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공식 포스터 <울지마 톤즈> 극장 개봉영화 공식 포스터

▲ 영화 공식 포스터 <울지마 톤즈> 극장 개봉영화 공식 포스터 ⓒ 마운틴픽처스

지난 22일 영화를 보고 나자마자 나는 페이스북에 메시지 하나를 날렸다. '사람에 대한 이런 경외감을 느껴본 것은 노무현 대통령 이후 두번째 같군요. 고 이태석 신부님의 명복을 빕니다.' 정말이었다. 그에 대한 경외감 외에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객석에 불이 켜지자 다들 눈물을 닦는다. 손수건으로 혹은 그냥 손으로, 아니면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하고 붉어진 눈시울을 그냥 내버려 둔 사람들도 있었다. 내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고 아내도 흐느끼고 있었다. 6살 밖에 되지 않은 딸애에게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데려갔는데 녀석은 울지 않고 있었다. 아직 영화가 전하는 이야기를 이해하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아트선재센터 극장 안에는 젊은 연인들도 몇 보였지만 대부분 50대 아주머니, 아저씨들이었다. 관객들을 보니 <워낭 소리>의 흥행 성공 원인이 떠올랐다. 평소 극장에 가지 않는 중장년 세대들을 극장으로 불러 들였던 <워낭 소리>가 292만 관객을 동원했는데 배급사 '마운틴픽처스'에 따르면 작년 9월 9일 개봉한 이 영화는 현재도 60개 개봉관에 상영 중이며 지난주로 3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매주 새로운 기록을 세우고 있다. 과연 이 영화의 힘은 무엇일까? <울지마 톤즈> 역시 <워낭 소리>처럼 중장년층의 극장 나들이를 이끌어 내고 있지만 그 힘은 <워낭 소리>와 다른 듯하다.

사실 이 영화는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영화는 아니다. <워낭 소리>도 애초에 방송용 다큐멘터리로 기획된 게 아니라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워낭 소리>는 방송용이든 아니든 하나의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철저하게 기획되고 제작진이 만족할 수준의 내러티브를 담아내고자 긴 시간 기다려 제작된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다. 그런데 <울지마 톤즈>를 보면서는 극장용 다큐멘터리로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톤즈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바친 이태석 신부

톤즈 사람들과 이태석 신부 살아 생전 톤즈 아이들과 즐거운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태석 신부

▲ 톤즈 사람들과 이태석 신부 살아 생전 톤즈 아이들과 즐거운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태석 신부 ⓒ 마운틴픽처스


2003년 KBS '한민족리포트-아프리카에서 찾은 행복, 수단 이태석 신부'에서 그의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그리고 그가 2010년 1월 암으로 운명을 달리한 후 4월에 KBS스페셜을 통해 '수단의 슈바이처 박사, 故 이태석 신부-울지마 톤즈'라는 방송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었다. 당시 시청률은 3.67%(TNMS 기준 가구시청률)였다. 교양프로그램이라 하더라도 높은 시청률은 아니었다.

극장 개봉 버전은 KBS스페셜을 연출한 구수환 PD가 방송용 다큐멘터리에 다른 영상들을 추가하여 구성을 일부 바꾸고 재편집한 것이다. 이 영화는 TV에서 친근한 아나운서 이금희씨의 내레이션과 구성, 형식 덕분에 한편의 방송 다큐멘터리를 본 느낌을 준다. 일부 MBC의 다큐멘터리 '북극의 눈물', '아마존의 눈물' 등이 TV방영 후 3부작 혹은 4부작 연작을 재편집하고 TV에서 공개되지 않은 화면을 추가하여 극장에서 개봉했으나 '아마존의 눈물'이 10만(104,201명) 정도 관객을 모았을 뿐 큰 흥행은 기록하지 못했다. TV에서도 큰 반응이 없었던 '울지마 톤즈'가 왜 극장에서 롱런을 하고 있는 것일까?

