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영화에 빠지지 않는 술자리, 굉장히 긴 롱테이크임에도 긴장이 팽팽히 유지되는 명장면.

홍상수 영화에 빠지지 않는 술자리, 굉장히 긴 롱테이크임에도 긴장이 팽팽히 유지되는 명장면. ⓒ (주)영화제작전원사


홍상수의 열네 번째 장편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우리가 짐작한 바대로 그의 이전 영화와 비슷한 소재를 다룬다. 또 여대생이고, 또 대학 선생이다. 또 비밀스런 관계이고, 또 술을 마신다. 그렇다. 또 홍상수 영화인 것이다. 그런데 이 무한히 반복되는 이야기 안에서 홍상수는 미묘한 변주를 통해 영화 보기의 쾌락을 선물하는 한편 '모노가미'(Monogamy, 일부일처제)의 의미를 진지하게 묻는다. 물론 그 질문의 방식은 그만의 독특한 어법으로 이뤄진다.

홍상수는 모든 장면에 자신의 지문을 찍어놓는 몇 안 되는 감독이다. 대충 찍은 듯이 보이는 장면들에도 대단히 치밀한 계산이 숨어 있고, 그것이 홍상수 영화만의 개성을 이룬다. 우리는 지문을 확인하고, 숨겨진 계산을 풀어냄으로써 다른 누구의 영화도 아닌 홍상수의 영화를 더 즐겁게 감상할 수 있다.

 캐나다로 떠나는 엄마와 만나는 해원

캐나다로 떠나는 엄마와 만나는 해원 ⓒ (주)영화제작전원사


'홍상수 영화'를 보는 방법 하나, '첫 장면'에 주목하라

영화의 첫 장면에서 감독은 관객에게 '보는 법'을 안내한다. 물론 대다수 대중영화는 관습적 독법에 의해 쉽게 볼 수 있도록 관습적인 장면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홍상수의 영화는 다르다. 첫 장면을 주목하면 그 다음 장면들을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해원(정은채 분)은 일기를 쓴다. 장소는 어느 식당이다. 따라서 영화는 그가 자신에게 일어난 날들을 기록하는 사람이며, 영화가 그의 시점에서 진행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런데 엄마(김자옥 분)를 기다리며 일기를 쓰던 그는 금세 잠이 들어 꿈을 꾼다.

이 패턴이 이 영화를 읽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일기와 꿈. 혹은 기록과 상상. 이 둘 사이에 현실이 있다. 따라서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일기(기록)-현실-꿈(상상)이라는 세 겹의 이야기를 가진다. 잘 살펴보면 일기와 현실과 꿈은 서로 완전히 포개지지는 않으면서도 서로 교차한다.

 제인 버킨은 해원에게 서촌 방향을 묻는다.

제인 버킨은 해원에게 서촌 방향을 묻는다. ⓒ (주)영화제작전원사


꿈 속에서 그는 유명한 프랑스 가수이자 배우인 제인 버킨을 만난다. 해원은 처음엔 서촌 방향을 묻는 제인 버킨에게 "잘 모르겠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서촌 방향을 잘 모르기도 하고 제인 버킨을 누군지 잘 못 알아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다 그는 자신이 지나친 평범한 외국 관광객이 제인 버킨임을 알아보고 쫓아간다. 해원은 굉장히 흥분해서 제인 버킨에게 그와 그의 딸(샤를로뜨 갱스부르)을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제인 버킨은 해원에게 자신의 딸보다 더 예쁘다고 칭찬하고 해원은 그러는 제인 버킨에게 당신이 더 아름답다고 칭찬한다. 제인 버킨은 혹시 파리에 오게 되면 자신에게 연락하라고 연락처를 적어준다. 해원은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해원이 샤를로뜨 갱스부르 같은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한다는 것과 자신의 미모에 대해 어느 정도의 허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꿈이고, 현실에서는 제인 버킨 대신 엄마가 도착한다.

해원의 엄마는 이혼 후 캐나다로 이민 가서 새출발을 하려고 한다. 이혼 후에 해원은 아빠와 살고 있고, 엄마와는 떨어져 지낸 듯하다. 캐나다로 떠날 엄마에게 해원은 보이차를 선물하고, 엄마는 딸에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살라'고 조언한다. 둘은 서촌(사직동)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낸다.

