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의 왕>은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 애니메이션이다. 시각적으로 잔인한 장면이 많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약자에게 폭력이 가해지는 사회의 잔혹함이 오히려 크다. 연상호 감독은 "영화 중간에 중학생들이 본드를 흡입하는 장면이 있어 심의에 걸릴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유해 약물 부문의 등급이 높게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돼지의 왕>은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 애니메이션이다. 시각적으로 잔인한 장면이 많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약자에게 폭력이 가해지는 사회의 잔혹함이 오히려 크다. 연상호 감독은 "영화 중간에 중학생들이 본드를 흡입하는 장면이 있어 심의에 걸릴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유해 약물 부문의 등급이 높게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 KT&G, 스튜디오다다쇼


"어두움"
"산학프로젝트로써의 역할에 충실하고 학생 참여도를 높여 산학공동결과물이라는 기본 목표 달성에 적합한 작품이라고 생각되나, 목표대상 고객에 대한 좀 더 많은 분석과 마케팅적 요소가 다소 부족하다고 사료됨"

2008년 말, 한국콘텐츠진흥원(KOCCA)의 산학협력 프로젝트에 지원했던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에 대한 심사평이다. 당시 <돼지의 왕>은 예선에서 탈락했다. 2011년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무려 3관왕을 수상한 작품의 2년 전 평가는 이렇게나 단출하다.

부산에서 돌아온 연상호 감독을 만났다. 영화제의 관객들이 애니메이션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엄청난 고민과 부담감을 안은 채 부산에 내려갔던 그는 그야말로 금의환향했다. 3번의 상영은 모두 매진됐으며, 관객 반응도 뜨거웠다. 게다가 한국영화감독조합상(최우수감독상)과 CJ CGV가 협력한다는 뜻의 무비꼴라쥬상, 그리고 해외 배급과 상영확대를 목적으로 하는 넷팩상까지 3관왕을 했다.

특히 넷팩상은 한국 사회를 그린 <돼지의 왕>이 해외에서도 통할까 걱정했던 것이 기우였음을 증명해줬다. 영화 상영 후 한 외국 관객은 "관객과의 대화를 왜 하는지 모르겠다"며 "작품이 모든 걸 말하고 있다, 올 클리어(All Clear)"라는 소감을 전했다.

제작지원 투자 전무, "애니메이션 그만두려 했다"

 연상호 감독은 <지옥: 두개의 삶>(2003) 작업 당시에 실사로 촬영해 애니메이션 효과를 입히는 로토스코핑 기법을 시도했으며, <사랑은 단백질>(2008)에서는 3D 더미를 만들어 놓고 이를 바탕으로 2D로 디테일한 부분을 작업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돼지의 왕>(2011) 역시 3D와 2D의 장점을 혼용하는 이 방법을 활용했다.

연상호 감독은 <지옥: 두개의 삶>(2003) 작업 당시에 실사로 촬영해 애니메이션 효과를 입히는 로토스코핑 기법을 시도했으며, <사랑은 단백질>(2008)에서는 3D 더미를 만들어 놓고 이를 바탕으로 2D로 디테일한 부분을 작업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돼지의 왕>(2011) 역시 3D와 2D의 장점을 혼용하는 이 방법을 활용했다. ⓒ 이현진, 애니메이툰

<돼지의 왕>이 투자를 받지 못해 제작이 불투명했을 당시, 연상호 감독은 왕갈비 집 간판을 가리키며 "'돼지의 왕' 갈비라고 홍보를 해주고 후원을 받아볼까요?"라는 우스갯소리를 했었다. 

믿었던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제작지원은 받지 못했다. 한국 애니메이션, 게다가 계급사회의 폭력을 소재로 한 성인용 만화영화에 대한 투자는 기대하는 것 자체가 정신 나간 짓이었다. <지옥: 두 개의 삶><사랑은 단백질> 등의 중편으로 애니메이션계는 물론 영화판에서도 주목을 받았지만, 연상호 감독은 이때 애니메이션을 그만두려 했다.

- <돼지의 왕> 완성까지 우여곡절이 좀 많았죠?
"한때 애니메이션 안 하려고 했어요. 장편 감독으로서 꿈을 펴보지도 못하고 끝나는 구나, 싶었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너무 절박하던 찰나에 실사영화 제의를 받아서 1년 동안 시나리오를 썼어요. 그러다가 실사영화 제작이 엎어졌고, 다시 백수가 되기도 했어요."

