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와의 전쟁'. 91년 노태우 정권이 야심차게 실행한 계획이다. 폭력을 뿌리뽑겠다면서 전국의 폭력 조직들을 일망타진하겠다는 정부의 발표가 나오면서 '나쁜 놈들'은 저마다의 살 길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자신의 조직원들을 밀고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보스를 배신하고 누군가는 도망가고 누군가는 신분을 숨기고, 또한 누군가는 '윗선'의 힘으로 잡혀갔어도 곧바로 무혐의로 풀려나기도 했다. 수사를 맡은 검사는 '검사'라는 지위를 이용해 이들을 쥐락펴락하며 자신의 성역을 만들어나갔다.

폭력조직들이 연달아 검거되고 나쁜 놈들이 섬멸되어가고 있다고 언론은 떠들었지만 천만에. 또다른 나쁜 놈들은 이때다 하며 또다시 나쁜 짓을 시작한 것이다. 검찰과 조직의 거래가 오가면서 '범죄와의 전쟁'은 어느새 '범죄와의 화해' 모드가 되면서 아무런 결과도 내지 못하고 흐지부지 사라져버렸고 노태우는 치적을 쌓지 못했다.

 '10억짜리 전화번호부'를 든 최익현(최민식)

'10억짜리 전화번호부'를 든 최익현(최민식) ⓒ 팔레트픽쳐스


아닌 게 아니라 나쁜 놈들은 '범죄와의 전쟁'으로 온 나라가 흔들려도 저마다의 생존 방식을 찾아내며 여전히 자신의 영역에서 활보한 셈이다. 영화 속 대사처럼 "이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이고!" 한마디로 '나쁜 놈들 전성시대'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이야기하려면 이 두 가지 제목을 모두 말해야 한다. <범죄와의 전쟁 : 나쁜 놈들 전성시대>라고.

부산의 최고 보스? 내 집안 동생이야!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될 무렵, '로비의 신'으로 불리던 최익현(최민식)이 경찰에 체포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영화는 최익현의 체포를 먼저 보여주면서 최익현이 어떻게 해서 소위 '반달'이 되는지, 그리고 '로비의 신'으로 어떻게 군림하게 되는지를 과거와 현재를 번갈아 보여주며 이야기한다.

최익현이 필로폰을 밀매하기 위해 만난 최형배(하정우)는 부산의 최고 보스이다. 그런데 같은 경주 최씨 집안이라는 이유로 형배는 익현을 '대부님'으로 모시게 된다. 부산 최고의 주먹이 자신의 밑에 있다! 익현은 그렇게 자신이 왕인 것처럼 행동하며 건달의 삶, '로비의 신'으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영화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노태우의 모습과 민주화 데모, 그리고 최익현의 가족들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정치적인 해석이나 '가족주의' 류의 감상적인 이야기를 과감하게 처버리고 건달들의 생존과 배신, 이 한 곳에만 집중한다. 그것이 이 영화의 재미를 배가시킨 요인이다.

사실 이런 영화에 굳이 잔가지를 만들 이유가 없지 않은가? '건달'이라는 세계가 따지고 보면 온갖 추잡한 일들이 벌어지는 세상의 축소판과 다를 게 없는데. 그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만 늘어놓아도 우리는 추악한 현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정말 영리한 영화다.

"이 얼마나 살기좋은 세상이고!" 꼰대의 외침

최익현이 살아가는 방식은 그저 '자신이 살아남는 게 우선'이다. 가족의 안위도, 조직의 명예도, 심지어 가문의 부흥도 그에겐 '아웃 오브 안중'이다. 주먹도 없고 힘도 없어 수모를 겪어도 그에게는 다른 이의 곁으로 갈아탈 머리와 '말빨'이 있다.