꿈에서 제인 버킨이 가고자 했던 곳을 해원과 엄마가 둘러보는 것이다. 해원은 입장하지 못하도록 걸어놓은 나무문을 밀고 사직단에 들어가기도 하고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동상이 굽어보고 있는 곳에서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기도 한다. 엄마가 말한대로 자유롭게 살기를 작정한 사람의 의지를 보여주듯이.

 수염 기른 남자는 해원에게 관심을 표하지만 해원은 시큰둥하게 넘긴다

수염 기른 남자는 해원에게 관심을 표하지만 해원은 시큰둥하게 넘긴다 ⓒ (주)영화제작전원사


이후 모녀는 '사직동, 그 가게'란 곳의 앞에 당도한다. 거기서 해원은 어떤 헌책을 들고 '명작'이라고 하며 살까 말까 고민한다. 그때 모녀가 방금 전 거리를 걷다 본 수염 기른 남자(류덕환 분)가 담배를 피우기 위해 가게 밖으로 나온다. 그는 해원에게 책값은 주고 싶은 만큼 주면 된다고 한다. 해원은 "그러면 내가 너무 드러나잖아요"라고 하며 책을 사지 않겠다고 하며 자리를 떠난다.

그렇다. 해원은 자신을 감출 줄 아는 동시에 자기 주도적으로 누군가를 불러내고, 호의를 거절하기도 하며 어딘가에서 떠나갈 줄 안다. 그래서 해원의 같은 과 학생들은 그녀의 속을 알 수 없다고 하면서 이중성을 꼬집기도 한다.

해원은 엄마와 차 한 잔을 마신 후 헤어진다. 한국 영화에서 차를 마시는 장면 중에서 이렇게 낯선 장면은 만나보지 못했을 것이다. 둘은 유리병 같은 곳에 담긴 차를 마시는데 그 공간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모녀는, 마치 해원의 꿈에서 제인 버킨과 그가 서로 예쁘다고 한 것처럼, 과장되게 울먹이면서 석별의 정을 나눈다. 그런데 제인 버킨처럼 혜원의 엄마는 딸에게 연신 "예쁘다"고 말한다. 삶의 예지로서의 꿈, 아니 꿈이 이끄는대로 가는 현실. 엄마를 만나기 전 해원이 꾼 꿈은 미국 대학교수를 만날 때도 현실과 포개지지는 않지만 교차한다.

 해원이 부르자 성준은 택시를 타고 바로 온다

해원이 부르자 성준은 택시를 타고 바로 온다 ⓒ (주)영화제작전원사


'홍상수 영화'를 보는 방법 둘, 두 남녀의 묘한 관계에 주목하라

해원이 엄마와 헤어지자 비가 내린다. 해원은 갑자기 쓸쓸해져서 "완전히 헤어진 것은 아닌" 성준(이선균 분)을 부른다. 성준은 해원을 가르치는 대학교수이자 영화감독이고 예상하듯이 유부남이다. 해원은 성준에게 술을 사달라고 하고, 성준은 "너하고는 뭐든지 다 하고 싶다"고 한다. 성준은 평소에 누군가 볼까봐 밖에서는 해원의 손도 잡지 않지만 그 순간만큼은 굉장히 격정적으로 키스를 시도한다.

그러나 자기 욕망에 대단히 솔직한 듯한 성준의 이런 태도는 금세 무너지고 만다. 해원과 성준은 술집을 찾다가 여의치 않자 일년 전에 찾아왔던 술집을 찾아간다. 그런데 바로 그 술집에서 성준이 가르치는 학생들이 술을 마시고 있다. 성준은 그 술집 밖에서 담배를 피우던 학생들이 해원과 자신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떨기 시작한다.

성준은 해원에게 다짐이라도 받듯이 그냥 밖에서 우연히 만난 것으로 하고, 무엇을 묻든지 시미치를 떼면 된다고 강변한다. 해원은 그런 성준의 태도와는 상반되게 별다른 흔들림이 없다. 그는 그냥 자신이 술을 먹고 싶다고 해서 성준이 사주는 걸로 하면 안 되겠느냐고 한다.

