구가 계속되는 한 월드컵 예선 등을 통해 계속 부딪힐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특유의 원정 텃세와 10만 홈팬들의 극성스러운 응원으로 악명 높은 이란 원정과 수비 축구를 체험해 보는 것도 아시안컵을 앞두고 중요한 의미가 있다. 새로운 출발을 꿈꾸는 태극전사들에게 흔한 평가전 이상의 귀중한 경험이 될 실전 모의고사인 셈이다.

무엇보다 한국 축구와 팬들에게 이제 이란은 '절대 지면 안 되는 상대'가 됐다. 마치 한일전을 치를 때 바라보는 정서와도 유사하다. 한국축구에 있어서 지난해 주먹 감자의 악몽을 진정으로 청산할 수 있는 가장 큰 '힐링'은, 결국 실력으로 이란을 극복하는 것뿐이다. 대망의 한국과 이란의 평가전은 오늘(18일) 오후 9시 55분(한국시각) 이란의 수도 테헤란의 아자디 스타디움에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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