그래서 최형배에게 붙고 그에게 수모를 당하자 그의 라이벌인 김판호(조진웅)에게도 붙고 감옥에 가서는 그를 '반달'이라고 부르며 욕설과 폭력을 가하는 검사 조범석(곽도원)에게 붙는다. 살기 위해선 집안 동생도, 그의 라이벌도, 자신을 괴롭혔던 검사도 다 내 편이고 내 적이다. 

 부산의 최고 보스 최형배(하정우). 바로 그가 최익현의 집안 동생이다.

부산의 최고 보스 최형배(하정우). 바로 그가 최익현의 집안 동생이다. ⓒ 팔레트픽쳐스


'경주 최씨 충렬공파'라는 본관은 또 얼마나 멋진가? 그것은 최형배를 무릎꿇리고 경찰에 체포되어도 경주 최씨 검사의 '빽'으로 바로 감옥에서 나오게 하는 권력의 무기이자 감옥의 열쇠다. 짱짱한(?) 가문, 잘 돌아가는 머리와 말빨. 그는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다. 그래서 그는 당당하게 말한다. "이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이고!"

영화 속 최익현은 한마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꼰대'의 모습이다. 어른이라고, 뭘 좀 배웠다고, 능력 있다고 위에서 군림하고자 하는 사람, 하지만 막상 최익현이 들고 다니는 총알없는 총처럼 실상은 아무 것도 없이 껍데기만, 말로만 포장하며 위에 계속 있으려는 사람. 그 꼰대의 표상이 바로 최익현이다.

따지고 보면 이런 '꼰대'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우선 자신의 아버지를 꼰대라고 생각하는 못된(?) 생각을 가진 이들도 있을 것이고 주변의 선배나 친구, 혹은 직장 상사 등도 '꼰대'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기가 더 많이 배웠다고 일반인들을 가르치려 하고 반박을 하면 비야냥으로만 응수하는 소위 '지식인'들 또한 '꼰대'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관객들은 '나이가 든' 최민식이 연기하는 그 '꼰대'를 보면서 자신의 아버지, 자신의 선배, 자신의 상사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꼰대'가 건달 세계에서 '로비의 신'으로, '반달'로 살아남는 것을 보면서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결코 존경심이나 감탄이 아니다. '저런 인간은 뭔 일이 터져도 어떻게든 살아남는구나'라는 허망한 한숨이다.

진실로 조폭을 '현실의 축소판'으로 다룬 영화가 있었던가?

 '꼰대'로 변신한 최민식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떠올릴 지도 모른다

'꼰대'로 변신한 최민식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떠올릴 지도 모른다 ⓒ 팔레트픽쳐스


조폭세계를 정말로 '현실의 축소판'으로 생각하고 만들었던 영화가 과연 몇 편이나 있었을까? 물론 혹자는 97년에 나온 <넘버 3>(그러고보니 이 영화에서는 최민식이 검사로 나온다)가 있지 않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조폭영화'는 현실적이라기보다는 무식을 앞세운 억지 웃음과 과장된 액션, 그리고 '그래도 건달은 멋있다'라는 힘센 이에 대한 막연한 동경만이 있을 뿐이다.

이 영화가 만약 10년만 일찍 나왔다면 '조폭영화'는 '저질'이라는 오명을 얻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오히려 미국의 갱스터 무비처럼 하나의 특수한 장르로 인식되지 않았을까? 폭력조직의 세계를 현실의 축소판으로 제대로 인식하고 그를 표현할 강렬한 캐릭터를 만들어 낸 영화가 왜 이제야 나왔을까하는 아쉬움이 든다.

현실은 여전히 어지럽다. 그 속에서 '꼰대'들은 또 머리 굴리며 살아간다. 오늘도 세상은 그렇게 돌아간다. 자,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 방법을 찾아야 할까?

범죄와의 전쟁 최민식 하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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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솜씨는 비록 없지만, 끈기있게 글을 쓰는 성격이 아니지만 하찮은 글을 통해서라도 모든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글쟁이 겸 수다쟁이로 아마 평생을 살아야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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