 대학교수 성준은 학생들이 자신과 해원을 봤을까봐 전전긍긍한다

대학교수 성준은 학생들이 자신과 해원을 봤을까봐 전전긍긍한다 ⓒ (주)영화제작전원사


성준은 학생들과 술을 마시는 내내 뭔가를 들키지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그런 성준을 향해 학생들은 질문을 늘어놓는다. "대학교수는 왜 하세요?" "해원이가 왜 좋으세요?" "해원이가 재홍이랑 사귀면서 다른 남자 만난 것은 아세요?" 등등. 성준은 어느 질문에도 시원스럽게 답을 하지 못한다.

이 술자리 장면은 커트가 없는 굉장히 긴 롱테이크이지만 긴장이 살아있다. 이 장면 내내 해원과의 비밀스런 관계를 절대로 들키지 않으려고 했던 성준에게 식당 주인 아주머니의 한마디는 결정적인 한방이 된다.(이 영화에서 성준은 어디서든 자신의 모습을 지우려고 하지만, 한 번 성준을 본 사람을 늘 그를 아는 척한다.) 거기에다가 술에 취한 해원이 먼저 가겠다고 일어나면서 사실 선생님을 부른 것은 자신이고 술을 사달라고 했으며 아까 우연히 만났다고 말한 것은 거짓말이라고 고백한다. 술집 바깥에서 성준이 신신당부했던 것을 일격에 무너뜨린 것이다. 학생들은 성준을 의아하게 보고, 성준은 어쩔 줄을 모른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포스터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포스터 ⓒ (주)영화제작전원사


해원과 성준이 다시 만나 데이트를 하는 장소는 남한산성이다. 성준은 사직동에서도 예전에 하숙을 한 적이 있고, 남한산성 근방에서도 살았던 적이 있다고 한다. 둘의 관계도 비슷하다. 예전에 살던 곳을 다시 찾아온 것처럼, 둘은 서로를 살지 않지만 가끔 서로를 들른다. 예전에 살았던 곳을 찾듯이. '완전히 헤어지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다시 만난 해원에게 성준은 너는 외국에 살았던 적이 있어서 그런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한다. 이 말은 유부남인 자신을 이해하면서 사귈 수 있는 너는 다른 네 또래와는 다르다는 말로 들린다. 묘한 역전. 성준은 약간은 미안해 하면서 이 말을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앙칼지다. "선생님이 저 잘못 보신 거예요. 저, 악마예요!" 여기서 상처를 주는 사람이 성준이고, 상처를 받을 사람이 해원일 것이라는 통념은 보기 좋게 배반당한다.

남한산성을 보면서 성준은 이렇게 높은 곳에 성을 쌓은 사람들은 이미 다 죽었다고 말하며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묻는다. 해원은 그래서 이 산성이 남지 않았느냐고 대답한다. 기묘한 문답. 남한산성은 인조가 45일간 청나라에 항전하다가 이마를 돌바닥에 피가 나도록 찍으며 항복한 곳이다. 그때 인조가 지키려던 가치가 무엇이든 그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산성만 남았다. 해원과 성준은 인조가 직접 항전을 지휘했던 수어장대를 배경으로 앉아 베토벤 7악장 2번을 듣는다. 성준은 우리만 잘하면 된다고, 비밀만 지키면 된다고 다시금 해원에게 다짐을 받으려 한다.

 연주와 중식, 해원과 성준. 두 '불륜' 커플의 어색한 만남.

연주와 중식, 해원과 성준. 두 '불륜' 커플의 어색한 만남. ⓒ (주)영화제작전원사


'홍상수 영화'를 보는 방법 셋, '장소'의 상징성에 주목하라

'모노가미'는 여기에서 우스꽝스러운 괴로움으로 수어장대처럼 둘의 배경에 놓여 있다. 외적을 방어하던 산성은 이제 건강을 위한 등산코스가 되었고, 전투 명령을 내리던 수어장대는 등산객들이 쉬어가는 곳이 되었다. 해원의 촌철살인. 외적도 사라지고 성을 쌓던 사람들도 사라졌지만 산성은 남았다.

