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영화의 줄거리나 주요 장면이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 ⓒ 위더스필름


돈 없고 빽 없고 가방끈 짧은, 그러나 어엿이 사법고시를 통과해 변호사 사무실을 차린 송우석은 속물과도 같다. 홍보물 뿌리 듯 명함을 돌리고 잡다한 일을 처리하면서 잘 나가는  변호사 대열에 들어선다. '나중에는 당신의 돈을 지켜드리겠다'며 세무전문 변호사로 나서 승승장구한다. 

대학 못 나온 상고출신이란 굴레가 따라다니지만 참 열심히 사는 변호사다. 고시 공부를 하던 시절 어려운 형편에 국밥집 밥값을 떼먹고 도망가기도 했었지만, 변호사가 돼서는 다시금 나타나 떼먹은 밥값을 두둑이 돌려주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도 가지고 있다.

물론 변호사 일이 잘 풀리다  보니 조금 우쭐해지는 면도 있다. 세상일에 관심이 없다보니 좋은 대학 다니면서 데모나 하는 학생들이 한심하게 보인다. 공부하기 싫어 데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빨갱이들에게 동조하는 행동이라 여기기도 한다. 

전혀 세상사와 거리가 멀 것 같은 변호사가 세상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은 공교롭게 국밥집 아들 때문이다. "한 달 째 소식이 없던 아들이 교도소에 있다고 한다"며 도와달라는 국밥집 주인의 절박한 하소연에 (교도소에) 함께 찾아간 것이 계기였다.

대학에 다니며 친구들과 책을 읽고 토론하고 야학에서 여공들을 가르치던 평범한 학생은 어느 날 갑자기 국가보안법 위반 공안 사범이 돼 있었다. 어렵게 성사된 면회에서 온 몸이 멍투성이가 돼 있음을 알게 된 순간, 그때서야 세상이 비상식적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군사독재정권이 맹위를 떨치고 있던 때였다.

하지만 큰 기업으로부터 좋은 제안이 들어와 있었기에 시국사건에 뛰어들지만 않는다면 탄탄한 대로가 열리는 상황. 깊은 고민이 스며들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세무전문 변호사의 선택은  편한 길이 아닌 험한 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외면하기 어려웠다. 이때부터 계란으로 바위치기 식 재판이 시작된다. 작지만 살아있는 계란과 커다랗지만 죽어 있는 바위. 승자는 누가될까?

낯설지 않은 80년대의 풍경, 지금과 너무 닮았다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 ⓒ 위더스필름


오는 19일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변호인>은 1981년 대표적 공안조작사건인 '부림사건'을 바탕으로 진실과 정의를 위해 애쓰던 한 변호사의 모습을 그렸다. 그 주인공은 바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80년대 한 변호인의 이야기는 30년 전 사건을 중심으로 만들었다지만 그저 옛 이야기로만 보이지 않는다. 희한할 정도로 지금의 사회 상황과 연관된 부분이 너무 많아 흥미롭다. 요즘의 현실과 접점이 많다보니 장면 장면이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80년대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이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공안사건을 통한 공포분위기 조성을 택한다. 마음에 안 드는 세력은 무조건 빨갱이로 몰고 북한의 주장에 동조한다는 식으로 밀어붙이면 된다. 어디선가 많이 본 모습이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사건이 그렇듯 실제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을 억지로 엮어야 하는지라 고문을 통한 조작은 필수다. 그런데 그 조작이 정교하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다. 국밥집 아들의 변호를 위해 나선 변호인은 그 틈을 놓치지 않는다. 이 역시도 익숙한 풍경이다.

조작을 서슴지 않은 공안검사가 제대로 된 논리를 제시하지 못하고 빨갱이라고만 외치는 모습도 현실 속에서 너무 자주보고 있기에 그리 낯설지 않다. 무법과 탈법, 억지와 왜곡이 난무하는 여건에서 영화 속 송우석 변호사의 고군분투는 눈물겨울 정도다.

