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4일 개봉한 영화 <용의자>의 한 장면 영화 <용의자>의 지동철 역할을 맡은 배우 공유.

▲ 지난해 12월 24일 개봉한 영화 <용의자>의 한 장면 영화 <용의자>의 지동철 역할을 맡은 배우 공유. ⓒ 그린피쉬


장르를 명확히 규정하고 출발하는 영화는 해당 장르의 기본 속성을 충실히 담아내야 한다. 코미디 영화는 반드시 웃겨야 하고, 공포 영화는 반드시 무서워야 한다. 그렇다면 액션 영화는?

액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상황을 옮겨다 놓은 것 같은 현장감, 물리적 액션의 합이 만들어내는 박진감 그리고 그 사이에 흐르는 긴장이다. 액션 영화를 고르는 관객은 액션 영화만이 줄 수 있는 이러한 쾌감을 만끽하기 위해 '싸움 구경'에 기꺼이 돈을 지불한다. 그런 점에서 지난 해 12월 24일 개봉한 영화 <용의자>는 적어도 관객의 시간과 돈을 아깝게 하지 않는 예의있는 영화다.

북한으로부터 버림받은 채 아내와 딸을 잃은 지동철(공유 분)은 남한으로 망명해 대리운전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아내와 딸을 죽인 리광조(김성균 분)를 찾고 있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박 회장(송재호 분)의 집에 들렀다가 우연히 박 회장의 살해 현장을 목격한 지동철은 박 회장의 물건을 받게 되고, 이후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어 쫓기는 신세가 된다.

국정원 실장 김석호(조성하 분)는 지동철이 박 회장으로부터 건네받은 물건을 찾기 위해 방첩 분야 전문가 민세훈(박희순 분) 대령을 수사에 투입시키고 그 과정에서 지동철을 대상으로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던 프로덕션 PD 최경희(유다인 분)를 잡아들인다. 민세훈은 지동철을 쫓고, 지동철은 리광조를 쫓는 형국에서 김석호의 음모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용의자>는 한국 액션 영화중에서 썩 괜찮은 만듦새를 자랑하는 영화다.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지동철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연이어 민세훈을 전투기에서 떨어뜨리며 둘의 대결구도를 암시하는 동시에 액션에 대한 자신감을 내비친다. 이어 지동철을 북한군 최정예 요원으로 묘사하기 위해 아찔한 암벽등반과 큰 힘 들이지 않고 제압이 가능한 맛보기용 주체격술을 소개하면서 영화에서 '액션' 자체로 활약할 지동철에 대한 관객의 기대감을 부풀린다.

영화 속 액션은 두 장면을 통해 절정에 다다른다. 하나는 지동철과 상대가 지하철 계단에서 맞붙었던 주체격술 전면전이며, 다른 하나는 지동철이 자신의 기막힌 운전 능력을 과시하며 좁은 계단을 후진으로 달아났던 카체이싱 장면이다. 특히 후진을 활용해 연출한 고난이도의 카체이싱 장면은 한국 영화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참신하다. 계단과 자동차 바퀴의 마찰로 빚어지는 덜컹거림은 마치 내가 그 차 안에 타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현장감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지동철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가

지난해 12월 24일 개봉한 영화 <용의자>의 한 장면. 영화 <용의자>의 지동철 역할을 맡은 배우 공유.