왜 하필 해원과 성준이, 또 다른 '불륜' 커플인 연주(예지원 분)와 중식(유준상 분)이 남한산성에 만나는지 따져보면 해원이 왜 출입을 막아놓은 사직단에 들어갔는지, 왜 그곳에서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는지, 왜 성준이 그곳에서 격정적으로 변해 '너 하고는 뭐든지 하고 싶어!'라고 하며 해원에게 키스를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사직단은 또 어떤 곳인가. 그곳은 임금이 직접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이제는 임금이 없다. 그리고 누구도 제사를 올려야만 나라가 잘 되고 농사가 잘 된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니까 사직단은 예전의 사람들이 무엇을 믿었는지 보여주는 곳이다. 사직단의 기능은 사라졌지만 그 터가 남음으로써 형태만 남은 믿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홍상수의 영화는 등장인물이나 이야기만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그의 영화를 즐기는 열쇠는 '장소'가 가진 상징성이다. 이를테면 성준이 해원에게 어딘가로 도망가자고 하면서 "강원도. 거기 내가 아는 신부님이 있어"라고 할 때 그 말을 하는 장소가 남한산성이라는 점은 대단히 희극적인 것이다. 고작 도망가자고 하는 곳이 강원도라는 점은 홍상수의 전작 <강원도의 힘>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자기지시적이다. 게다가 유부남이 처녀를 데리고 탈출해 신부님을 찾아간다니 가서 고해성사부터 할 셈인가.

카메오처럼 잠깐 등장해서 성준과 해원에게 "좋은 날입니다"라고 말하는 등산객(기주봉 분)의 대사는 장소의 특성을 기가 막히게 잘 살린 대사다. 성준과 해원 역시 "좋은 날입니다"라고 대답하지만 정말 그들에게 좋은 날인가. 그리고 남한산성과 수어장대를 모노가미의 은유라고 할 때, 마지막에 해원에게만 묻는 "남한산성에 오르는 거 좋았습니까?"는 해원의 결혼 결심에 가 닿아 사소하지만 의미심장한 질문이 된다.

 해원은 대통령 시계를 받은 미국 대학교수를 우연히 만난다.

해원은 대통령 시계를 받은 미국 대학교수를 우연히 만난다. ⓒ (주)영화제작전원사


성준과 다툰 해원은 어느날 사직동 그 가게 앞에서 미국에서 대학교수를 하고 있다는 한 남자(김의성 분)를 만난다. 그렇다. 이 장면은 수염 기른 남자를 만난 장면을 살짝 비튼 것이다. 미묘한 변주. 수염 기른 남자의 관심을 담배꽁초를 밟아 끄듯이 일거에 차단해버린 해원은 남자가 미국에서 대학교수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된다.

수염 기른 남자가 한 말을 미국 대학교수도 똑같이 하고("책값은 주고 싶은 만큼 주세요.") 해원도 같은 대답을 한다.("그러면 제가 너무 드러나잖아요.") 그런데 미국 대학교수는 "그럼 자기가 드러나지 않을 만큼 주면 되잖아요"라고 받아침으로써 일단 해원에게 말을 붙이는 데 성공한다.

함께 차를 마시면서 미국 대학교수는 해원에게 청와대에서 받은 대통령 시계를 선물한다. 그는 자신이 이혼남이라고 소개하며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해원을 떠본다. 해원은 "결혼한다는 건 이혼할 수 있다는 것 아니예요?"라며 쿨하게 대답한다. 이에 힘 입은 미국 대학교수는 "저는 애인 아니고, 결혼할 사람 찾아요"라고 말하면서 한 술 더 떠서 방금 본 해원이 적임자 같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삶에 항체가 되어줄, 주관이 뚜렷한 해원 같은 여자가 좋다고 고백한다.

이 일종의 프러포즈가 해원은 싫지 않다. 그는 미국 대학교수이며 대통령에게 표창을 받는 사람인데다 마인드 콘트롤을 잘한다. 성준과 비교해보면 해원에게 이 미국 대학교수는 훨씬 나은 조건의 사람이다. 성준은 부인과 이혼할 생각도 없고, 다른 아이들 눈이 무섭다며 사직서를 쓰지만 막상 제출은 못하고(성준의 사직서는 일종의 사직단이다), 괴로우면 술을 마시고 얼굴을 깨먹는 사람이다.

 해질녘 수어장대에서 성준은 서럽게 울지만 이 장면은 대단히 희극적이다

해질녘 수어장대에서 성준은 서럽게 울지만 이 장면은 대단히 희극적이다 ⓒ (주)영화제작전원사


해원은 유부남과 7년이나 사귀고 있는 '잘 아는 언니' 연주를 만나 자신은 곧 결혼할지도 모른다고 말함으로써 마음 속으로는 이미 미국 대학교수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인 것이나 다름없다.(말하는 장소는 역시 남한산성이다.) 바로 이 점이 기존의 홍상수 영화의 여주인공들과 해원이 다른 점이다. 그는 성준의 뻔뻔하면서도 절절한 구애 혹은 읍소에 결코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성준이 겪는 괴로움이란 바로 해원이 그의 욕망을 실현시켜주지 않으리라는 데에 있다.

