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스페셜 <진진>의 한 장면

드라마스페셜 <진진>의 한 장면 ⓒ KBS


학창시절, 한번쯤 친해 보이는 무리에 끼어들고 싶어하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특히 무리 속에 친하게 지내고 싶던 아이가 있을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 아이가 부담스럽지 않도록 그애 옆에 있는 친구를 공략해 그애에 대한 정보를 알아간다.

KBS 2TV <드라마 스페셜-진진>(이하 <진진>)에서 유진(신소율 분)은 이 행로를 영리하게 밟아가는 듯이 보인다. 태석(김다현 분)에게 다가가기 위해 그와 친한 친구인 하진(윤진서 분)에게 관심을 표현하며 서서히 태석에게 접근하려는 시도를 보면 말이다. 물론, 이는 철저히 하진의 시각으로 재구성된, 십년 전 그들 그룹에 느닷없이 끼어든 유진에 대한 묘사다.

떠오르는 신예 작가로 유명세를 타던 진진(장유진이 본명)이 갑작스레 자신의 집에서 이상한 자세로 죽어 있던 게 과거회상의 발단이 된다. 그녀의 죽음의 배후를 파헤쳐가며 십년 전 이 무리들이 진진과 어떤 인연을 맺었는가에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이다.

"유진이, 제가 죽였어요"라고 느닷없이 고백한 하진인 터라 그녀의 자백에, 그녀의 시점으로 십년 전 유진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십년 전 유진은 어땠을까..

작가 지망생 답게 하진은 예리한 감각으로 유진이 태석에게 접근하기 위해 자신을 디딤돌로 삼았음을 눈치챈다. '나비도감'을 빌미로 유진은 자연스럽게 하진에게 접근하고 서서히 그녀의 친구들에게도 접근하다 결국 그들 멤버가 된다.

하진이 한 말을 그대로 인용해 자기 것인 양 멤버들에게 들려주며, 우연히 알게 된 하진의 비밀을 태석에게 귓속말로 전해주는 꼴을 보며 하진은 속이 상한다. 태석이 유진에게 사귀자고 고백한 걸로 보아 유진은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이후에도 유진은 하진의 일에 항상 관여한다. 평소 담임에게 성추행을 당하던 하진을 지켜보며 그녀의 친구들은 우연히 담임의 불륜현장을 잡고 담임에게 그 일을 빌미삼아 협박 편지를 쓸 것을 공모한다. 물론 이 공모의 주동자는 유진이다. 하진은 그런 유진의 위선이 끔찍하다. 결국 협박 편지로 인해 담임은 연인과 자살을 했고 그 계기로 불륜의 대상까지 알려지는데…그건 다름아닌 하진의 엄마였다.

하진이 엄마의 죽음으로 정신을 못차리던 와중 유진은 자신이 그 협박 편지를 보냈음을 밝히고 조용히 사라진다. 철저하게 유진에게 이용당하고 자신의 엄마까지 죽게 만든 그녀에게 하진이 원한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십년 후, 그날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하진은 유진이 십년이나 지난 지금 이순간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녀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 고백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유진이 신예 작가가 된 직후 그녀의 옛친구들을 한데 모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것에 살인 동기가 생겨났음을 밝힌다. 알고 보니 초대한 그날, 현재 자신의 남자친구인 태석이 유진이를 안아주고 침실로 데려다 주는 장면을 하진이 목격한 것이다.

그런데 태석의 방에서 청산가리가 발견되면서 하진은 남자친구를 위해 죄를 뒤집어 쓴 순정녀로 등극한다. 이 엄청난 희생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하진의 태석에 대한 사랑은 한결 같았다. 태석의 변심, 친구였던 유진의 배신, 엄마의 죽음.. 이 얼마나 쓸쓸한 인생인가. 유진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동정심이 들어 눈가가 촉촉해지는 순간 놀라운 진실이 밝혀진다.

그리고 그 진실 뒤에는 위선자였던 유진의 한결같은 사랑,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순정이 함께 툭 튀어나온다. 유진의 사랑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나비를 좋아하는 그녀, 하진을 따라 나비도감을 사고, 그녀의 의견을 유심히 들으며, 쓰지도 않은 협박 편지도 자신이 썼다고 고백하고, 자신의 인생에서 사라져달라는 하진의 요청대로 조용히 사라진다.

착각은 때때로 진실을 볼 수 없게 한다

사랑과 재채기는 숨길 수가 없다고 하듯 시도때도 없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던 유진의 마음을 하진이 모를 리 없다. 단지 그 관심을 다른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오해한 것이다. 하진은 한번도 유진의 진심을 들여다 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인생에 끼어든 불청객 취급을 할 뿐이다. 이러한 오해 때문에 십년이 지나서야 하진에게 전달된 유진의 진실은 큰 울림을 준다. 태석에게 비밀이라며 속삭인 것은 다름아닌 유진 자신이 하진을 사랑한다는 고백이었다.

가정 폭력 탓에 집을 떠나 허름한 집에서 살던 유진은 사랑하는 하진에게만 속내를 내보인다.  "손톱을 깎아내도 아프지가 않아. 몸 전체가 손톱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아프지 않으니깐…." 라고 말이다. 이때 하진이 유진을 한번만이라도 봐주었더라면 이 비극은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하진은 태석이 유진에게 흔들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유진이 떠나간 후, 태석과 사귀면서도 항상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태석에 대한 불신, 유진에 대한 경계가 그녀의 판단을 흐려놓고 결국 하진의 인생을 망친 것이다.

가장 불쌍한 누구일까?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을 한번이라도 더 볼려고 그토록 이상한 자세로 죽어가던 유진인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한 죄로 여태까지 단 한순간도 행복한 적 없던 하진인가… 혹은 하진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 죄로 하진의 죄를 묵묵히 뒤집어 쓰던 태석이던가.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지현 시민기자의 블로그(http://blog.daum.net/journal02, http://blog.naver.com/journal02)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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