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공장'이라는 할리우드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 영화산업 메카다. 그런데 일견 모순되는 것처럼 들리는 두 단의 조합 속에서 우리는 할리우드가 두 얼굴의 이중적인 속성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할리우드는 '꿈'이라는 낭만적이고 희망적인 단어가 상징하듯 동시대의 사회와 사람들이 지닌 꿈과 은밀한 욕망을 예리하게 포착해 영화로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당대의 사회와 사람들이 지닌 꿈과 악몽이 무엇인지 읽어낼 수 있다. 동시에 산업화와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공장'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할리우드는 그러한 '사람들의 꿈'을 막대한 자본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상품으로 만들어 전 세계로 수출하는 곳이기도 하다.

로보캅이 다시 돌아온 이유

1987년 12월 로보캅 포스터 1987년 12월 24일 대한극장에서 개봉하여 서울관객 45만여명을 동원한 '로보캅'의 포스터

▲ 1987년 12월 로보캅 포스터 1987년 12월 24일 대한극장에서 개봉하여 서울관객 45만여명을 동원한 '로보캅'의 포스터 ⓒ 지미필름


그러나 오늘날 할리우드의 영화가 세계적으로 호소력을 갖게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소비·향유되는 이유에는 할리우드의 막대한 자본과 뛰어난 기술력도 있지만 그들의 끊임없는 소재 개발과 노력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할리우드는 사람들이 소비할 수 있는 잘 팔리는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와 새로운 소재를 찾아내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리우드의 상상력은 언제나 시대를 앞서간다. 생체공학이 아직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이전부터 할리우드는 SF영화를 통해 복제인간과 인간, 기계와 인간의 관계 등에 대해 성찰해왔다. SF소설의 대가 필립 K.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을 꿈꾸는가?>를 영화화한 1982년작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복제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성찰한 수작이다.

이 영화는 탈출한 복제인간들과 그들을 죽이려는 인간 킬러의 이야기를 통해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킬러와, 인간보다 더욱 인간적인 복제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을 죽이려는 킬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져 희생하는 복제인간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과연 인간을 인간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물으며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된다. 비교적 최근 작품인 <아일랜드>에서도 이러한 주제의식은 이어진다.

<터미네이터>시리즈는 기계와 인간의 관계를 성찰하는 영화이다. <터미네이터2>에서 최첨단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낸 액체금속 인조인간인 T-1000은 아무런 거리낌과 죄책감 없이 인간을 살육하는 끔찍한 악몽 같은 기계다. 반면 아놀드 슈워제너거가 주연한 T-101은 비록 구형이지만 인간처럼 학습능력을 통해 점차 인간화 되고 결국에는 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기계로 등장한다.

이러한 미래예시적인 SF영화들은 세기말적인 분위기를 타고 1980~1990년대에 활발하게 만들어졌다. 주로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그리는 이런 영화들은 이를 통해 기계만능주의에 대한 경고와 휴머니즘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활발하게 창작되어오던 SF영화들이 최근 한동안 뜸했었는데 리메이크를 통해 반가운 얼굴이 다시 돌아왔다. 1980년대 후반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끌었던 <로보캅>이 바로 그것이다. 벌써 9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승승장구하는 <겨울 왕국> 신드롬에 제동을 걸 수 있을지 주목된다.

할리우드는 끊임없이 새로운 소재를 찾지만 때로는 이미 만들어진 영화를 시대에 맞게 다시 리메이크를 하기도 한다. 리메이크 된 영화 중에는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제작한 것처럼 보이는 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영화도 존재하는 반면에, 시대의 변화와 흐름을 반영해 다시 훌륭하게 재탄생된 영화도 존재한다.

