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밀양> 이후로 3년 만에 이창동 감독이 신작영화 <시>를 선보였다. 그의 다섯 번째 영화다. 이미 전편에서 그는 매번 독특한 시각과 관점으로 관객의 주목을 받았다. 그것이 느와르든 (<초록물고기>), 망각할 수 없는 과거든 (<박하사탕>), 장애문제든 (<오아시스>), 고단한 세상살이든 (<밀양>) 이창동에겐 이제 고유한 표지가 빛을 발한다.

 

영화감독이 남달라야 한다는 것은 불문율이다. 개성을 상실한 감독을 우리는 주목하지도 기억하지도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창동은 돋보인다. <괴물>의 봉준호나 <올드 보이>의 박찬욱, <극장뎐>의 홍상수 정도가 그와 견줄 수 있을까. 이런 평가는 물론 매우 자의적이며, 따라서 객관성 문제는 논외다. 그럼에도 이창동은 독특하다. <시>도 그런가?!

   

미자의 이원적인 삶의 실타래

 

 왜 <시>인가? 경제적 가치만을 중시하는 일상 속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왜 <시>인가? 경제적 가치만을 중시하는 일상 속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 파인하우스필름

미자는 올해 예순여섯의 늙은 여자다. 남한강에서 멀지 않은 소도시 서민 아파트에서 중학교 3년생 손자와 살아가는 그이의 삶은 단출하다. 따라서 미자의 동선 역시 복잡하지 않다. 늘그막에 찾아든 질병으로 인한 병원과 생계비를 위한 간병인 방문 정도가 고작이다. 관객은 미자 만큼이나 느릿한 속도로 그이의 일상과 환경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하지만 생의 여러 구비에서 인간은 매양 색다른 사건과 사람을 만나는 법. 미자도 예외가 아니다. 차고 넘치는 숱한 사건과 관계의 파탄으로 얼룩지고 있는 21세기 '역동적인' 대한민국에서 누군들 예외가 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시>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과 관계의 서사는 적잖은 설득력을 가진다. 우리 사회의 허다한 허망함과 황망함 때문에.

 

미자의 단조롭고 굴곡 없는 삶에 몇 가지 사건이 틈입한다. 노환으로 인한 치매와 간병인 문제, 손자로 생긴 사건이다. 그 같은 문제에 맞닥뜨린 미자가 어떤 해결을 찾아가는지 영화는 시간의 순차성에 따라 관객에게 제시한다. 여기까지라면 영화는 텔레비전 드라마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창동은 여기서 '시'라는 전혀 새로운 차원을 제기한다.

 

문화원이 개최하는 강좌에서 미자는 평생 처음 '시'의 세계와 만난다. 어렸을 적부터 시를 쓸 수 있을 거란 말을 들었던 미자가 마침내 시와 만난 것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낯익은 몇 편의 시를 들려준다. <그리운 부석사>, <너에게 묻는다>, <시를 쓴다는 것> 등이 낭송된다. 영화는 이로써 일상과 시의 두 날개로 시원스레 창공으로 날아오른다. 

      

남루하고 허접한 일상과 미자

 

"아무 일 없어도 세상에/ 찔레 아카시 진다 산에는" (<산에는>, 전문)

 

언젠가 뒷산에서 인생을 생각하며 만든 단시다. 일본의 강력하고도 유구한 시 형식인 '하이쿠'를 변형하여 써본 것이다. 열아홉 글자로 이루어진 단시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자연과 세상살이의 필연적인 연관이었다. 무심히 흐르는 것 같은 삶의 고비마다 무엇이든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다만 무디고 굼뜬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할 뿐.

 

미자에게 왜 아픔이 없겠는가. 미자는 세상과 불통하며 사는 노파다. 그이가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는 부산에 사는 딸이다. 하지만 딸에게도 미자는 감추고 숨긴다. 슬며시 찾아온 치매도 손자의 일탈도 미자는 알려주지 않는다. 영화는 수다스럽지 않게, 왜 그런지, 왜 그래야 하는지 보여준다. 그래서 미자의 고단한 일상은 더욱 안쓰럽게 다가온다.

 

미자가 비를 흠뻑 맞는다. 우산도 없이 강변에서 비를 맞는다. 무엇인가 적으려던 수첩에 굵은 빗방울들이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긴다. 여백을 채우는 물방울들. 미자는 바위에 앉은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비에 젖은 그녀가 간병환자를 돌보러 돌아온다. 그리고 중풍환자의 마지막 바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채워준다. 표정 하나 흐트러짐 없이.

 

며칠 전의 완강한 미자와 제 발로 찾아가 그의 바람을 들어주는 미자의 선택이 말하는 바는 무엇일까. 수첩에 빼곡하게 들어찬 빗방울이 인생행로의 비의라도 던져주었단 말인가. 크고 너른 자연의 품 속에서 작디작은 빗방울로 존재하는 미자와 거기서 발원하는 허무와 허적 때문인가.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 물줄기를 이루고 강으로 흐르는 자연과 세상.  