성준이 괴로워 술을 마시는 것처럼 연주의 애인인 유부남 중식은 우울증 약을 먹는다. 유쾌하게 자신의 속물성을 드러내는 중식도 연주와의 불안정한 관계를 떠올리면 유쾌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 점은 연주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우울해진 두 사람은 무심히 깃발을 본다. 중식은 "깃발은 멋있다. 저걸 누가 만들었을까?"라고 묻고 연주는 "깃발이 있으니까 바람이 보이죠"라고 말한다.

중식과 연주는 다시 갑자기 밝아진다. 둘은 웃으며 서로 얼싸안는다. 중식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냐고 연주를 칭찬한다. 모노가미에 대한 이 묘한 은유. 낭만적 사랑의 귀결로서의 멋진 결혼과 행복한 가정에 대한 신화가 모노가미 바깥의 낭만적 사랑을 숨겨야 하는 일로 만들고, 만약 드러나게 되면 펄럭펄럭 그 주체들을 깃발처럼 흔들리게 한다. 그 흔들림은 당사자에게는 대단한 괴로움으로 다가오지만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해원과 헤어지기로 하고 성준이 수어장대에서 저물녘 하늘을 바라보며 우는 장면은 슬프지 않고 우스꽝스럽다. 게다가 성준이 요즘엔 누구도 들고 다니지 않을 것 같은 구식 미니 카세트를 틀어 해원과 함께 듣던 음악을 자기 슬픔의 배경음악으로 이용할 때, 폭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다. 성준의 괴로움을 유일하게 달래줄 수 있는 해원은 그를 지나치지 못하고 그의 곁에 앉아서 조금 지나면 괜찮을 것이라고 위로한다. 해원은 위로하지만 결코 성준에게 그 무엇도 약속하지 않는다.

 수어장대에서 성준은 울고 해원은 위로한다

수어장대에서 성준은 울고 해원은 위로한다 ⓒ (주)영화제작전원사


홍상수는 사직단과 남한산성을 오가며 모노가미의 의미에 대해서 묻는다. 그는 우리가 각자의 욕망 때문에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겪는 문제를 남녀 사이에서 찾는다. 어쩌면 모노가미의 바깥에 있는 남녀의 연애야말로 모험이 사라진 시대의 마지막 모험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홍상수의 영화는 언제나 사소하지만 중요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으며 그의 영화는 결코 개인적이지 않고 대단히 사회적이다.

이번 영화에서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 홍상수는 최대한 컷을 지양하고 생경한 느낌까지 드는 줌을 자주 사용한다. 엄마와 해원이 대화할 때, 둘을 같이 보여주던 화면은 갑자기 엄마 또는 해원에게 줌인해서 한 사람만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이것은 영화라고 일깨운다. 어두컴컴한 극장에서 공동의 꿈을 꾸다가 우리는 각자로서 자꾸만 깨어나야 한다. 이것이 바로 홍상수 식의 '낯설게 하기'고 그것은 더 깊은 집중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해원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대신 꿈을 꾼다

해원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대신 꿈을 꾼다 ⓒ (주)영화제작전원사


마지막으로 해원이 도서관에서 꾼 꿈은 어디까지인가. 해원이 꿈 속에서 봤다는 '좋은 아저씨'는 누구인가. 성준인가, 미국 대학교수인가, 등산객인가. 예컨대 해원이 친구 유람이에게 성준과의 관계를 고백하는 장면은 분명히 꿈이다. 그렇다면 두번째로 남한산성에 간 장면은? 등산객을 만나 막걸리를 얻어 마신 장면은 꿈인가, 현실인가?

이 질문에 대해 각자 답을 찾아보면 더 흥미롭게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 하나의 꿈이며 그 영화를 지켜보고 있는 우리가 동시에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해원의 꿈과 해원의 현실과 해원의 일기가 모두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구성하듯이 우리의 삶 역시 그러하다는 것이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홍상수 이선균 정은채 영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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