리메이크된 <토탈 리콜>같은 영화가 원작의 주제의식을 약화시키고 볼거리에만 치중하여 만족스럽지 못한 리메이크 영화라면, 이번에 리메이크 된 <로보캅>은 후자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리메이크된 <토탈 리콜>처럼 화려한 액션과 볼거리를 기대한 사람들은 다소 실망할 수도 있지만 <로보캅>은 그보다 좀 더 중요하고 다양한 메시지를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에 만들어졌던 <로보캅>시리즈에 등장하는 로보캅은 <블레이드 러너>에 등장하는 복제인간들처럼 인조인간도 아니다. <터미네이터>시리즈에 등장하는 터미네이터처럼 기계도 아닌 인간과 기계가 합일된 존재이다. 이 점은 로보캅을 이야기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이는 로보캅에게 끊임없이 자기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의문을 갖게 만들고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된다. 이러한 주제는 리메이크된 새로운 <로보캅>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자꾸 인간이 되려는 머핀... 그의 운명은?

주인공인 알렉스 머피(조엘 킨나만 역)는 좋은 아빠이자 사명감이 넘치는 경찰이다. 그는 동료인 잭 루이스와 함께 마약거래를 추적하던 중 동료들의 배신으로 폭탄 테러를 당해 전신에 심각한 부상을 입는다.

거대한 군수업체이자 로봇개발업체인 옴니코프는 로봇으로 군인들을 대체하여 세계 위험지역에서 치안업무를 맡는다. 그리고 가장 큰 시장인 미국 내에서 경찰을 대신할 로봇들을 팔려고 하지만 이를 막는 법안을 폐지하고 여론을 반전시키기 위해 부상당한 머피를 기계로 개조시켜 영웅으로 만들고자 한다.

 영화 <로보캅> 한 장면

영화 <로보캅> 한 장면 ⓒ 소니픽쳐스 릴리징 월트디즈니 스튜디오스 코리아


노튼 박사는 머피의 뇌와 폐, 그리고 한쪽 손만 남긴 채 나머지 부분들을 모두 기계로 대체한다. 머피는 처음에는 자신의 현실과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냥 죽게 해달라고 말하지만 가족들을 생각하며 자신의 몸을 인정하기 시작한다. 머피는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

그의 몸에는 인간보다 기계 면적이 더욱 크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인간인가, 기계인가? 영화는 그런 머피의 모습을 통해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머피는 프로그래밍된 대로 임무를 수행하고 기계적으로 신속하게 상대를 사살한다. 하지만 그는 완전한 기계가 아니며 이 때문에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고민을 한다. 머피와는 달리 완전한 기계인 로봇과의 테스트에서 로봇은 아무런 고민과 거리낌이 없이 인간을 죽이지만 머피는 망설이고 고민한다. 이러한 모습은 어린아이를 인질로 잡은 악당들과의 대치에서 더욱 크게 드러난다.

로봇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적을 사살하지만 머피는 혹시 어린아이가 다칠까 봐 고민하다가 로봇보다 늦는다. 사실 이러한 면이 머피가 감정을 지닌 인간이고, 그를 인간으로 규정하게 하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거대 기업인 옴니코프는 로봇보다 시간이 늦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이러한 머피의 감정을 불필요한 '오류'로만 규정짓고 이를 없애려고 한다.

리메이크된 영화 <로보캅>은 이러한 옴니코프의 모습을 통해 자본주의와 그들의 성과만능주의에 대한 예리한 비판을 하고 있다. 옴니코프의 사장인 레이몬드 셀러스를 비롯한 기업가들은 머피를 하나의 인간이 아닌 기계로 규정지으며 그를 프로그램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완전한 기계로 만들고자 한다.

오직 속도와 성과 등 결과만을 중요시 하는 그들은 약물과 뇌수술로 머피의 감정과 인간성을 제거해 그를 완벽한 기계로 만들고자 한다. 옴니코프라는 거대 기업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속의 차갑고 속물적인 인간들에게는 성과와 속도만이 중요할 뿐, 감정이나 인간성은 속도를 더디게 하고 성과를 낮추는 요소에 불과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머피를 가족들과도 만나지 못하게 하고, 나중에는 멀쩡한 머피를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죽여서 제거하려고 한다. 이처럼 인간적인 감정을 오류라고 규정하여 제거하려는 것은 모든 인간의 감정이 통제된 디스토피아적 사회를 그리는 영화 <이퀄리브리엄>을 연상시킨다.

