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시픽 림> 영화 포스터

▲ <퍼시픽 림> 영화 포스터 ⓒ Legendary Pictures


<스타워즈>의 R2D2와 3PO, <에이 아이>의 로봇 소년 데이빗, <아이, 로봇>의 써니와 비키, <블레이드 러너>의 리플리컨트, 그리고 <터미네이터>.

이들은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로봇이다. 인간의 크기에 맞추어진 이들은 <우주소년 아톰>과 유사한 형태였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우주소년 아톰>처럼 자그마한 로봇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징가 Z> <신세기 에반게리온> <기동전사 건담> 같은 로봇들은 거대한 위용을 과시하며 소년들의 마음을 불태웠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거대 로봇을 영화로 옮기고 싶은 욕심은 할리우드가 꾸었던 꿈 가운데 하나였다.

거대 로봇을 향한 열망은 신의 위치에 오르고 싶었던 인간의 욕망이 빚은 '바벨탑'과 유사하다. 거대한 크기는 곧 거대한 힘을 의미한다. 신화와 전설에 존재하던 거대한 힘을 지닌 거신(巨神)의 이미지를 흉내 내 인간이 철을 녹여 만든 것이 거대 로봇이다. 그래서일까? <퍼시픽 림>의 각본은 그리스 신화를 다루었던 <타이탄>과 <타이탄의 분노>의 각본을 쓴 트래비스 베컴이 담당했다.

그동안 발목을 잡았던 기술적인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던 건 <트랜스포머>와 <아이언맨>의 공이 크다. <트랜스포머>가 만화에서나 가능했던 변신 로봇을 실감 나게 재현해냈다면, <아이언맨>의 슈트는 인간이 입은 갑옷과도 같은 질감이 느껴졌다. 새로운 시각 혁명을 불러왔던 이들의 유산을 계승한 <퍼시픽 림>은 마침내 극장 화면으로 거대 로봇을 출동시키기에 이르렀다.

일본 서브 컬처와 할리우드 유행 소재가 뒤섞인 내용

<퍼시픽 림> 영화 스틸

▲ <퍼시픽 림> 영화 스틸 ⓒ Legendary Pictures


2025년에 일본 태평양 연안의 심해에 커다란 균열이 일어나면서 지구와 우주를 연결하는 포털 '브리치'기 생겨난다. 거기를 통해 지구에 온 외계 괴수 '카이주'(일본어로 괴물). 카이주의 공격으로 지구는 초토화되고, 각국은 그들에 맞서기 위하여 지구연합군인 '범태평양 연합방어군'을 결성하고, 초대형 로봇 '예거'(독일어로 사냥꾼)를 만들어 카이주에 대항한다.

<퍼시픽 림>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공식과도 같은 '하이 콘셉트'(25단어로 정리할 수 있는 영화)에 충실한다. "갑자기 나타난 외계 괴수에 대항한 지구 로봇들"이 <퍼시픽 림>의 뼈대다.

'브리치'는 <미스트>에 나온 통로와 흡사하다. <미스트>는 군사기지의 실험 때문에 외계와 연결되는 통로가 생겼다는 설명을 한 바 있으나, <퍼시픽 림>은 브리치에 대해 구구절절 말하지 않는다. 떠들 시간까지 절약해서 '트랜스포머'의 대형 사이즈인 예거와 <고질라> <클로버필드>의 괴수를 떠올리게 하는 카이주의 대결을 보여준다.

시각과 청각의 자극을 위해 내달리는 <퍼시픽 림>(7월 11일 개봉)엔 일본 애니메이션과 괴수물, 할리우드 영화들의 소재 등 다양한 요소가 녹아있다. 기본 골격은 근래 케이블TV에서 인기리에 방영 중인 <진격의 거인>과 비슷하다. 갑자기 나타난 거인은 카이주에, 그들에 대항하여 인간이 만든 병기 입체기동장치는 예거에 들어맞는다. 여기에 카이주의 반격에 예거가 밀리자 벽을 쌓자는 발상도 같다.

