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영화 줄거리가 들어있습니다.

마르타, 한니, 프라다, 리시 - 귀엽고(?) 깜찍 발랄한 네 분의 할머니가 사람을 계속 웃음 짓게 하더니 결국은 눈가를 촉촉하게 만들고 말았다. 한 편의 영화에 노년의 삶과 일, 사랑, 가족관계, 친구들과의 우정, 죽음과 사별을 이토록 잘 버무려 넣을 수 있을까. 감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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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 살 마르타 할머니는 함께 식료품점을 운영하던 남편이 9개월 전 세상을 떠나자 두문불출, 밤이면 깨끗한 전통 예복을 차려 입고 남편의 사진을 가슴에 안고 잠자리에 든다. 나름 죽음준비를 하는 것. 그러나 아침이면 저절로 눈이 떠지고, 또 하루가 시작된다. 죽는 게 그렇게 마음대로 될 리 없다.

목사인 아들과 며느리가 길 건너편에 살고 있지만 외로움과 슬픔은 오로지 할머니만의 것. 동네 친구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다가 젊었을 때 양재사로 속옷을 만들었던 경험이 있는 걸 알게 된 리시 할머니의 권유로 마을에 속옷 가게를 열기로 한다.

마을 사람들은 레이스 달린 속옷 가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을의 전통을 깨뜨리는 부끄러운 일이라며 들고 나선다. 마을의 지도자도, 목사 아들도, 다른 친구들도 다 마찬가지다. 어렵게 문을 연 속옷 가게는 그 기세에 눌려 문을 닫게 생겼는데, 이 때 할머니의 친구들이 똘똘 뭉친다.

평생 남편과 아들한테 눌려서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온 한니 할머니가 남편의 요양원 입소 문제로 아들과 갈등 끝에 가출을 감행하고, 양로원에서 우아하게 살던 프라다 할머니는 컴퓨터를 배우면서 인터넷 판매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마르타 할머니가 일일이 손수 만드는 속옷의 품질과 양로원 자수반의 협조를 얻어 속옷 하나하나에 새겨 넣는 마을 고유의 문양 덕에 속옷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간다. 뒤늦게 운전을 배우게 된 한니 할머니는 주문 상품의 택배 발송을 위해 우체국으로 가는 차량 담당이 된다.

마을의 여론을 주도하는 보수적인 젊은 남자들의 방해 공작은 집요하다 못해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할머니들의 몸에 위해를 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참으로 아프게 하고 그 마음을 짓밟는다. 이 과정에서 리시 할머니는 그동안 아무도 모르게 숨겨왔던 비밀이 친구들 사이에 완전히 까발려지는 일을 당하고, 결국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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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속옷 가게를 차리는 게 꿈이었던 마르타 할머니가 뒤늦게 그 꿈을 기억해내고 그 꿈을 펼치려 애를 쓰고, 한니 할머니가 운전 면허에 도전하고, 귀부인으로 살았던 프라다 할머니가 양로원 남자 친구에게 조심스럽게 마음의 문을 여는 과정의 반대편에서 동네 젊은 남자들이 보여주는 위선적인 모습은 우리들 내면에 숨겨진 자기중심적인 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다.

어머니의 속옷 가게를 창피하게 여기면서 아내 아닌 다른 여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다니는 일이 힘들다고 부모님 의견은 묻지도 않고 마음대로 요양원에 접수를 해놓고는 동네 양로원에 가서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식사를 대접하고 노인 예찬을 쏟아낸다.

이들의 위선과 이기심을 할머니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본다. 아니, 눈만 동그랗게 뜬 게 아니고 그들의 머리 꼭대기에서 그들이 쓰는 술수를 다 읽어낸다. 그리고는 그들이 생각지도 못한 허점을 찔러 속옷 가게를 지켜낸다. '우리 노인네들 걱정 말고 너희들 앞가림이나 잘하라'는 경고에 다름 아니다. 유쾌, 통쾌하다.

꿈을 꾸는 일의 중요함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비록 오래 전이었다 해도 꿈을 꾸었기에 인생의 한 시절에 그 꿈의 한 자락이 고스란히 되살아 날 수 있었다. 또한 꿈에 불을 지피고 북돋워주는 일의 소중함 역시 깨달았다.

마르타 할머니가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에만 품고 있던 꿈을 끄집어내 꽃 피울 수 있도록 부추긴 것은 리시 할머니였다. 리시 할머니 자신은 꿈을 꾸다 못해 꿈에 스스로 속아 버린 사람이긴 했지만, 마르타 할머니에게는 참으로 의미있는 역할을 해주었다.

영화가 끝나고 옆에 앉았던, 일행이라고 하던 두 분께 소감을 물었다.

"나이와 상관 없이 열정적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54세, 여)
"삶의 질까지 생각하며 늙어가야 할 것 같아요. 남의 이야기라고 웃고 넘길 것이 아니라, 마음의 준비를 하며 살아야 겠지요."(65세, 여)

네 분의 할머니와 함께 보낸 1시간 30분은 어르신들과 늘 만나며 일하는 나를 돌아보게 해주었다. 꼿꼿한 자기 관리와 비록 다리가 조금 불편하다 해도 도움 받기보다는 스스로 움직이는 모습, 단정한 옷차림, 지속적으로 유지해 가는 친구들과의 만남과 우정은 그 돌아봄에 덤으로 얻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회복지사로 어르신들을 만나면서 혹시라도 어르신들 인생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면은 없는지, 어르신들 뜻을 헤아릴 생각조차 하지 않고 밀어붙이고 있지는 않은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건 다 영화 속 할머니들이 해주신 말씀이다.

영화의 원제처럼 '늦게 핀 꽃(Late Bloomers)'은 피어나기까지 오랜 시간 참고 있어서 더 진한 향기가 오래 나지 않을까. 그게 또 노년의 힘일 것이다. 저절로 탄성이 나오는 스위스 산골 마을의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할머니들의 인생에 잠시 끼어들어 맘껏 행복을 맛본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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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할머니와 란제리 Die Herbstzeitlosen, Late Bloomers / 스위스, 2006> (감독 : 베티나 오베를리 / 출연 : 스테파니 글라제, 한스페터 뮬러, 안느마리 뒤링거 등)

* 이 영화는 2010년 1월 27일 신세계백화점 본점 10층 문화홀에서 열린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이야기가 있는 상영회' <시네마 시티 시네마 파티>프로그램이었다.
할머니와 란제리 노인 노년 노인과 일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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