▲ 지난해 12월 24일 개봉한 영화 <용의자>의 한 장면. 영화 <용의자>의 지동철 역할을 맡은 배우 공유. ⓒ 그린피쉬


다만, 이 영화의 문제는 액션 하나에만 지나치게 몰두했다는 데에 있다. 공들여 찍은 액션장면이 무엇을 위한 액션이었는지 자꾸 떠올리게 하는 데에 있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액션의 동선에 따라 이야기를 껴 맞춘 느낌을 풍긴다. 이 영화의 액션은 서사에 흐름에 따라 구현된 것이 아니라 액션을 위한 액션으로, 심하게는 공유를 위한 액션으로만 연출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지동철의 목표는 아내와 딸을 살해한 리광조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과 관련한 모든 이를 척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영화 속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액션 장면은 이러한 지동철의 목표에 부합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액션장면은 지동철과 지동철을 쫓는 자들 간의 추격전과 싸움에만 국한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액션 장면은 반복적으로 소모되었으며 지동철이 무엇을 위해서 싸우고 있는지를 관객으로 하여금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사실 영화에서 가장 힘 있게 그려져야 할 액션 장면은 지동철과 리광조의 격투 장면이었다. 리광조가 어떤 이유로 인해 지동철의 아내와 딸을 살해했다는 오해를 받게 되었는지, 지동철에게 있어서 아내와 딸의 존재가 어떤 의미였는지 두 인물의 몸의 대화는 이를 절절하게 표현해야 했다. 하지만 이들의 격투는 김석호의 음모에 가려져 그 의미가 충분히 담기지 못했고, 둘이 맞붙게 되는 과정도 작위적으로 그려져 아쉬움을 자아냈다.

액션 장르의 쾌감을 영화의 가장 꼭짓점에 둔 <용의자>는 그 선택에 따라 영화의 장단점이 명확해진 경우다. 한정된 자본과 기술력에도 불구하고 장르 영화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보여주며 한국 액션 영화에 발전가능성을 제시했다는 데는 이의가 없지만 그로 인해 이야기와 배우들의 연기는 빛을 보지 못했다. 액션은 선명했지만 이야기와 배우는 흐릿했다.

영화는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북한군 요원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액션 장면만 놓고 보면 굳이 써먹을 대로 써먹은 북한군 요원을 또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나 싶다. 더군다나 영화는 다른 북한 소재 영화들과도 큰 차별점을 드러내지 못한다. 이런 영화에 기본설정으로 등장하는 누군가를 향한 복수와 이념에 대한 갈등은 <용의자>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답습됐다. 결국 영화 속 이야기는 액션을 위한 부속물일 뿐, 이렇다 할 메시지도 감동도 전달하지 못했다.

공유를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는 성실하고 무난하지만 인상 깊지 않다. 공유는 액션 장면에서는 몸으로, 감정을 끌어올려야 하는 장면에서는 애절한 눈빛으로 승부했지만, 몇 줄 안 되는 대사를 북한 사투리와 표준어를 섞어 하며 몰입을 방해했다. 박희순과 조성하의 연기는 북한 소재 영화에서 익히 봐왔던 인물을 그대로 모방한 것처럼 관습적이고, 리광조로 분한 김성균은 나름 중책을 맡았음에도 적은 분량에 노출되어 기대보다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는 배우들의 연기력 문제는 아니다. 역할을 매력적으로 그리지 못한 연출의 잘못이 크다. 특히 지동철과 다른 인물 간의 관계 설정은 헐거운 지점이 많다. 지동철과 리광조를 비롯해 민세훈, 최경희와 지동철의 관계는 민세훈, 최경희가 얻게 될 이익에 따라 일방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민세훈과 최경희가 지동철을 돕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민세훈은 과거 지동철로부터 받은 도움에 그저 보은할 뿐이고, 최경희는 지동철을 통해 기자로 복직하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비쳐지고 있다. 결국 이들의 진정성은 이런 헐거운 묘사로 가려진다.

액션을 빼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용의자>의 액션은 종류, 스타일, 스케일 면에서 굉장한 만족을 준다. 하지만 카타르시스에 다다른 액션 장면이 이미 전반에 모두 노출되어버림으로써, 후반부의 액션 장면은 전반부만큼 못하다는 인상과 함께 선명하게 기억되지 못한다.

또한 재미를 봤던 카체이싱과 상대만 바꿔 진행되는 주체격술 격투 장면들은 비슷한 방식으로 반복되면서 감흥이 처음만 못한 것도 사실이다. 지동철이 상대를 일방적으로 제압하며 문이나 창을 뚫고 장소만 옮긴 채 펼친 액션은 누가 때리고 누가 맞았는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디테일이 살아있지 않은 점도 아쉽다.

결국 <용의자>의 액션은 한국 액션 실험 영화에 그쳤고, 그 정도에 만족하는 관객의 여가시간을 오락적으로나마 훌륭히 채우고 있을 뿐이다. <용의자>는 재밌는 장르 영화이고 상업 영화이지만, 좋은 영화는 되지 못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종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jksoulfilm.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용의자 공유 박희순 조성하 김성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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