- KT&G 상상마당의 투자를 받기 전까지는 상당부분 혼자 만들었다고 들었어요.
"어떻게든 <돼지의 왕>을 세상에 내놓고 싶었어요. 영화 시나리오를 쓰면서 혼자 틈틈이 배경과 원화를 그리고 있었거든요. 이걸 웹툰으로 올려볼까, 별의별 생각을 다했죠. 근데 결정을 못했어요. 호흡도 영화 호흡이고, 만화로 공개하기에는 아까웠어요. 그냥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자 결정하고 혼자 그리던 중, 2010년 8월 KT&G 상상마당의 1억 원 투자가 결정됐습니다. 혼자 그려놓은 그림이 꽤 되더라고요. 장형윤 감독(애니메이션 <아빠가 필요해><무림일검의 사생활>)이 보더니 '미쳤다'고 할 정도로. 배경 600장에 1200 커트 정도, 이미 절반은 그려놓은 셈이었죠."

낭만적으로 그려지던 약자들의 사회를 깨부순다

 <돼지의 왕>에서 권력을 가진 이른바 '개'들에게 억압 당하던 '돼지'들은 '돼지의 왕' 철이의 등장으로 연대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영웅의 등장이다. 하지만 연상호 감독은 "영화에서 낭만적으로 그려지곤 하던 약자들의 사회가 위험해 보였다"고 말했다.

<돼지의 왕>에서 권력을 가진 이른바 '개'들에게 억압 당하던 '돼지'들은 '돼지의 왕' 철이의 등장으로 연대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영웅의 등장이다. 하지만 연상호 감독은 "영화에서 낭만적으로 그려지곤 하던 약자들의 사회가 위험해 보였다"고 말했다. ⓒ KT&G, 스튜디오다다쇼


<돼지의 왕>은 회사 부도 후 충동적으로 아내를 살해한 황경민과 소설가가 되지 못해 자서전 대필 작가로 살아가고 있는 정종석이 만나, 15년 전 중학교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비극적으로 혹은 비루하게 현재를 살고 있는 30대 남자 두 명의 학창시절은 다시 꺼내보고 싶은 아름다운 추억이 아니다. 그들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개'의 관리를 받는, 남을 위해 살을 찌우는 '돼지'일 뿐이었다. 학교 내 약자인 경민과 종석이 권력을 가진 아이들에게 구타를 당할 때, 수많은 돼지들이 죽은 눈빛으로 이를 바라본다.    

- 학창시절을 다룬 이야기가 실화라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실화라기보다, 제가 겪었던 일들이 조금씩 소재로 들어갔어요. 극중 가난한 정종석이 입고 온 누나의 브랜드 청바지를 다른 아이들이 찢어 놓은 이야기는 실화죠. 학교 다닐 때, 저는 관찰자적인 입장이었어요. 어느 날, 종석의 실제 모델인 가난한 아이가 바지가 다 찢겨서 체육복을 입고 하교를 하게 됐어요. 그 아이와 못 사는 친구들끼리 모여 있다가 제가 지나가니까 '상호야'하고 부르더라고요.

아는 체 하기가 무서웠어요. 소위 '찍힌' 그룹과 말을 섞기 무서워 모른 체를 했죠. 뒤에서 '어휴, 똑같은 새끼들'이라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그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어요. '그래, 나는 힘이 없구나' 그런 생각이 지금까지 영화를 만들 때 동력이 되고 있어요."

- 말하자면 방관자인데, 최규석 작가의 원작 만화가 있긴 했지만 전작 <사랑은 단백질>에서도 가해자만큼 방관자나 관찰자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던 것 같아요. 생활고에 찌든 통닭집 사장 아빠 닭이 아들 닭을 튀겨 오자 이를 죄책감 없이 맛있게 먹는 사람은 물론 연민하며 고뇌하는 사람도 보여줬잖아요. 
"주로 가해자나 방관자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편이에요. 친구인 최규석 작가도 제가 그 특징이 인상적이라고 말한 적이 있고요. 이번에 <돼지의 왕>은 그 사이에 있는 약자를 옹호한다기보다, 그들의 사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약자는 평면적이고 낭만적으로 그려지는 편이에요. 실상은 너무 끔찍하고 잔인하니까. 그런데 그런 낭만이 위험하다는 생각을 오래 했어요.

괜히 약자가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여러 가지 요건이 엮이면서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뭔가를 일으키기가 쉽지 않아요. 혁명을 하기 어려운 사회 구조죠. 낭만적으로 생각해서 뛰어들었다가 튕겨져 나오기를 반복하게 되는데 그런 약자들의 사회를 리얼하게 그리고 싶었어요."

 <돼지의 왕>은 <똥파리>의 감독 겸 배우 양익준과 <퀵><쩨쩨한 로맨스>의 배우 오정세가 각각 정종석과 황경민의 목소리 연기를 맡았다. <똥파리>의 김꽃비, <도약선생>의 박희본, <카페 느와르>의 김혜나 등 여배우들은 종석과 경민, 그리고 철이의 중학생 시절을 맡았다. 연상호 감독은 "익준이 형이 중학생 연기를 못 하겠다고 해서 여배우들을 섭외했다"고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했다.

