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이 줄줄 흐른다. 주체할 수 없다. 이유를 꼭 집어 말하기 힘들다. 그래서 내가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언제였던가 생각해 본다. 아! <와이키키브라더스>가 생각났다.

2001년 가을비가 추적거리던 날, 을지로에 나갔다가 제목에 홀려서 우연히 봤던 영화다. 지방의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며 근근이 살아가던 삼류밴드 멤버들의 이야기다. 자기 파멸적 삶에 지쳐 하나둘 떠나던 밴드의 멤버들 황정민과 박원상, 룸 싸롱의 밴드마스타가 되어 손님들의 요구로 홀딱 벗은 알몸으로 기타 반주를 하던 주인공 이얼, 트럭운전을 하며 채소를 파는 오지혜 등의 모습들에서 뭘 본 것인지,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그렇게 눈물을 흘렸다.

당시 IMF를 계기로 오히려 벤처 붐이 일면서 강남으로 몰려든 돈은 부익부 빈익빈만 심화시켰다. 주식 열풍에 편승한 내 아버지도 IMF 이후 유행하던 명예퇴직을 하면서 받은 꽤 많은 돈을 잃게 된다. 그래서 난 한 푼 없이 빚으로 결혼생활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눈물이 난 것은 그런 이유도 한몫했을 것이다.

사회구성원의 다수를 차지하는, 이른바 '삼류'들이 소시민으로 사는 삶마저도 제대로 향유할 수 없게 만드는 현실이 개탄스러워서였을까. 흐르던 눈물은 오지혜가 나이트클럽의 무대 위에서 부르던 엔딩곡 <사랑밖에 난 몰라>에서 절정에 이른다. 개떡 같은 세상을 향해 사랑밖에 난 모른다니, 이 역설에 어떻게 화답해야 하는가 말이다.
돼지국밥 집 모자와 송우석 너무 가난해서 국밥 집 외상값을 떼먹고 달아났던 송우석은 7년만에 변호사가 되어 그들 앞에 나타난다. 운명적인 만남이다.

▲ 돼지국밥 집 모자와 송우석 너무 가난해서 국밥 집 외상값을 떼먹고 달아났던 송우석은 7년만에 변호사가 되어 그들 앞에 나타난다. 운명적인 만남이다. ⓒ 위더스필름


<변호인>을 보는 중에 눈물샘이 터진 이유는 다른 지점에 있다. 사회구조적 문제로 기인하긴 했겠지만 <와이키키브라더스>를 보며 흘렸던 눈물이 자기 연민에 가까웠다면, 이 영화 <변호인>은 대국적이다. 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평등해야 할 법이 도대체 어쩌다가 대부분의 국민들이 두려워하게 된 왜곡된 가치가 되어 버린 걸까. 영화의 주인공을 통해 관객은 공포와 억울함이 결국 분노가 되는 일련의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법을 누르는 무자비한 힘 때문이다.

전 국회의원 노회찬이 우리나라의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한 법이 아니라 만 명한테만 평등한 법 아니냐?"라고 법조계를 향해 한 힐난에 웃기만 할 수 없는 것은, 영화 속 당시나 삼십 년이 지난 오늘이나 하나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다.

영화 <변호인>의 시대적 배경은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의 저자, 문영심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박정희의 정치적 아들'인 전두환 정권초기다. 군사정권의 시녀가 된 사법부의 서슬이 퍼런 시절임에도, 변호사 송우석(송강호 분)의 표정이나 말은 단호하고 엄정하다. 판사와 검사, 경찰이 아무리 비틀고 제멋대로 해석하고 심지어 생략해 버리기도 한 법조문을, 송 변호사는 하나하나 드러내어 살아 숨쉬게 한다.

어떤 협박과 시련이 눈앞에 펼쳐져도 절대로 굽히지 않는다. 오히려 그럴 때마다 판사와 검사의 눈과 귀에 더욱 명확한 증거와 머릿속에 가득한 법조문을 내밀면서 냉정하게 조목조목 따진다.
고문경찰 차동영 주인공 송우석과 대극점에 있는 인물, 사실은 군사정권의 하수인일뿐이다. 곽도원의 연기는 송강호만큼 우월하다.

