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용 감독의 <만추> 이질적 공간에서 극단의 사랑관을 가진 남녀가 나누는 늦가을처럼 짧고 강렬한 사랑을 보여준 영화, <만추>의 한 장면.

▲ 김태용 감독의 <만추> 이질적 공간에서 극단의 사랑관을 가진 남녀가 나누는 늦가을처럼 짧고 강렬한 사랑을 보여준 영화, <만추>의 한 장면. ⓒ ⓒ 보람엔터테인먼트

 

(스포일러 범벅)

 

늦겨울, <만추(晩秋)>를 보았다. 화려한 액션씬도 화끈한 정사씬도 볼 수 없었지만 늦가을을 본 것 같기는 하다.

 

<만추>는 사랑이 너무 심각한 애나(탕웨이)와 사랑은 게임처럼 가벼운 훈(현빈) 사이의 늦가을처럼 짧지만 강렬한 사랑을 담고 있다. 이야기는 남편을 살해한 죄목으로 수감된 애나가 어머니의 장례식에 가기 위해 72시간 동안 풀려나고, 버스에서 만난 훈에게 30달러를 빌려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훈은 갚을 때까지 가지고 있으라며 자신의 손목시계를 애나에게 건넨다. 이는 훈이 하고 있는 직업상의 거래와 유사하다. 그는 돈 많은 누님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돈을 번다. 따라서 돈과 시계의 교환은 애나의 돈을 훈이 시간으로 보상하게 될 것을 의미한다.

 

사랑을 파는 훈에게 사랑은 유희이며 그것은 전혀 심각하지 않다. 반면, 결혼 후에도 오랫동안 사랑한 남자를 잊지 못해 우발적으로 남편을 살해하고, 그럼에도 여전히 옛 사랑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애나에게 사랑은 절박하며 절대 변할 수 없는 것이다. 애당초 두 사람의 사랑관은 너무도 달랐지만 어쩌면 그러한 차이가 두 사람을 자석처럼 강하게 끌어당긴 이유인지도 모른다.

 

유령처럼 도시를 부유하는 애나와 훈

 

안개와 비가 잦은 시애틀에서 그들은 다시 만난다. 자신을 슬그머니 피해버리는 가족들은 물론 떠나버린 옛 사랑에게서도 마음을 두지 못한 애나가 예정보다 빨리 돌아가기 위해 망설인 버스터미널에서 훈을 만난 것이다. 한 밤의 정사로 얼마간의 돈이 생긴 그는 애나에게 다가가 빌린 돈 30달러를 갚는다. 하지만 애나는 훈의 시계(시간)을 바로 돌려주지 않음으로써 교환을 지연시킨다. 여전히 훈의 시간은 애나의 것이다.

 

애나에게 시간을 저당 잡힌 훈은 늘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만족시켜주려 노력한다. 모텔에서, 식당에서, 관광버스에서, 문 닫힌 놀이공원에서, 그리고 유령테마파크에서. 고객이 만족할 때까지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만족하지 못할 경우 환불도 해준다는 원칙을 갖고 있는 그이지만 애나는 좀처럼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다.

 

문 닫힌 놀이공원에서 범퍼카를 타던 두 사람은 타인의 입을 빌려 대화를 나누고, 아무도 없는 유령테마파크에서 애나는 훈에게 그가 알 수 없는 중국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재미있는 것은 유령테마파크에서 그들이 관광객들에게 유령으로 오해를 받는 장면이다.

 

어쩌면 그들은 실제 유령인지도 몰랐다. 결코 주인이 되지 못하는 이민 1세대의 중국인 자녀와 한국에서 막 건너온 건달 청년과 같은 이방의 존재들은 도시의 유령일 수밖에 없다. 사랑에 상처 입은 애나와 사랑을 이용해 돈을 버는 훈, 두 사람은 육(肉)을 잃고 혼(魂)만 떠도는 유령과 정확히 반대이나 둘 다 온전히 갖추지 못했다는 점에서 육은 있되 혼(사랑)은 없는 빈껍데기 유령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관광객들이 그들을 오해해 소리 지른 장소는 (고기가 즐비하게 전시된) 정육점 가게였다.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은 그들만의 사랑이 시작되고

 

처음의 자리로 돌아온 그들은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헤어지는 자리에서 훈은 애나의 돈을 받지 않고 훈을 기다리던 애나는 그의 시계를 두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로써 거래는 파기되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더 이상 애나의 것처럼 심각하지도, 훈의 것처럼 가볍지도 않은 그 어딘가에서 시작될 것을 예고하고서 말이다.