 

시를 찾아가는 여정

 

"살구는 온몸을 땅바닥으로 내던진다. 땅바닥에서 구르고 발핀다. 다음 생을 위해." (미자의 <수첩>에서)

 

맞춤법마저 틀리게 적은 미자의 기록이다. 시상을 찾아 헤매는 늙은이의 행적이라니, 얼마나 생뚱맞은 일인가. 그래서 <시>는 더욱 은밀하고 낯설며 신선하다. 허접하고 남루한 일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육신의 고통과 외로움의 한가운데서 미자는 시를 찾아 떠난다. 아주 늦게 찾아온 찬란한 꿈의 실현을 위해 그이는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다.

 

꽃무늬 옷과 화사한 머플러, 하얀 모자로 멋을 낸 미자가 꿈 속을 걷듯 길을 걷는다. 하지만 그녀의 흉중에는 묵직한 돌멩이가 자리하고 있다. 손자의 일탈로 인한 문제처리의 중책이 맡겨진 터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자는 금세 잊는다. 모든 것을 잊어버린 미자가 시 세계로 달려 들어간다. 그러다가 땅에 떨어진 살구에서 시상을 얻는 것이다.

 

미자의 시상을 완전하게 해주는 이는 손자와 관련되어 있는 소녀의 엄마다. 그러나 시에 푹 빠져버린 미자는 모조리 망각한다. 미자는 거기서 생의 웅숭깊은 깨우침에 한 걸음 다가간다. 영화의 아이러니다. 설령 당사자는 아니더라도 피해자와 가해자 입장에 있는 두 여인네의 대면에 일상과는 거리가 먼 '시'가 깊숙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미자는 시를 찾아 떠돌면서 누구보다도 멀리 나아가고, 누구보다도 깊이 있게 시에게 다가간다. 시를 찾아가는 궁극의 여로가 자신에게 허여된 인생의 마침표나 되는 것처럼 미자는 중단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미자는 소녀가 되고, 소녀는 미자가 된다. 시가 삶이 되고, 삶이 시가 되는 윤회의 순환에 자신을 시나브로 던져 넣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는 삶이고, 삶은 시다

 

시를 쓴다는 것은/ 깊은 밤 잠 깨어 홀로임에 울어보는/ 무너져 가는 마음의 기둥/ 꼿꼿이 세우려/ 참하고 단단한 주춧돌 하나 만드는 일이다 (<시를 쓴다는 것>, 제2연 일부)

 

조영혜 시인의 <시를 쓴다는 것>에서 발췌한 것이다. 시와 주춧돌을 연결하는 사이참에 자리한 한밤의 고독과 무너지는 마음의 기둥이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미자가 느끼는 절망과 고적과 붕괴의 상념을 생짜배기로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세상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 누구도 들어줄 수 없는 회한과 아픔과 고독을 견뎌야 하는 미자.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손자와 배드민턴을 치고, 밥을 채근하고, 사람을 만들려는 미자의 노력은 애틋하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세상은 변하지 않으며, 손자 역시 변할 기미가 털끝만큼도 없다. 모임에 나가서 시에 가까이 다가가려 해도 시가 다가오지 않는 것처럼. 그래서 미자는 방향을 바꾼다. 시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시를 찾아가기로 한다.

 

김용택 시인이 진행하는 마지막 강의시간. 시인은 한 편의 시와 꽃다발을 선물로 받는다. 누구 한 사람 시를 써내지 못하고 종강을 맞지만, 미자는 완성도 높은 시를 써낸다. 거기서 우리는 홀연히 깨닫는다. 미자가 도달한 삶과 시의 상호성에 대한 성찰과 공력이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그것이 어쩌면 '고니의 노래'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21세기 한국에서 '시'를 쓰고 <시>를 본다는 것

 

어제와 오늘이 판에 박은 듯 되풀이되고, 내일과 모레가 오늘의 반복이란 기시감으로 현대인은 살아간다. 격정적인 소설이나 드라마 같은 사건으로 세상은 넘쳐나고, 파탄 나는 관계와 비루한 일상이 교차한다. 하여 사람들은 더 이상 시를 소비하지 않는다. 시는 이제 몇몇 유한계급의 사치스러운 감정발산이거나, 낡고 철지난 소비재일 뿐이다.

 

이창동은 21세기 한국사회 정수리에 <시>를 만들어 바쳤다. 이쯤이면 '시'를 한 번 쯤은 읽어 봐야할 것 아니겠느냐고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영화관은 무척 썰렁하다. 대중의 반응도 '시'를 대하듯 미적지근하다. 그도 그럴 것이 시와 담 쌓은 젊은이들로 북적대는 공간이 영화관 아닌가. '에로티시즘'과 '칸'으로 선전되는 <하녀>와는 영 딴판이다.

 

<시>는 우리가 맞이한 대중사회의 정수를 여실히 보여준다. 향락과 쾌락과 속도와 망각의 늪지대에 실종된 시대를 입증하는 영화가 <시>다. 그러나 나는 희망한다. 시를 잃어버린 시대와 한시바삐 작별하기를. 시와 만나는 화사하고 아름다운 새날의 기대와 설렘으로 충만한 날이 하루빨리 다가오기를. 필시 이창동도 그걸 말하려 하지 않았을까!

2010.05.19 13:11 ⓒ 2010 OhmyNews
미자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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