다른 애니메이션의 인용도 풍부하다. 예거를 몰기 위해 두 명의 조종사가 협력하는 설정은 가이낙스의 걸작 <톱을 노려라! 건버스터>를, 정신으로 접속하는 방식은 <공각기동대>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머리에 합체하는 방식은 <마징가 Z>가 속한 슈퍼 로봇 계열을 연상시키지만, 움직이는 모습은 <기동전사 건담> 같은 리얼 로봇 계열을 반영하고, <신세기 에반게리온>처럼 칼을 꺼내 싸우는 장면도 있다.

일본 로봇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주는 종합선물세트에 가깝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거대한 적과 싸우는 로봇에서 전대물의 흔적이 남아 있고, 심해에서 온다는 카이주의 모습에선 괴수물의 향수가 묻어난다. 마치 일본의 서브 컬처를 모두 끌어안겠다는 모습이다.

요즘 할리우드 영화가 보여주었던 유행도 적극 수렴했다. 예거와 카이주의 육탄전은 <트랜스포머> <어벤져스> <맨 오브 스틸> 등이 개발한 도시 파괴 공법을 충실히 수행하며 아낌없이 도시를 파괴한다. 팝콘과 콜라를 먹으면서 열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규모다. <인셉션>처럼 기억으로 들어가 정신세계와 트라우마도 짚어준다. 그 과정에서 로맨스와 라이벌, 지구를 위한 영웅의 희생은 빠짐없이 등장하고,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 영화의 단골 배우인 론 펄먼도 어김없이 나온다.

관객과의 벽을 허물 수 있을 지는 미지수

<퍼시픽 림> 영화 스틸

▲ <퍼시픽 림> 영화 스틸 ⓒ Legendary Pictures


<퍼시픽 림>에 나오는 '벽'은 근래 다른 작품들에 나온 벽과 유사하다. 원래 할리우드에서 다루어진 벽은 계급 사회와 억압 같은 고전적인 의미의 벽이었다. <뉴욕 탈출> <헝거 게임> 등이 그랬다.

반면에 <퍼시픽 림> <월드워Z>, 여기에 덧붙여 <진격의 거인> 등에 나오는 벽은 바깥에서 친 벽이 아니라, 자신을 가둔 벽이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만들었다지만, 결국은 고립이 되고 만다. 여기에서 벽은 지금의 현실 세계에 흐르는 불안과 공포, 무력감을 소환한다.

<퍼시픽 림>은 계속해서 벽을 부순다. 외계 괴수에 대항하여 지구연합군을 결성하였기에 군사력으로 규정되는 국가의 경계선은 허물어졌다. 두 명의 조종사가 정신과 기억이 연결되어 하나가 될 때에 예거가 움직인다는 설정은 내면에 있는 마음의 벽을 극복하고, 타인과의 경계선을 지워가는 결과를 끌어낸다. 이것이야말로 할리우드판 인류보완계획이다.

영화 속에선 모든 벽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으나, 영화를 보는 관객의 벽까지 없앨지는 미지수다. <퍼시픽 림>은 거대 로봇에 대한 환상을 품은 사람들이 호소력이 크고, 일본 서브 컬처에 익숙할 수록 큰 재미를 보장하나, 그런 것에 관심이 적은 사람들이 몰입하기엔 이야기의 힘이 지나치게 약하다.

안전한 승차 방법은 있다. 별다른 생각 없이 130여 분을 롤러코스터 타는 기분으로 볼거리만 즐기면 된다. 유사한 놀이기구인 <트랜스포머> 1편만큼 재미있진 않아도, 적어도 2편과 3편보다는 재미있다. 기왕 즐기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아이맥스 3D를, 그것이 힘들다면 될 수 있으면 큰 화면으로 추천한다. '초 거대 로봇'을 작은 화면으로 보는 역설적인 상황만은 피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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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24프레임의 마음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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