굳이 흥행의 요인을 찾자는 것은 아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결국 이 영화는 작품성이 아니라 이태석 신부라는 거룩한 성인의 힘이 영화의 흥행에 가장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태석 신부는 그리 넉넉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기대대로 악착같이 공부해서 인제대 의대를 졸업한 의사 선생님이었다. 그런 그가 사제 품의를 받고 그 직후 바로 수단으로 떠나 톤즈라는 작은 마을에서 그들의 아픈 몸과 마음을 치료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의 이런 인생여정에 영향을 준 것은 5학년 때 성당에서 보았던 한 편의 영화였다. 하와이 인근 '몰로카'섬이라는 곳에서 한센인을 돌보다가 본인도 48세의 나이에 한센병에 걸려 돌아가신 다미안 신부님의 일생을 다룬 영화였다. 

이태석 신부 그는 단순히 병원을 짓고 아픈 몸을 치유하는 의사가 아니라 톤즈 사람들에게 악단을 만들어 음악을 가르치는 등 오랜 내전으로 상처받은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는 의사였다. 특히 한센인에 대한 그의 애정과 헌신은 남달랐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미래를 위해 학교를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들에게 미래라는 희망을 심어주고자 했던 의사였던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고 종교에 귀의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헌신적으로 봉사하던 이가 암에 걸렸고, 결국 본인의 생명을 구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가 버렸다. 그의 죽음 이후 그곳에서 이태석 신부님의 역할을 해주는 이는 없다. 하지만 제작진이 다시 찾은 톤즈는 분명 달라져 있었고 그곳 사람들은 과거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다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이태석 신부를 그리워하며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작품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없었던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

투병중인 이태석 신부 영화의 한 장면, 그는 투병 중에도 언제나 희망이고자 노력하고 있는 이태석 신부님의 모습

▲ 투병중인 이태석 신부 영화의 한 장면, 그는 투병 중에도 언제나 희망이고자 노력하고 있는 이태석 신부님의 모습 ⓒ 마운틴픽처스


평소 다큐멘터리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본인의 경우 작품을 보고 나면 이 작품은 이런 점이 참 훌륭하고 구성은 어떻고 등을 생각하기 마련인데 이 작품을 보고는 달랐다. 작품에 대한 어떤 평도 떠 오르지 않았다. 그냥 단 한 가지만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한 사람의 헌신과 봉사가 어떻게 이렇게도 숭고하고 거룩해 보이는 것일까?'

그 이전의 어떤 성인의 헌신과 봉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도 이런 강렬한 기분을 느껴 본 적이 없다고 감히 이야기할 정도로 그는 거룩한 성인이었다. 이 영화의 힘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이태석 신부, 그의 거룩한 정신과 삶이 관객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투병기간 중에도 요양원에서 그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영화에 나온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서는데 영화 속에서 인터뷰를 한 외국인 신부님의 말이 떠올랐다.

"그렇게 젊고 재능 많은 분을 하나님이 왜 이토록 빨리 데려 가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지금 나이가 70인데, 차라리 저를 데려가신다면 참 기쁘게 가겠는데, 정말 할 일 많은 사람을... 주님의 일은 신비니까요"

그의 죽음은 그와 함께 했던 수단의 톤즈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를 아는 모든 이들 혹은 그를 몰랐더라도 영화를 통해 방송을 통해 그를 알게 된 모든 이들에게 안타까움을 던져 주고 있다.

보고 난 후 나는 개인적인 반성을 했다. 연말에 흔하디 흔한 불우이웃 돕기 성금 한 번 낼 때도 이런 저런 생각으로 망설였던 나는 어떤 인간인가? 저렇게 개인의 인생을 모두 내어 던지고 타인을 위해 살았던 이도 있는데 나는 무엇인가? 영화를 본 이들 중에서 이런 생각을 과연 나만이 했을까? 아닐 것이다. 관객들의 눈물에는 고인에 대한 안타까움을 포함하고 있겠지만 사회라는 무리 속에서 자신만을 위해 살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다큐멘터리 웹진 '드가의 다큐멘터리 이야기(www.degadocu.com)'이 제공합니다.
이태석 울지마톤즈 다큐멘터리 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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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료방송 채널에서 교양다큐멘터리를 주로 연출했, 1998년부터 다큐멘터리 웹진 '드가의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운영. 자연다큐멘터리 도시 매미에 대한 9년간의 관찰일기 '매미, 여름 내내 무슨 일이 있었을까' 2016년 공개, 동명의 논픽션 생태동화(2004,사계절출판사)도 출간. 현재 모 방송사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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