<돼지의 왕>은 <똥파리>의 감독 겸 배우 양익준과 <퀵><쩨쩨한 로맨스>의 배우 오정세가 각각 정종석과 황경민의 목소리 연기를 맡았다. <똥파리>의 김꽃비, <도약선생>의 박희본, <카페 느와르>의 김혜나 등 여배우들은 종석과 경민, 그리고 철이의 중학생 시절을 맡았다. 연상호 감독은 "익준이 형이 중학생 연기를 못 하겠다고 해서 여배우들을 섭외했다"고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했다. ⓒ KT&G, 스튜디오다다쇼


"'좌빨' 애니라고? 다루지 않는 시선 담고 싶었다"

- 영화에서 계급주의나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것 때문에 일부에서는 '좌빨' 애니메이션이라고 치부하기도 하던데요. 부산에서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와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1인 시위도 했잖아요. 영화 개봉도 전에 이념적으로 비춰지는 것이 부담스럽지는 않았나요?
"'좌빨' 애니메이션이라... 작품 자체에서도 그런 이념적인 느낌이 안 들어요. <돼지의 왕>은 논리보다 감성적으로 풀어가려고 한 작품이에요.

부산시에서 영화제 기간에 희망버스가 오는 것을 안 좋게 생각했는데, 솔직히 짜증났어요. 근데 이건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영화인들이 전혀 나서지 않을까봐 걱정도 많이 했어요. 영화제 때 생방송이 하나 잡혀 있었는데, 그때 방송 사고라도 내려고 했죠. 근데 첫날부터 꽃비(<돼지의 왕> 어린 종석 목소리)가 레드카펫에서 한진중공업 작업복을 입으면서 이슈가 되어버렸잖아요. 나중에 꽃비는 인터뷰에서 그것과 관련된 질문은 빼달라고 했더라고요. 본질하고 관계없이 자체로만 이슈가 되니까. 같은 맥락에서 1인 시위도 이념보다는 상식을 따른 것,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연상호 감독은 가장 공을 들인 장면으로 중학교 시절 회상이 끝나고 현재의 종석과 경민이 옥상에서 다투는 장면을 꼽았다. 배우들의 목소리 연기는 선녹음되어 그들의 표정과 행동, 목소리 등을 그림체에 반영했다.

연상호 감독은 가장 공을 들인 장면으로 중학교 시절 회상이 끝나고 현재의 종석과 경민이 옥상에서 다투는 장면을 꼽았다. 배우들의 목소리 연기는 선녹음되어 그들의 표정과 행동, 목소리 등을 그림체에 반영했다. ⓒ KT&G, 스튜디오다다쇼



- 사실상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 자체로만 보자면 <돼지의 왕>이 만듦새의 퀄리티가 높은 건 아니잖아요.  
"아무래도 퀄리티가 높은 편은 아니죠. 이상하게, 한국 사람들은 <돼지의 왕>을 왜 실사 영화로 안 하고 하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냐고 물어봐요. 외국 사람들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나, 저예산으로 만들었다는 이슈보다는 영화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 자체를 궁금해 하고요. 애니메이션은 우연히 찍히는 것 없이 그리는 사람의 의도가 들어가는 그림이니까 표현주의적일 수밖에 없고,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용이한 장르인 것은 맞아요. 다만 장르 자체보다도, 내용적으로 사람들이 다루지 않는 시선을 담고 싶어요."

- 애니메이션을 계속 하실 건가요? <마당을 나온 암탉> 성공 후에 가족용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달라는 요청도 많이 받으셨다고 들었는데, <지옥><돼지의 왕> 등의 전작을 봐서는 참 아이러니한 접근이네요. 예정된 차기작은 있나요?
"애니메이션은 이제 안 할 수가 없게 됐죠.(웃음) 전작을 보고 접근했다기보다 <돼지의 왕>이 워낙 1억 원 대의 저예산으로 장편을 만들었다니까 다들 솔깃한가 봐요. 지금 생각하고 있는 차기작도 애니메이션입니다. <사이비>라고, 예전에 실사영화 시나리오로 써놨던 건데 <돼지의 왕>과 비슷한 분위기가 될 것 같아요. 사이비 기독교를 주제로 한 이야기로, 선한 가해자와 악한 피해자가 나와요. 무조건 가해자는 악하게, 피해자는 선하게 접근하는 일반적인 시각과 다르게 그릴 겁니다."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은 11월 3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개봉관은 20관으로 많지 않지만 연상호 감독은 첫 주 성적에 따라 조정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돼지의 왕 연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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