 

어머니의 장례식 날 훈이 찾아왔다. 애나와 훈의 세 번째 만남이다. 장례식이 끝난 후 어머니가 남긴 중국식 식당에서 훈은 애나가 사랑했던 남자와 치고받는다. 애나는 자신의 포크를 사용해 남자를 때렸다는 훈의 말도 안되는 변명에 남자를 다그치며 울음을 터트린다. 비로소 애나의 오랜 상처가 치유되고 그녀는 교도소로 돌아가는 버스에 오른다. 애나를 배웅하던 훈은 모른 척 다시 버스에 오르고 그녀는 다시 훈을 만난다. 그들의 네 번째 만남.

 

- 안녕하세요. 저는 훈이에요.

- 안녕하세요. 저는 애나에요.

 

두 사람은 새롭게 인사를 나누고 이제 그들만의 사랑을 시작한다.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은 그 어딘가에서. 하지만 예고된 것처럼 애나는 다시 수감되어야 하고 살인 사건의 누명을 쓴 훈은 곧 잡혀가야만 한다. 그들의 과거와 죄를 모두 덮어줄 것만 같은 안개 낀 호수에서 나눈 길고 진한 입맞춤은 그래서 더욱 애절하다. 입맞춤처럼 짧고 강렬하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그들의 사랑은 이제 어떻게 될까.

 

훈은 그녀가 나오는 날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을 남긴 채 손목시계를 채워주고 사라진다. 2년 후 출옥한 애나는 훈과의 다섯 번째 만남을 기다리며 휴게소에 앉았다. 훈을 기다리는 애나를 잡는 롱테이크 숏처럼 그녀는 아마도 아주 오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볼 만한 영화의 볼 만한 장면들

 

사실 따지고 보면 영화의 이야기는 두 사람의 만남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영화는 애나가 감옥에 갇히게 된 사건인 남편을 살해한 후의 장면에서 시작해 2년 후 출감해 훈이 만나자고 한 휴게소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으로 끝난다. 감독은 이야기의 주인공인 애나와 훈 두 사람을 똑같은 비중으로 다루고 있지 않으며, 영화는 철저히 애나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카메라는 종종 훈의 얼굴을 담기도 하지만 훈이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어를 우리는 알아듣는 것이나, 길고 긴 두 사람의 키스장면에서 애나만을 집요하게 찍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훈보다는 애나가 우위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김태용 감독은 애나를 연기한 탕웨이에게 영화의 많은 부분을 걸고 있었고 이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탕웨이는 무리 없이 애나를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성공적인 탕웨이의 연기 외에도 볼 만한 것이라면, 안개와 비를 배경으로 한 장면들을 꼽을 수 있겠다. 스산한 거리 풍경, 텅 빈 놀이공원, 유령테마파크도 두 사람의 가슴 아픈 사랑을 증폭시킨다. 특히 김태용 감독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환상 장면은 샤갈의 그림을 연상시키며 그 자체로도 훌륭한 단막극이 된다. 또 72시간 동안의 사랑을 감옥에 있었던 7년과 2년 사이에 둔 것도 우연치고는 재밌는 것이고.

 

이렇듯 <만추>는 탕웨이의 연기와 현빈의 '얼굴', 공들여 찍었을 몇몇 장면들만으로도 볼 만한 영화이다. 두 사람의 아슬아슬하고 미묘한 감정선에 슬쩍 타올라 언제 왔냐싶게 금방 지나가버리는 늦가을 같은 사랑에 취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다.

덧붙이는 글 | 제 개인 블로그 http://sonsang.tistory.com/142 에 게재되었습니다. 

2011.02.21 09:45 ⓒ 2011 OhmyNews
덧붙이는 글 제 개인 블로그 http://sonsang.tistory.com/142 에 게재되었습니다. 
만추 탕웨이 현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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