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문정희 곧 개봉할 영화 <연가시>에서 그는 평범한 샐러리맨 재혁(김명민 분)의 아내 경순으로 분했다. 영화에서 강인한 엄마의 모습과 동시에 섬세한 여자의 모습을 선 보일 예정이다. ⓒ 이정민
첫사랑의 아이콘이 어느 새 '유부녀'가 되어 있었다. 물론 배우로서 그는 훌륭하게 맡은 배역을 해내왔다. 여기에 이견이 없다. 하지만 그를 여인으로서 강렬히 기억하게 하는 작품은 <연애시대>에 멈춰있다는 생각이 있었고, 여기에 대중들도 마찬가지이겠거니 해왔다.
영화 <연가시> 촬영이 막 끝난 이후 배우 문정희를 만났다. 이번에도 자식이 있는 아내 역이었다. 물론 실제로 가정이 있는 한 사람의 아내라지만, 배우로선 다분히 제한적이었던 게 사실이다. 노파심에서 물으니 이번엔 다소 다른 느낌이란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그가 맡은 대부분의 배역이 유부녀 일색이지 않았는가. 자기 주관이 강하거나 남에게 민폐를 끼치거나, 혹은 도도했든 말이다.
또 누구의 아내라니...싫다고 할 수도 없고"이번에도 또 누구의 아내였어요. 박정우 감독이랑 벌써 세 번째 작품인데 감독님이 갑자기 전화해선 하자고 하셨죠. 우리가 이미 '싫어요!' 할 수 없는 사이더라고요. 제가 <쏜다>에서 감우성씨 부인 경순이 역이를 맡았는데 이번에도 경순인 거예요. 날 그냥 사용하시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나 경순이 전문 배우예요?'라고 감독님께 묻기도 했어요."문정희의 물음에 대한 박정우 감독의 대답은 "나뿐만 아닌 제작자까지 모두가 널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다. 말 자체가 고맙고 감동이었단다. 그렇게 문정희는 다시 누군가의 아내로 분했다.
그녀 말대로 좀 달라 보였다. 영화 <연가시>는 사람의 뇌를 조종하는 변종 기생충 '연가시'를 소재로 한 영화. 여기서 그가 맡은 경순은 평소엔 착하고 순한 아내지만, 동시에 위기 상황에선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강인한 정신을 지닌 캐릭터다. 평범한 샐러리맨 재혁(김명민 분)을 내조하면서도 연가시로 인해 바뀌어 버리는 또 다른 모습을 보이는 인물이다.
영화는 이제 후반 작업을 남긴 상황이다. 문정희는 '연가시'에 대해 실제로 있는 생물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영화 이야기로 몇 시간을 이어 대화할 수 있을 태세였다. 그만큼 이번 작품에 대한 열정과 집중도가 높아 보였다.
"허구지만 사실성에 근거하도록 연구를 많이 해야 했어요. 잘못하면 좀비영화처럼 보일 수도 있잖아요. 감독님께서 그 부분에 가장 신경쓰시며 노력하셨어요. 연가시하면 어른들은 생소해 하지만, 요즘 초등학생들은 다 알더라고요. 과학책에 나오거든요. 양서류 등에 사는 기생충인데 그런 게 사람에게 있다면 얼마나 끔찍하겠어요."
▲ 배우 문정희가 서울 서교동 오마이뉴스 사옥에서 인터뷰를 하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한국영화에서 여배우의 위치..."한계를 두지 않았으면"문정희는 최근 소속사를 옮겼다. 한가인·황우슬혜와 한솥밥을 먹게 된 것이다. 전 소속사와의 계약 만료 이후 그가 옮긴 곳은 말 그대로 여자 대표가 있는 몇 안 되는 소속사이기도 하다. 새로운 둥지에서 활약할 그만의 각오가 궁금했다.
- 새 소속사인 만큼, 그것도 여자 매니저가 대표로 있는데 남다를 것 같아요."여자이기 때문에 여자를 안다는 말엔 동의하진 않지만, 여배우에게 로드맵을 제시하고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 게 좋았어요. 저 혼자면 못했을 틈을 함께 발견할 수도 있고요. 지금의 제 위치를 생각했을 때 이곳에서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 배우로서의 문정희가 지금의 자신을 바라볼 때 어떤 모습인가요?"어떤 배우라는 이미지가 강한 거 같아요. 지금 상황에서 더욱 성실하게 열심히 한다면, 여자로서 배우로서 훨씬 더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연애시대>때 제게선 그 배역의 캐릭터가 보이잖아요. 그런데 최근까지 드라마에서 엄마 역할을 하다 보니 제게서 그냥 엄마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 한편으론 드라마 출연으로 대중들이 친근하게 여기고 많이들 사랑해 주시잖아요."사람들이 제 모습에서 통쾌하면서도 따뜻한 면을 봐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엄마 캐릭터만이 아니라 악역으로 제가 복수의 칼을 가는 모습이라고 해도, 그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다가가고 싶은 겁니다. 단순히 TV에 나와서 친근한 배우가 되고 싶진 않아요. 어떤 고정된 이미지로 인해 다양한 역할을 하지 못하는 한계는 원하지 않습니다."
▲ 배우 문정희 후배들에 대해서도 애정어린 마음을 보였다. 최근 그는 소속사 신인 배우의 멘토를 자청해 함께 연기를 끌어주고 있다.
ⓒ 이정민
- 배우라는 면에서 나름의 욕심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 부분인가요?"그런 욕심이야 끝이 없겠지만 나이를 볼 때 드라마에선 제한이 있는 게 현실이더라고요. 드라마할 때 사실 그 제한 안에서 다양하긴 했죠. 하지만 여자이기 전에 엄마였어요. 배우 이미지를 희석시키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죠. 그때, 아 그래서 여배우들이 센 역할을 원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원한다기 보단 좀 다른 장르와 기회들이 있었으면 해요. 영화부분에선 여배우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생각보단 많지 않아요. 어렵지만 찾아야죠."
- 그 부분에 공감합니다. 한국 영화 전면에 여배우가 선다는 걸 영화관계자들이 아직은 낯설게 보는 것 같아요."여배우가 잘 살아나는 역할의 영화가 많이 아쉬워요. 얼마 전에 <범죄와의 전쟁>을 봤는데 다 남자였잖아요. 이런 좋은 영화를 보면 잠이 잘 안 와요. 그 작품에 열정을 쏟았던 배우들 모습에 질투도 나고요.
분명 여자로서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텐데...인간은 누구나 똑같다고 봐요. 악역이라도 인간 냄새가 나는 역할로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겁니다. 역할에 대해 타당한 이유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게 배우의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 인터뷰 직전 오마이뉴스 사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배우 문정희 ⓒ 이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