조작과 진실의 충돌...정의 택한 변호인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 ⓒ 위더스필름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조직사건"이라고 우기는 공안검사의 주장에 "고문을 통해 순수한 학생들을 빨갱이로 덮어씌우려는 조작사건일 뿐"이라는 변호인의 주장은 강하게 충돌한다. 본질을 외면한 채 거짓과 은폐로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려 하는 세력들을 은유하는 듯하다. 이 영화를 위해 정치·사회적 환경이 당시와 절묘하게 일치하는 상황을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최근 교육부가 역사 교과서 수정을 지시하며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를 감추기 위해 경찰이 거짓 발표한 내용)'는 내용을 수정하라고 해 논란이 되고 있는 시점에서 <변호인>의 고문장면 역시도 예시의 의미가 크다.

시시비비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법원의 모습과 군사독재의 음험한 조작과정은 비슷한 주제의 영화들(<부러진 화살>,<남영동 1985>)을 떠올리게도 해 준다.   

무엇보다 영화 <변호인>에서 단연 압권은 롱테이크로 찍은 법정장면이다. 조작과 진실이 충돌하는 장면에서 양심과 정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송우석 변호사의 외침은 전율을 일으키게 만든다. 권력의 압제에 굴하지 않고 맞서겠다는 변호인의 각오는 요즘 한참 이어지는 종북 논란에도 시원하게 '빅엿'을 먹인다.

고문과 조작에 대해 "국가를 위해 일했을 뿐"이라며 자신들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자들을 향해 변호사는 이렇게 일갈한다. 마치 '조국이 어디냐'고 묻는 어떤 물음에 되받아 치는 목소리로도 들린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민이 국가다!"

"졌지만 지지 않았음을 전달하고 싶었다"

영화 <변호인>은 1980년대와 2013년의 현재를 연결시켜주고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80년대를 온몸으로 부딪혔던 사람들에게 영화는 절대 가볍게 다가가지 않는다. 변호사 사무장 역으로 나선 오달수씨의 말대로 "그 시대를 거친 사람들에게는 가슴 아픔을, 그 시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통쾌함"을 안겨준다.

배우들의 열연 또한 영화의 힘을 느끼게 해 준다. 주연뿐만 아닌 국밥집 아줌마나 악역 역할마저도 돋보인다. 영화를 본 관객들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게 자연스러울 정도다. 세세하게 재현된 80년대의 풍경은 그 시대의 추억을 불러낸다.

 29일 오후 서울 왕십리CGV에서 열린 영화 <변호인> 시사회에서 배우 송강호, 김영애, 오달수, 곽도원과 양우석 감독이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29일 오후 서울 왕십리CGV에서 열린 영화 <변호인> 시사회에서 배우 송강호, 김영애, 오달수, 곽도원과 양우석 감독이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 이정민


<변호인>을 연출한 양우석 감독은 지난 11월 29일 기자간담회에서 "영화적으로 대중들과 어떻게 만날지를 고민했다"면서 "졌지만 지지 않았음을 전달해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1980년대는 산업화와 민주화 등이 매우 밀도 있게 이뤄지는 과정에서 많은 버거움이 있었다"고 말하고 "지금 대학생들의 아버지세대 이야기인데, 취업과 스펙 등으로 힘들어 하는 대학생들에게 부모님들은 더 어려운 시기를 거쳤음을 알게 해 주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양 감독은 또한 "변하지 않는 상식을 변호했던 사람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면서 "이런 영화를 충분히 만들 수 있는 시기라고 주저함이나 두려움은 없었고, 영화는 영화로만 봐 주길 바란다"고 요청했다. 

감독의 말대로 <변호인>은 굳이 한 인물을 대입시키지 않아도 영화적으로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소재다. 돈 없고 가난한 사람도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의로운 변호인의 모습은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가 실재했고 지금은 우리 곁에 없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향수를 더욱 질게 해 줄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영화를 본 후 누군가는 감동과 함께 눈물을 흘릴 것이며, 누군가는 의로움에 열광할 것이다. 물론 또 다른 누군가는 벌벌 떨며 두려워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의 묵직한 여운은 보는 사람 모두에게 상당할 것 같다.

변호인 송강호 김영애 오달수 양우석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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