이 영화는 모든 감정이 제거된 삶을 과연 인간적인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이 영화에서 사람들은 아무런 표정이 없고 가족이 잡혀가는 상황에서도 무덤덤할 뿐이다. 그러나 그런 존재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기계에 불과하다. <로보캅>의 머피 역시 모든 감정이 제거된 이후에 정말 기계처럼 변해 버린다. 가족들도 알아보지 못하고 함께 목숨을 걸고 마약거래상을 수사했던 동료 루이스에게도 기계적으로 대꾸할 뿐이다.

그러한 머피의 변화를 영화 내에서는 그의 헬멧을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머피의 헬멧은 평상시에는 올라가 있어서 얼굴 전체가 보이다가 위협 상황이 닥치면 자동으로 감지하여 내려와서 눈과 코를 가리는 장치이다. 그러나 옴니코프가 머피의 인간성을 제거한 이후에 그의 헬멧은 항상 내려가 있다. 이는 그의 얼굴을 가려 그가 인간성을 상실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고, 그가 자신의 눈이 아닌 기계를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보는 존재가 되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또한 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기계)로 변해버렸음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또한 원작과 은색의 로보캅과는 달리 옴미코프가 디자인한 로보캅은 검정색이다. 이는 원작에서의 로보캅이 과학자와 정부에 의해 공공선의 임무를 처리하는 존재에서 그 중간에 기업이 끼어든(자본에 오염된), 그래서 더욱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로 변해버린 것을 상징한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에서 사장 셀러스가 제거된 후에 로보캅은 다시 은색으로 돌아온다.

<로보캅>은 미국 내 극우 보수주의자들과 그들의 제국주의를 풍자하고 비판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초반에 옴니코프의 로봇들이 중동지역 치안활동을 하는 모습과 그것을 방송하기 위해 촬영하는 모습이 나온다. 거대하고 위압적인 로봇들은 위협적인 빨간 불빛을 뿜어대면서 아이러니 하게 "위험하지 않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방송국에서는 진행자인 팻 노박(사무엘 L. 잭슨 역)이 로봇들과 그들의 성과를 극찬하며, 로봇에 의해 통제 받는 주민들도 안전해졌으니 행복할 거라고 이야기 한다.

그의 발언은 과거 제국주의 시절에 개발과 문명화라는 미명하에 다른 나라에서 자행했던 학살과 착취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곧 이어서 목숨을 건 자살 테러리스트들의 테러에 의해 이러한 가장된 평화의 허위가 드러난다. 로봇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칼을 든 어린아이를 무참하게 학살한다. 그러나 노박은 이를 무시하며 로봇들 덕분에 군인들이 죽지 않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무서운 자본의 속성

과연 노박은 보수주의자답게 철저한 통제를 좋아한다. 그는 미국 내에서도 로봇들이 경찰을 대치하여 치안을 유지하여 범죄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는데, 그는 로봇들이야말로 아무런 이견이나 망설임이 없이 공정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이 중요한 것이고 인간을 인간이게끔 만드는 요소인지를, 그리고 오히려 단일성이란 것은 획일성의 또다른 말이고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모른다. 로봇은 아무런 생각을 하지 못하는 좀비들처럼 망설임이 없이 프로그래밍된 것만을 따른다. 그래서 영화 내에서도 그들은 인간성을 상실하게 된 이후의 머피를 "좀비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거대한 힘이 악한 사람들에게 넘어간다면 얼마나 큰 비극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지난 역사의 비극을 통해 이미 알고 있다. 히틀러의 홀로코스트가 그랬고, 스탈린의 모스크바 재판이 그랬고, 폴 포트의 킬링 필드가 그랬다. 2차 대전 당시 독일 국민들은 마치 프로그래밍된 로봇이나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좀비들처럼 히틀러의 명령대로 잔인한 학살을 거리낌없이 자행했다. 영화 내에서도 로보캅의 통제권은 비도덕적이고 냉혹한 기업가의 손에 달려있다. 그렇다면 언제든 로보캅의 힘을 자신의 이득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다.

