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어나는 강력범죄 그 중에서도 미성년 범죄가 세계 각국의 고민으로 떠오른 지 벌써 십수 년째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2004년 밀양 집단성폭행사건을 포함해 미성년자들의 강력범죄가 줄을 이었고, 그럴 때마다 가해자에게 내려지는 약한 처벌과 피해자들이 오히려 더 큰 상처를 받게 되는 비상식적인 상황에 아연실색하게 되는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지 않던가.

이런 사정은 옆 나라 일본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인터넷을 통해 꽤나 알려진 1989년의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을 포함해 미성년자들의 강력범죄가 도를 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미성년 범죄의 처벌과 관련한 법률을 개정하려는 사회적인 움직임 역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일본 장르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은 이런 상황 속에서 쓰였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 국내에서 영화화된 건 <백야행>, <용의자 X>에 이어 이번이 벌써 세 번째다. 앞의 두 작품이 전형적인 장르소설이라면 <방황하는 칼날>은 청소년 강력범죄와 그 처벌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상당부분 투영된 문제적 소설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전작들을 통해 그리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던 이정호 감독이 이 소설의 영화화를 맡았는데 그는 원작자의 사견을 상당부분 덜어내고 소설의 결말을 달리 가져가며 사회적 공분을 조장하기 보다는 문제를 던지는 데 연출의 의도를 두었다고 말했다.

 상현과 딸. 영화 속 상현의 상상 장면

상현과 딸. 영화 속 상현의 상상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영화는 딸을 잃고 범인을 추적하는 아버지와 그를 뒤쫓으며 자신의 임무에 대해 고뇌하는 형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아내를 암으로 떠나보내고 방직공장에서 일하며 중학교에 다니는 외동딸과 단 둘이 살아가던 상현, 그러던 어느 날 버려진 목욕탕에서 그의 딸이 시체로 발견된다.

딸의 죽음 앞에 무력할 뿐인 평범한 아버지. 끝없이 무너져가던 상현의 앞으로 가해자들의 정보를 담은 한 통의 문자가 도착한다. 그렇게 평범했던 한 명의 아버지는 하나뿐인 딸을 잃은 피해자가 되고 다시 딸을 죽인 이들을 쫒아 복수하는 살인자가 된다.

영화는 상현 역을 맡은 정재영과 그를 뒤좇는 형사 억관을 연기한 이성민의 밀도 높은 감정연기에 힘입어 상당히 몰입도 있는 스릴러이자 드라마가 되었다. 단순한 사회적 문제제기를 넘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가해자들의 잔혹한 범죄행위와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 태도에 공분을 불러일으키게 함은 물론 그들에게 복수를 하는 상현에 공감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회적 공분을 조장하는 대신 중도적 입장에서 문제제기를 하는데 연출의 의도를 두었다는 감독의 변과 배치되는 부분이며 영화 후반부의 다소 이해되지 않는 캐릭터의 심경변화 및 결말을 떠올려 볼 때 감독의 연출이 지향하는 바가 확실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게끔 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역작 <그랜토리노>를 떠올리게 하는 결말은 자작나무숲에서 상현이 지쳐 쓰러지는 그 순간까지도 미처 예상하기 어려울 만큼 급작스러우며 공감하기도 어렵다.

이는 정재영이 연기한 상현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고민하는 장면이 크게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과 그의 감정선이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을 만큼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갑작스레 변화하는 그의 결정은 죽은 딸의 목소리가 들리는 당혹스런 장면에 이르러서까지도 반전 아닌 반전으로 느껴질 만큼 급작스럽고 어색하게 다가온다.

마치 국정원 대선개입사건을 특검을 도입해 철저하게 수사해야 한다고 외치던 이가 갑작스레 그녀의 당선 일주년을 축하한다는 인사를 보내는 것만큼이나 당혹스러운 일이다. 가능성은 둘 뿐이다.

 상현을 연기한 정재영, 조두식을 쫓는 상현.

상현을 연기한 정재영, 조두식을 쫓는 상현. ⓒ CJ 엔터테인먼트


첫째는 감독이 자신이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인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으며 정재영은 스스로 분노하는 상현이 되어 딸을 죽인 이들을 처형하다 스스로조차 이해할 수 없는 갑작스런 결말을 연기했다는 것, 둘째는 감독이 영화 전체를 체계적으로 구성하지 못해 설득력 없는 결말에 이르렀다는 것.

무엇이 진실이든 영화의 해석은 결국 관객들의 몫으로 돌아온다. 상현이 어째서 두식을 죽이지 않았는가? 그리고 영화 속에서 방황하는 칼날은 무엇을 말함일까? 상현이 두식을 죽인다 해도 그의 딸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그의 발길을 멈추게 만들 수 있었을까? 상현의 결정과 그를 바라보는 억관의 마음, 그리고 청소년 범죄를 대하는 사법체계, 또 우리 모두의 태도까지도 어느 정도는 방황하고 있는 듯하다. 방황하는 칼날이 머물 곳은 과연 어디일까?

사적 복수의 정당성과 미성년범죄의 형량에 대한 진중한 문제제기. 그러나 뚜렷하지 않은 연출의도가 상현이라는 캐릭터와 영화의 결말을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나는 그 부분이야말로 이 영화의 치명적인 결점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진정으로 방황하고 있는 건 이 영화가 아닐까?

덧1. 상현이 그토록 쫓았던 조두식. 그의 이름을 보면 언급하기조차 싫은 그 더러운 이름이 떠오른다. 어느 편에도 서고 싶지 않다고 수차례나 언급했던 감독이 어째서 이런 이름을 정한 것일까?
덧2. 농구장에서 소년을 지켜보는 형사. 피해자를, 자신의 범죄를 잊고 살아가는 소년. 그에게 자신의 잘못을 떠올리게 하는 방법이 고작 그 뿐인가 하는 무력감.

덧3. 차마 그놈이 스키장에 있으리라 생각할 수 없어 끝없이 외딴 펜션을 향해 걷던 아버지. 그리고 이어진 딸과의 대화. 이 장면이 마음에 들었다.
덧4.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결말. <그랜토리노>와 같은 방식이지만 이 영화의 결말은 숭고하지도 공감되지도 않는다. 상현의 결단이라기보다는 감독의 결정에 가까웠기에. 그렇다면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이정호 정재영 이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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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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