▲ 고문경찰 차동영 주인공 송우석과 대극점에 있는 인물, 사실은 군사정권의 하수인일뿐이다. 곽도원의 연기는 송강호만큼 우월하다. ⓒ 위더스필름


피도 눈물도 없다고도 하는 법은 그 법을 지키는 사람들에겐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야 한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일당에게 협조를 자처한 검사와 경찰들은 영국의 역사학자 이에이치카(E.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과 같은 양서들을 불온서적으로 규정하고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토론하던 대학생들을 이적단체로 몰아 영장도 없이 체포하여 부모에게도 알리지도 않은 채, 두 달 가까운 기간 동안 고문하고 엉터리 자술서를 쓰게 한다. 이른바 '부림사건'이다.

영화 속 고문 장면은 끔찍하다. 쇠몽둥이에 젖은 헝겁을 감아 때리기, 물고문, 막대기에 사람을 매다는 통닭구이, 얼굴을 헝겁으로 가린 채 눕혀 놓고 형사들이 먹다 남은 라면국물을 들이 붓기 등 보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는 장면이 연출된다.
진우와 송변호사 부림사건에 연루된 진우는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가까스로 송변호사를 만나게 된다

▲ 진우와 송변호사 부림사건에 연루된 진우는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가까스로 송변호사를 만나게 된다 ⓒ 위더스필름


불법적이고 반인륜적인 짓을 저지르고도 공안경찰 차동영(곽도원 분)은 소리친다.

"니들이 뭘 알아? 니들이 발 뻗고 편안하게 자는 동안 내가 저런 빨갱이새끼들 잡아 족치니까 사회가, 국가가 굴러가는 거야. 지금은 휴전이야 전쟁 중이라고, 이것들은 전쟁이 끝난 줄 알아요. 북한이 언제든 쳐들어 올 수 있다고!"

이러한 공포, 말도 안 되는 공안 논리로 무장한 판사, 검사, 경찰들, 그들의 협박은 오히려 부동산 등기와 세법을 전문으로 하던 변호사 송우석을 인권전문변호사로 변모시킨다. 가난을 벗어나서 모처럼 떵떵거리며 살고 싶던 송우석은 시국사건에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요트를 사서 88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하고 싶을 정도로 순진한 애국시민이었다. 너무 가난해서 국밥 값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첫 아들 출산에도 병원비를 못 내던 청년은 열심히 돈 벌어서 좋은 일에도 쓰면서 잘 살고 싶었다.

등기전문변호사 상고출신 송우석은 판사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와 부동산 등기관련 업무를 하고 세법전문변호사가 된다

▲ 등기전문변호사 상고출신 송우석은 판사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와 부동산 등기관련 업무를 하고 세법전문변호사가 된다 ⓒ 위더스필름


시국사건을 맡게 되면서는 푸르던 하늘빛이 잿빛이 된다. 가족에게도 협박 전화가 걸려오고 아무때고 사무실에 국세청이 쳐들어온다. 법대로 하는데도 힘 앞에서는 소용이 없다. 변호사한테도 저렇게 하는데 당시 시민들이 어떻게 저항할 엄두를 낼 수 있었을까 싶다.

12년 만에 영화를 보면서 실컷 울었다. 이래서 영화를 혼자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주인공이 가난에서 탈피하는 순간, 인권변호사로 거듭나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는 순간, 법정에서 피고 아닌 피고들을 위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변론을 하는 순간마다 뜨거운 가슴으로 연기하는 송강호가 심금을 울린다.

송우석이 이른바 '집시법' 위반으로 시국사범이 되어 피고인석에 앉아 있던 마지막 순간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서서 <사랑밖에 난 몰라>를 부르던 12년 전 오지혜를 떠오르게 한다. 진실과 원칙에 대한 '사랑' 밖에 모르던 '그'와 함께.

송강호 송우석 차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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