과연 옴니코프는 통제가 잘 안 되는 머피를 죽여 불안요소를 제거함과 동시에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 여론을 반전시켜 미국에서 로봇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법안을 폐지하려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음모를 저지하는 것은 인간성을 되찾은 로보캅과 노튼 박사의 도덕성과 양심이다. 머피는 프로그램 된 명령을 어기고 그들의 음모를 저지하러 달려나가고, 노튼 박사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화려한 성공 이면의 추악한 진실을 증언한다.

 로보캅의 활약에 환호하게 되는 시민들.

로보캅의 활약에 환호하게 되는 시민들. ⓒ 로보캅


머피에게 인간성을 되찾게 해주는 것은 바로 그의 아내와 아들이라는 가족의 존재이다. 노튼 박사에 의해 모든 인간성을 제거당한 머피는 자신이 사고를 당했을 때의 장면을 보고 감정을 되찾게 되고, 아들과 아내의 모습을 계속해서 돌려보면서 다시 인간성을 되찾는다. 머피는 옴니코프의 음모를 막기 위해 회사 내로 침입해 거대 로봇들과의 싸우고, 그때 위기에 빠진 머피를 구해주는 것은 바로 동료인 루이스 형사의 희생이다.

이러한 머피의 가족과 루이스 형사의 희생, 그리고 노튼박사의 증언이 상징하는 것은 인간성과 휴머니즘이다. 이러한 것들은 차갑고 냉혹한 옴니코프의 기업가들 눈에는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한 일로 보일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머피는 공격할 수 없게 프로그래밍된 명령을 어기고 옴니코프의 사장인 셀러스를 총으로 쏜다. 이 장면은 휴머니즘이 차가운 기계를 이기는 것을 상징함과 동시에 머피가 비로소 완전한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로봇들을 위한 법이 통과하지 못하자 진행자 노박은 불같이 화를 내며 욕설을 한다. 그는 반대파들에게 "그만 징징대. 너희가 뭐라고 하든 미국은 세계 최고의 국가이다"라고 말하는데 뒷배경으로 성조기가 펄럭이는 모습이 나온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영화 <로보캅>이 미국 내 극우 보수주의자들을 상징하는 노박의 모습을 통해 그들을 풍자하고 비판하고 있음을 또다시 깨닫게 된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평화유지라는 명목하에 전쟁을 자행한다. 영화는 노박의 모습을 통해 그들이 얼마나 이중적이고 편협하고 경직된 사고를 지니고 있는지를 알게 해준다.

이처럼 영화를 제국주의와 극우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으로 보다 보면 로보캅이 단순히 기계와 인간의 혼합이 아닌 인종간의 혼혈 혹은 소수인종을 상징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까만 색으로 칠해진 수트를 입고 경찰서로 돌아온 머피에게 그의 흑인 동료인 루이스는 "이제 나와 같은 색이 되었군"이라고 이야기 한다.

과연 극우주의자들이나 제국주의자들에게 로보캅으로 대표되는 유색인종은 그들과 동등한 인간이 아닌 마치 기계처럼 이용하다가 필요가 없으면 버려지는 존재에 불과하다. 머피 역시 여론을 위해 이용당하다가 쓸모가 없어지자 간단하게 버려진다.

옴니코프의 무기 전문가 매톡스와 같이 단일성과 순혈(완전한 인간 혹은 완전한 기계)을 좋아하는 그들은 인간과 기계의 다양성과 혼혈을 상징하는 로보캅을 좋아하지 않고 끊임없이 제거하려 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순혈은 유전적 결함이 많고 기형을 낳을 확률이 높지만 혼혈은 보다 건강하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오늘날 우리사회에서도 유효한 질문일 수 있다. 단일민족의 신화에서 벗어나 다문화사회로 진입한 한국사회에서 우리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노동력이 필요할 때는 적극적으로 이용하다가 이제 와서 배척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다. 마치 옴니코프가 로보캅에게 그랬듯 말이다.

이처럼 새롭게 리메이크 된 <로보캅>은 기존의 원작에서 다뤘던 주제에 시대의 변화를 반영해 중요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물론 원작과 마찬가지로 리메이크된 <로보캅>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정체성에 대한 의문제기이다. 로보캅이 다른 SF영화들에 등장하는 복제인간이나 안드로이드들과 구분되는 가장 큰 점은 로봇이면서 인간이고, 인간이면서 로봇이라는 점이다. 인간임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다움, 과연 무엇이 규정하는가

미국 건국 200주년을 맞아 아이작 아이모프가 쓰고 동명으로 영화화 된 소설 <바이센테니얼 맨>은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로봇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성찰한 영화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로봇 앤드류는 인간이 되고 싶어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앤드류는 법원에서 위원장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앤드류 : "위원장님도 인공신장을 이식하지 않았나요? 그렇다면 위원장님도 부분적으로는 기계라고 할 수 있지 않나요?"
위원장 : "그렇지."
앤드류 : "그렇다면 저도 부분적으로는 인간입니다."

앤드류는 인간의 장기와 혈액을 이식 받고 영원히 사는 것을 포기한 채 인간으로서 죽어간다. 이는 어쩌면 <로보캅>의 옴니코프의 사장 셀러만처럼 냉혹한 사람이 본다면 이해할 수 없는 바보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러한 점들을 오류라고 규정하고 제거하려고만 한다.

 조세 파디야 감독의 2014년 <로보캅>

조세 파디야 감독의 2014년 <로보캅> ⓒ 소니픽쳐스릴리징월트디즈니스튜디오코리아


우리는 때때로 셀러만처럼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을 보고 판단하려 한다. <로보캅>의 머피에게는 인간의 몸으로 남아있는 부분보다 기계가 더욱 많다. 영화 <아이언맨>의 주인공 토니 스파크도 머피처럼 기계수트를 입지만 그는 자신이 기계인지 인간인지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지는 않는다. 물론 그는 머피와는 달리 기계가 없이도 살아갈 수 있지만 머피는 모든 기계를 떼어내는 순간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 토니 스파크에게 기계란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몸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는 일종의 도구일 뿐이다.

그러나 포스트 휴머니즘 이론가들은 우리의 몸 역시 다른 도구들처럼 우리가 태어나서 처음 사용법을 익혀나가야 하는 도구일 뿐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머피의 기계로 된 몸 역시 원래 타고난 몸과 조금 다르게 생긴 도구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기계를 이용한 뛰어난 임무수행능력을 통해 범법자를 소탕하면서도 인간적인 따뜻함을 잃지 않는 머피는 기계와 인간 간의 이상적인 화합과 조화를 상징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몸의 대부분이 기계이고, 자신이 기계인지 인간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머피보다 더욱 차갑고 냉혹한 기계를 닮은 것은 오히려 셀러만, 노박과 같은 인간들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야 말로 더욱 위험하고 인류사에 비극을 가져왔던 사람들의 모습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가 머피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인간성을 규정하는 것은 단순히 겉모습이 아닐 것이다. 이기적이고 속물적인 사람들의 기계적인 눈에는 바보스럽게 보일 지도 모르는 앤드류의 결정, 노튼 박사의 양심선언, 루이스 형사의 희생 이러한 행동들이야 말로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요소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점점 냉혹한 현실 속에서 기계화되고 비인간화 되어가는 우리들에게 던지는 이 영화의 중요한 메시지일 것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팔을 잃은 기타리스트는 노튼 박사에게 기계로 된 팔을 이식 받고 기타를 연주하려 하지만 연주할 때마다 감정이 고조되어 그의 기계팔은 자꾸 오작동을 일으킨다. 이처럼 감정이란 기계의 관점에서 볼 때는 단순한 오류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타리스트는 "감정이 없이는 연주를 할 수 없어요"라고 이야기한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연주는 훌륭한 연주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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